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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7]비전의 나래 펼치는 북흥과자공장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1.04일 11:11
특별기획-중국조선족기업인(27)


로년일대

전임 김영숙사장


연길북흥과자공장이라면 대뜸 김영숙공장장을 떠올리게 된다. 북흥과자공장의 창시인이며 형상이며 기발이 바로 김영숙이다.


김영숙은 1960년에 연길시식품공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선후로 직장주임, 해방로상점 영업조 조장, 랭식점 경리도 해보았으며 연길시익민식료품공장의 공장장중임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에 앞당겨 퇴직하고 연길시북흥과자공장을 세웠다. 그는 친척과 취업대기 청년을 하나 둘 받아들여 경영을 시작했다.


규모가 크든 작든 기업이라는 이름을 띠면 살려간다는것이 생각대로 쉽지 않다. 김영숙녀사가 공장을 차린 이듬해 년말부터 1년동안 사탕가루공급이 정지되다싶이되였다. 당시 일부 공장들에서는 생산을 담보하고 거기에 돈벌이를 위해 사카린을 대용하였다. 김영숙공장장은 눈앞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얼만든지 그렇게 할수 있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공장의 제품과 자신의 신용을 목숨처럼 아끼는 그녀로 말하면 이는 허용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의 머리속에는 공장의 신용과 소비자들의 리익밖에 더 없었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굴리다가 공장에 쇠가마를 걸고 조선족의 전통방법으로 엿을 달여 과자가공에 투입하였다. 물론 원가가 높아 리윤이 떨어지고 무척 힘이 들었지만 그녀는 《북흥과자가 너무 맛있다》는 고객들의 칭찬에 더없이 기뻤고 새힘이 솟아나군 했다.


북흥과자공장이 잘된다는 소문이 린근에 퍼지자 과자공장들이 연길시에 우후죽순마냥 일떠서면서 시장경쟁이 아주 치렬하게 되였다. 새로 일떠선 한 공장의 공장장은 제가슴을 탕탕 치면서 《북흥과자공장은 개체공장인데 우리가 그까짓걸 먹어치우지 못하겠나?》 하고 큰소리 쳤다. 그 공장에서는 인츰 상해의 기술원을 초빙해다 새 과자품종을 생산했다. 북흥과자공장의 판매원들이 김영숙공장장을 보고 《상점들에서 규모가 큰 집체경영공장의 상해과자를 받지 우리 과자를 받지 않는다》고 맥풀린 소리를 했다. 더우기 심한것은 그 공장에서 자기 공장에 와 일하면 호구를 해결해주고 정식로동자로 받아준다고 한것이다. 북흥과자공장의 몇몇 기술공을 빼앗아가려는 시도였다. 하여 북흥과자공장은 움씰움씰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영숙공장장은 문제의 엄중성을 깊이 느꼈다. 그는 우선 종업원들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한편 새로운 방도를 찾기 위해 안깐힘을 썼다. 며칠밤 뜬눈으로 지새운 그녀는 시장경쟁에서 이기려면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해 질좋은 새 과자를 생산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인정했다. 그는 주저없이 북경, 상해, 심수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새 제과기술을 배웠으며 상해기술원을 초빙하여 밋있는 상해과자를 생산했다. 하여 다시 공장이 활기를 띠게 되였고 흔들리던 기술원마저 안착하고 생산에서 솜씨를 보이였다.


김영숙공장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 11월에 서울행을 택했다. 그녀는 서울구경을 제쳐놓고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서울시의 과자공장을 찾아다니며 보고듣고했다. 그러다가 서울시 신사동에 있는 서울대한제과기술학원에 입학했다. 좋은 학습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던 그녀는 공부에 일념했다. 하루시간을 두배로 늘려도 모자랄만큼 바삐 보냈다. 세개 학년 과목을 하루에 채워넣고 한달사이에 남들이 일년에 배울 학과목과 실습과목을 소화해야 했다. 침식을 잊고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열심히 공부하는 이 《연변아줌마》를 보고 제과학원의 사생들은 저마다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들이 딸라를 벌고있을 때 엄청난 학비를 지불하면서 《자비류학》으로 몇달간 과자생산의 새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상해 새 기술과 한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한 결과 북흥과자공장의 과자는 조선족의 구미에 맞고 부드러우며 고급스러웠다. 과자품종은 원래의 전병 한가지로부터 수십가지로 늘어났다.


째지도록 구차한 가정에서 태여나 말못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자란 김영숙공장장은 근본을 잊지 않았다. 해마다 《3.8절》이나 로인절이면 연변광영원을 찾아가서 위문금과 위문품을 드렸고 위문공연도 조직하였다. 로인들의 회갑잔치를 치러주었고 해마다 불쌍한 엄마를 선정하여 2만여원의 위문금을 의연했다. 2000여원 들여 북산가두에 전병굽는 기계를 증정하여 가두에서 자금난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었으며 가두로인활동실을 꾸릴 때도 서슴없이 천원을 보내주고 400원짜리 록음기와 2000여원어치의 무용복을 사주었다. 해마다 주둔군 무장경찰부대에 찰떡이며 송편을 갖고갔으며 종업원들을 데리고 가서 김치를 담그어주고 훈련으로 어지러워진 옷을 씻으라고 세탁기를 사주었다. 이 몇년사이 의연금만 해도 40ㅡ50만원 잘 된다. 이는 실로 한 녀공산당원, 녀강자, 녀사영기업가의 미거가 아닐수 없다. 이러한 그한테 정부에서는 많은 배려와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선후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우수사영기업가》, 《우수공산당원》, 《로력모범》, 성과 주 《10대녀걸》, 《민족단결모범》, 《3.8붉은기수》 등 영예칭호를 받았으며 1992년에 중국조선족녀성을 대표해 북경에서 열린 세계녀성대표대회에 참가했다. 1994년 9월 26일에 김영숙공장장은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개인》의 영예를 안고 인민대회당에서 강택민, 리붕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장년일대

김영숙공장장은 이렇게 간고한 역경속에서 거꾸러지지 않고 치렬한 시장경쟁의 소용돌이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억척스럽게 분전해왔고 결국 너무 지친 끝에 몸져눕게 되였다. 이후로 공장의 계주봉이 아들 최문일한테 넘겨졌다. 최문일씨는 연변1중을 졸업하고 참군했다가 복원후 연변건축공사에서 일했고 1996년부터 북흥과자공장에서 조장, 직장주임을 맡아하면서 생산제일선에서 발벗고 일했다.

지식의 박약함을 느꼈던 그는 2001년 8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연변과학기술대학 경영관리단과를 졸업했다. 그는 자신이 솔선수범해 학습할뿐만아니라 종업원들의 정책학습과 기술학습도 함께 틀어쥐였다. 평소 종업원들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정신면모를 개변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교육을 강화했다. 2003년에 새로 이 공장에 들어온 한 청년은 개체기업에서 로임이나 타면 되지 학습은 무슨 학습인가고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학습을 뒤전에 놓았다. 최문일은 그를 찾아 개체기업은 전반 사회경제발전에서 빠뜨릴수 없는 주요고리이며 개체기업에 기여하는것이 곧바로 국가에 기여하는것이라는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반복적인 담화를 통해 그 청년은 전변을 가져왔고 생산과 학습에서 앞장섰다. 하여 2005년 공장의 선진생산자로 당선되여 표창까지 받았다.


최문일이 공장의 전반적인 경영을 책임지고 안해 문순희가 생산과 관리를 책임졌는데 비록 분공은 다르지만 이들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하나하나의 난관을 돌파해나가며 어머님이 창업한 공장의 활로를 더 넓혀나갔다. 그들은 《안전과 량질로 믿음을, 영양과 별미로 효익을, 제품은 백성의 마음에 들게, 기업은 정부가 시름놓게》라는 네구절을 공장의 경영방침으로 제정하고 직장주임, 판매원, 위생원, 공급원의 직책을 분명히 제정하고 장려제도와 처벌제도를 엄격히 집행했다. 그들은 우선 원재료 선택부터 소홀히 하지 않고 합격품이 아니면 아무리 저렴한 가격이라도 절대 접수하지 않았다. 재료배합, 반죽순서와 시간, 온도 등 기술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생산하기에 이 공장의 제품은 시종 검험부문의 검사에 순조롭게 통과되였으며 줄곧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고있다. 그들은 생산의 수요로 발전촌에 6000평방메터에 달하는 식료품공장을 새로 세우고 한국의 선진설비, 일본의 선진설비를 도입했다.


최씨부부는 경상적으로 상점, 가두, 향, 촌에 내려가 민족민속식품시장의 수요를 료해하고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수시로 식품분석회, 전시회를 개최하군 한다. 시장의 수요에 충족을 주기 위해 새 제품 개발연구에 기술력량을 집중시켰으며 빵, 과자, 단설기, 월병 등 단일생산으로부터 전통민속식품인 입쌀만두, 감자만두, 칠색만두, 꿀떡 등 11개 계렬의 150여개 제품으로 품종을 늘렸다. 품종을 대폭 늘렸지만 질관리는 여전히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재료 구입관을 엄격히 하고 원재료 서류를 만들고 품질기록을 어기지 않았으며 가공과정에서 차질제품이 나오지 않도록 중시를 돌렸다.

이처럼 질관리를 착실히 틀어쥔 결과 이 공장에서 생산한 단설기계렬제품은 2001년 길림성질만리행추진회서《중점보호제품》으로 추대되였으며《북두천》 오인월병은 《길림명품》으로 평의되였다. 2004년에는 《북두천》표 단설기계렬제품이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로부터 《명표제품》으로 평의되였고 2006년 7월에는 길림성 《저명상표》로 평의되였다.


이들 부부도 어머님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회복리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28년간 연변광영원에 해마다 1만여원을 지원해주었으며 주내 재해지구나 성외 재해지구에도 서슴없이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사천 문천지진때도 4000원을 기증했으며 홍기촌에 3태자가 태여났을 때 6000원을 보내주었다. 가두를 통해 빈곤호를 부조해주고생활이 곤난한 대학생 2명을 뽑아 해마다 2000원씩 부조해주었다.


청년일대

현임 최정식사장 생산현지에서


지금은 김영숙공장장의 손자 최정식이 북흥과자공장의 공장장책임을 떠맡고있다. 연변대학 체육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한테서 계주봉을 이어받은 셈이다.


할머니는 두손으로 창업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다리로 뛰여다녔다면 최정식은 머리로 한다고 할가. 그는 컴퓨터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장사이트를 만들어 공장을 널리 홍보하고있다. 또한 컴퓨터를 통해 주문을 받고 제품판매를 열고있다. 지금 연길시에만 8개 판매점을 두고있으며 제품은 북경, 청도, 상해 등지는 물론 조선, 한국에도 수출되여 환영을 받고있다.


올해 28살인 나젊은 공장장으로서 아직 나이도 어리고 기술면에서나 경험에서도 미약한 점이 없지 않지만 청춘의 열기로 하여 공장은 생기로 차넘치고있다.


북흥과자공장 창립초기 공장장 김영숙은 200원을 꿔서 2명의 일군을 데리고 15평방메터되는 조선족구들에서 제품을 생산했는데 이는 이젠 옛말로 되여버렸다. 20여년의 간고한 창업을 거쳐 현재 공장은 8000평방메터의 부지면적을 갖고있으며 기업자산 1500만원에 90명의 종업원과 두개의 분공장을 갖고있다. 부단한 기술혁신과 비전을 거쳐 지금은 년간 80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당당한 기업으로 부상했다.


이 공장에서는 《성실(誠信)》 두글자를 기업의 명줄로 간주하고 식품의 질과 신용을 높인데서 이미 여러차례나 연길시 《질신용단위》《우수사영기업》, 《문명개체단위》, 연변조선족자치주 《신용기업》, 길림성 《성실기업합법권익중점보호단위》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06년에는 연길 시당위와 시정부로부터 《민족단결선진집단》, 《로동모범집단》으로 표창받았다. 이밖에 성, 주, 시 기술감독국의 《식료품질신용단위》로 명명되였으며 한국세계식료품박람회에서 북흥과자를 선보여 《우수식료품》상까지 타게 되였다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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