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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 한글사전 편찬 후원한 이우식

[온바오] | 발행시간: 2013.08.18일 11:32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 이우식 선생 어느 사회나 기득권자는 변화와 개혁에 찬성하지 않는다. 변화나 개혁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재산에 손실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역사에서 살펴보면 모든 기득권자가 수구적이지는 않았다. 홍성 출신의 김좌진은 자신의 집에 있던 머슴들을 해방시키며 땅까지 지급하였다. 여운형도 그리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전선에 나섰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우식(李祐植, 1891∼1966. 호는 남저(南樗))의 경우도 만석지기의 지주여서 기득권자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구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거나 늘리는데 치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인하하여 주었고, 고향의 인재 양성에 돈을 지불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독립자금을 지출하였으며, 민족어대사전 편찬 사업에도 거금을 희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자신이 가진 경제력과 쌓아온 명예로 얼마든지 국회의원 등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조국이 통일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결코 고위 관료에 나아가지 않았다. 일생동안 그는 기득권자였으나, 기득권에 매몰하지 않고 기득권층의 의무를 실천하였다. 민족 구성원에게 좋은 영향만을 끼치고 생을 마무리하였다. 그의 발자취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지원

이우식은 1891년 7월 22일 경남 의령 출신으로 만석지기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 내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일본 정칙(正則)중학을 이인과 함께 다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의령읍 장날을 기하여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의령의 3·1운동을 주도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뒤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학년에 중퇴한 뒤, 1920년 귀국하여 부산에서 독립운동가 안희제·김효석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거금 100만원을 출자하였다고 한다. 백산회사를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이우식은 고향 출신인 이극로에게 상해 동제대학과 베를린대학 학비와 생활비, 활동비 명목으로 총 8,890원을 지원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극로는 학업을 지속하면서, 중국과 베를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이극로가 귀국한 뒤 조선의 각 지방을 시찰할 때에도 그 경비를 이우식이 부담하여 주었다.

1926년에는 <시대일보>를 경영하였고, 재정난으로 휴간중인 <중외일보>에 1927년에 그와 안희제가 출자하여 이를 경영하였다. 이우식은 고향 의령에서도 선한 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첫째, 재물을 억지로 불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둘째, 아랫사람이나 불행을 당한 사람은 후한 대접을 하라. 셋째, 나 자신과 가족에겐 엄격하라.’를 제시하였다(친손녀 이영숙의 글)고 한다. 왼쪽의 자료는 이우식이 소작인의 참상을 참작하여, 소작료를 인하하여 주었다는 기사이다.

<중외일보>의 1929년 7월 15일자에도 의령의 이우식이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 집중 호우로 이재민이 발생하였는데, 쌀과 보리를 출연하여 이재민에게 분배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처럼 농민 구휼에 앞장섰기에, 은혜를 입은 농민들이 송덕비를 12곳에나 세워주었다고 한다.

<조선어대사전> 편찬의 자금 후원

이극로는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면서, 이우식을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이후 이우식은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맞서 이극로와 함께 우리말을 영구히 유지하고 보전하는 언어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조직을 개편하면서 이극로는 이우식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우식은 이후 사전편찬을 위한 재정 지원을 맡게 되었다.

이우식은 조선어학회에 사전편찬 자금으로 1936년에서 1942년 9월까지 16,140원과 기관지 <한글> 발행 자금으로 1,050원을 제공하였다. 조선어학회에 가장 많은 후원을 한 장본인이었다. ▲ 조선어학회가 만든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 신청서

이처럼 이우식은 이극로가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할 때마다 묵묵히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참고로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달 임금이 21원이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우식의 지원은 대단하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조선의 학자들을 위한 후원기관인 양사원의 설립에도 앞장섰다. 이 사업 구상은 이극로가 하였다. 이극로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양사원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에 이우식이 1천석이나 되는 전재산을 내놓겠다고 이극로,

이희승, 이인이 있는 장소에서 각서를 썼다.

이우식이 항일 변호사인 이인의 손에 각서를 쥐어주면서 “모든 것을 애산(이인의 호)에게 일임하니 조속한 시일 안에 양사관을 설립해주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중지되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위한 후원과 양사원 지원 행위로 인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도 1942년 10월 18일에 고향 의령에서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홍원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옥중시를 남겼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홍원에서

나라도 패망하고 임금도 없어진지 30년(國破君亡三十年)

낯설은 북관 벽지에서 목숨 부지하게 될 줄이야.(不圖生梗北關邊)

밥 먹으면 오로지 노련한 이익 추구에 급급하며 살다가(飯僕老練謀利急)

간수 놈의 사납고 포악한 호령 소리에 시달리는 신세(守奴狂暴怒號連)

젊은 간수 놈의 안하무인 이 무슨 봉변이런가?(不齒不面是何事)

웃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하니, 아무 것도 맘대로 못하네.(勿笑勿言非自然)

지옥 같은 이 고통을 그 누가 알리오?(幽中艱苦誰能識)

우리 29명 일찍이 정해진 숙명이런가?(二九人曾有宿緣)

1945년 1월 16일 니시다 판사의 1심 판결로 그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석방되었다. 형기를 모두 마치고 출옥하였다.

해방정국기 민족통일운동 참여

민족의 해방은 연합국의 대일전 승리와 우리민족의 대일 항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과 동시에 우리나라는 미소의 분할점령 상태로 들어갔다. 미소의 분할점령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난립되어 있는 우리의 정당 통일 및 행동통일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연합국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이후 좌우의 분열과 대립이 극심하였다.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함은 시대적 과제였다.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이우식은 1946년 1월 31일에 이극로, 정열모, 배성룡, 이경석, 김호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였고,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통일정권촉성회는 좌우정당의 즉시합작을 바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각 정당의 정객 및 정치단체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더 이상 통일을 지연하는 것은 민족의 멸망을 자초하기에, 동시에 통일만이 민중이 염원하는 유일의 목표이기에, 좌우 정당이 합작하여 통일노선으로 일로매진하자고 호소하였다.

▲ 「이 이상 통일 遷延하면 민족 멸망을 초래. 통일정권 촉성에 유지들 궐기」(<자유신문>, 1946, 2, 1.)


한편 해방 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풀려난 출옥 동지들이 만든 모임인 십일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희망과 달리 1948년 두 개의 분단 정권이 수립되었다. 경남의 의령 군민들이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통일되지 않은 조국에서는 결단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사양하였다. 이후 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66년 7월 5일 그는 민족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 이우식 선생의 묘소와 묘비.(맨 왼쪽이 장남 이인옥. 손자 이영모 님 사진제공)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은 뒷날 “그는 특히 민족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과묵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람으로 남에게는 숨어서 학자금을 대주되 자기 자신은 항상 근검절약하며 평생 이름 내놓기를 원치 않았다”(이인, <반세기의 증언>, 122쪽.)라고 이우식을 회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이처럼 이우식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다.(한글학회 연구위원, 문학박사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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