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의 한 아이가 서중석(왼쪽 사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에게 원장 취임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오른쪽 사진). 편지엔“힘들고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같이 걱정해주시면서 같이 기뻐해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적혀 있다.
[서중석 국과수원장, 2008년부터 '쉼터' 찾아 아빠 봉사]
야구장에 가고 피자 먹고… 이야기 나누며 '아빠 노릇'
"아이들을 한명한명 만나보면 도화지에 먹물 튀듯 상처… 어루만지고 치유에 관심을"
서울 구로구의 한 좁은 주택가 골목에는 평범한 가정집이 있다. 매일 아침 이 집에서는 소녀 10여명이 책가방을 메고 쏟아져 나온다. 이 명랑한 소녀들의 엄마는 다름 아닌 수녀들이다.
대외적으로 이 집은 '가출 소녀들을 위한 쉼터'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친족 성폭행과 성매매 피해를 당하고 오갈 데가 없어진 여자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가해자인 가족이 찾아올까 봐 시설에는 간판도 달지 않았다. 보안도 철저하다.
그런 집의 문이 수요일마다 열린다. 서중석(56)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국과수 법의학부장으로 있던 2008년 말부터 4년간 수요일이면 무조건 '칼퇴근'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소녀들은 이런 서씨에게 '수요일 아빠'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녀들은 예쁜 색종이에 편지를 쓰고 양초를 만들어 국과수에 보내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르고, 맛있는 것도 주시고, 아프면 걱정해주시고…. 아! 저 운동부 들어갔어요. 다치면 치료해주세용.' '아빠, 그레고리오(세례명) 아저씨! 놀러 오세요. 드릴 말씀이 너무 많아요. 저녁 차려드릴게요.' '우리 아부지, 처음 만난 것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딩인 제가 숙녀로 짠~ 하고 나타났네요.'
서 원장은 "다니던 성당에서 피해자들을 묵묵히 돕는 수녀님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이곳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작년 7월 국과수 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는 일정이 빡빡해 한 달에 한 번씩 찾는다.
서 원장 말고도 이 집에는 대학 여교수, 부동산 중개사, 전직 구청 공무원, 신부 등이 찾아온다. 또 다른 봉사자도 있지만, 누가 어떻게 봉사하는지 서로 간에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서 원장이 하는 일은 소녀들에게 '아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함께 야구장에 가고, 음악 방송을 방청하러 가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겉보기엔 발랄하고 평범한 학생들이지만, 내면에서 편집증·충동장애 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한 여중생이 가출했을 때 수녀와 함께 찾아 헤맸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대학 여교수는 아이들에게 발 마사지를 가르쳐 주고, 독거 노인들을 위해 함께 봉사를 간다. '선생님' 역할이다. 전직 구청 공무원은 아이들이 놀러 갈 때 운전대를 잡고, 집 안에 못질할 일이 생기면 달려오는 '삼촌'이다. 신부는 아이들 고민을 들어주며 시간을 보낸다. 부모가 없어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서로 메워주는 것이다.
서 원장은 지금까지 직·간접으로 시신 1만여구를 부검하면서 특히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어떤 범죄 유형보다도 강간·살해당한 피해자의 시신을 마주할 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며 "봉사를 하게 된 것은 직업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만나고 가해자에 대한 단죄보다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아이들은 마치 하얀 도화지에 먹물이 튄 듯한 상처를 안고 있어요. 이 얼룩은 지우개로 쉽게 쓱쓱 지워지지 않습니다."
서 원장은 2009년부터 봉사 내용을 묻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른 봉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법무부와 여성가족부가 19일 전면 시행하는 성 관련 법률 개정안을 보고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법률과 정책이 가해자 처벌 수위를 높이는 데에만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데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경진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