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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7·1 경제개혁’ 불씨 되살아날까

[온바오] | 발행시간: 2013.07.25일 01:35

▲ 7월 23일 북한의 전승절 60주년 기념행사 방문자들이 평양 우표박물관에서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레닌그라드대 한국사 박사, 김일성종합대·레닌그라드 동양학부 졸업)

간과해선 안될 2002년 ’7·1 경제조치’ 여파

북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 노선을 취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지난 몇 십 년 간 북한 정부는 여러가지 정치·사회적 이유로 스탈린의 소련을 본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북한 당국이 진정한 개혁을 시작할 뻔했던, 놀랍지만 반쯤 잊혀진 사연이 있다. 이야기의 공식 명칭은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이다. 이 ‘조치’는 2002년 시행됐다가 몇 년 뒤 조용히 사라졌다. (2002년 조치 중 일부가 살아남긴 했다.)

’7·1 조치’는 단순히 역사적·학문적 관심사만이 아니다. 경제개혁은 당시 개혁지향적 관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박봉주라는 인물에 의해 주도됐다. 그는 최근 북한 내각총리로 임명됐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북한에서 일련의 개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난 2002년 개혁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선 ’7·1 조치’는 공식적으로 ‘개혁’이라고 불린 적이 전혀 없었다. 북한에서 ‘개혁’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자본주의의 덫으로 끌어들이려는 제국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영악한 술수를 뜻하는 비열한 단어일 뿐이다. 따라서 7·1 조치는 결코 ‘개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민간 시장활동의 합법화

하지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므로 지금부터 이 조치를 ‘개혁’이라고 부르자. 북한 선전선동가들이 당시에 뭐라 불렀건 결국 이 조치는 실질적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은 북한이 심각한 기근에서 회복되기 시작하던 2002년에 시행됐다. 당시 국가경제는 무너졌고, 산업생산은 1990년의 절반 수준이었다. 급속히 발전하는 민간부문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많은 북한 주민들은 원칙적으로는 불법인 개인 상점과 농장을 열었고, 개인 작업장에서 일했다. 공동배급 체제는 기능을 멈췄고, 사람들은 국가 유통구조보다 훨씬 물가가 비싼 민간시장에서 곡물과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구입해야 했다.

2002년 개혁은 시장에서부터 시작됐다. 개혁의 일환으로 많은 종류의 민간 시장활동이 합법화됐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식료품 거래만 가능했던 시장에서 공산품 판매가 허용됐다. 시장활동에 관한 다른 제재도 많이 해제됐다.

외부 관찰자의 눈으로 볼 때 2002년과 2003년은 주요 전환점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2002년 개혁의 의미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수 십 명의 시장운영자, 판매자들과 얘기해본 결과 나는 이들 대부분이 2002년 개혁조치를 중요한 전환점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데 놀랐다. 일부 상인들은 그런 조치가 2002년 전격적으로 합법화됐다는 사실을 깨닫지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따지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2002년 개혁은 여러 측면에서 겉보기만큼 획기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혁조치를 통해 북한정부는 많은 규제를 풀었지만, 상당수는 사실 오래전부터 무시돼온 금지사항들이었다. 통제를 벗어난 경제활동들을 사후에 합법화시킨 것이다.

물가 앙등과 임금 인상

더 중요한 것은 물가와 임금수준의 변화였다. 개혁 이후 정부 운영 사업장의 공식 임금뿐 아니라 식료품과 가정용품들의 공시 가격이 급등했다. 2002년 개혁 전 공동 배급체계(도시에서는 이것이 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방법임)를 통해 들어온 쌀 1kg 가격이 0.08원이었다. 개혁 이후 가격은 종전의 550배인 44원으로 폭등했다.

물가만큼은 아니지만 임금도 엄청나게 올랐다. 개혁기간 동안 평균 월급은 약 90원으로 시장에서 2kg의 쌀을 겨우 구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개혁 이후 평균 임금은 하룻밤 새 2000~2500원으로 뛰었다.

동시에 배급체계는 조용히 사라졌다. 이 때부터 북한 주민들은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시장 가격으로 쌀을 구입해야 했다. 국영 상점들은 자유롭게 생필품을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추가로 얻었고, 그 결과 시장경제에 있는 상점들과 비슷해졌다.

지금껏 드러난 몇몇 증거들로 유추해 보면 개혁 주도층은 정부와 시장 가격을 일치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애초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후 몇 년 간 북한은 쌀 시장가격이 kg킬로그램 당 44원에서 900원으로 오르는 초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시장 작동원리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갖춘 사람이라면 이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한의 최고위 의사결정권자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개혁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곡물과 다른 기본적인 식료품 거래의 중심은 여전히 민간 시장이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소매점은 계속 상거래의 변방에 머물렀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북한 최고지도자가 2002년 개혁을 실패로 인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2005년 정부 지휘의 배급체제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시작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002년 개혁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과거 비용을 지원받았거나 무상으로 제공받았던 많은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기 시작해야 했다. 예를 들어 주민들은 주택 임대료를 내게 됐다. 집은 국가의 자산이기 때문에 임대료는 결국 국가로 귀속된다.

급격한 인플레이션

2002년 개혁은 또한 산업 관리체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 매체에서 이에 관해 심층보도를 한 바 없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매체에 드문드문 나타난 참고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보면, 정부 부문에서 공장관리자에게 상당한 자유가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은 성과를 장려하고 보상하기 위한 높은 급여를 지급받게 됐다. 관리자들은 노동자 고용과 해고 권한이 주어졌다. 생산 계획에 관한 정부 규제도 완화됐다.

그러나 그런 조치들은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됐다. 2003년 말 북한정부는 개혁을 중단키로 결정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 인플레이션이 주요인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관리자는 근로자에게 2~3배의 월급을 줄 수 있었지만, 소매가격이 18개월 동안 20배나 증가하자 그 효력을 잃었다. 따라서 임금인상에 대해 주민들은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개혁은 2003~2005년 사이 슬그머니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박봉주는 역할을 잃었고, 2007년 좌천됐다. 그는 꽤 큰 규모의 화학공장 지배인으로 몇 년 간을 보냈고,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다시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2002년 개혁은 단발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하지만 앞으로 북한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개혁이 재시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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