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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4)—다시 광주에 모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3일 10:19
8.1 남창봉기가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에서는 무한에서 비밀리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위기를 해결할 대책을 연구하였다. 구추백(瞿秋白), 리유한(李维汉), 모택동을 비롯한 부분적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우경기회주의(右倾机会主义) 착오를 엄숙히 비판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 문제를 토의하였다. 모택동은 대회에서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남창봉기에 이어 추수봉기를 일으킬것을 제의하였다.


8월 7일 소집된 이 대회를 《〈8.7〉회의》라고 한다. 회의가 있은후 모택동은 호남, 호북, 강서, 광동의 광범한 농민을 이끌고 추수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단연 호남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남창봉기후 9월에 추수봉기가 일어났으며 모택동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호남과 강서가 린접한 라소산맥(罗霄山脉)에서 정강산(井冈山)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농촌무장혁명투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권립 교수)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대숙청을 시작하였고 18일에는 광주와 황포에서도 대숙청이 시작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주는 암흑세력이 살판치는 세계로, 대도살장으로 되였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국민당우파에게 반격을 가하고 전국인민에게 힘을 주기 위해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1927년 11월 26일 광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남창봉기이후 대혁명시기 혁명중심지였던 광주에는 수많은 혁명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중국 대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조선지사들도 광주에 모여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방대한 로동자 조직이 있었고 부근 해풍(海豊)과 륙풍(陆豊)에는 농민들이 잘 조직되여 있었다. 비록 국민당의 탄압을 받아 공회조직과 각지 농민조직이 많이 파괴되고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이들은 당의 령도하에 다시 비밀리에 집결되고 갖은 방법으로 무기를 장만하였다. 뿐만아니라 남창봉기 실패후 부분적인 혁명자들이 광주에 잠입해있었고 또 국민당 정규부대를 따라 광주에 와서 수시로 폭동을 준비하고있는 장병들도 적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국민정부가 북상한후 광주는 국민당 여러 군벌들이 집결해 서로 견제하는 국면이 나타나 수시로 군벌혼전이 일어날수 있었기때문에 봉기를 일으킬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여 있었다.


(권립 교수)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장태뢰를 총지휘로, 엽정을 군사지휘로 임명하고 봉기를 준비하였습니다. 12월 11일 새벽 3만여명 혁명군인과 로동자, 농민들이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에는 300여명 우리 민족 혁명가들이 총을 잡고 전투에 참가했고 그중 200여명은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광주봉기 주요 지도자 장태뢰.


1927년 12월 11일 광동군벌주력이 광서군벌을 소멸하기 위해 광주를 떠난 틈을 타서 장태뢰(张太雷), 엽정, 운대영, 엽검영(叶剑英), 양은(杨殷), 주문옹(周文雍), 섭영진(聂荣臻) 등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자들은 주로 제4군 군관교도퇀(军官教导团)과 황포군관학교에 집중되여있었다. 남창봉기 부대를 추격하여 광동에 도착한 국민당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은 광서군벌을 축출하고 광주를 통제하였다. 이에 불복한 리제심(李济深)은 광서군벌을 끌어모아 광주부근에서 장발규부대와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북벌전쟁시기 주력부대로 활약하였던 장발규부대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있었고 또 공산당의 영향력이 자못 컸다. 줄곧 부대내 공산당원들을 견제하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했던 장발규는 리제심부대와 싸우기 위해 다시 무기를 공산당부대에 내주었다. 그리하여 엽검영(叶剑英)이 거느린 제4군교도퇀은 다시 무장을 갖추게 되였다.

교도퇀 제2영 5련은 150여명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순 조선인부대였다. 이들 대부분은 원 무한군사정치학교의 특별반 학생들로서 련장은 박영(朴英)이였고 당 책임자는 김규광이였다. 그리고 무한 토지당(土地堂)전투에 참가하였던 박영의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 형제, 의렬단 단원 박건웅(朴健雄)을 비롯한 우수한 포사격수들도 이 부대에 포함되였다.

조선혁명가 김규광, 본명 운암 김성숙.

광주봉기에 참가한 박근만(박영의 동생)

광주봉기에 참가한 박근수(박영의 동생)


교도퇀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은 조선혁명가 최용건(崔鏞健)이다.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은 최용건의 주변에 단합되여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 교수) 《최용건동지가 거느린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이 바로 조선족부대입니다. 150여명이였습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판공실 부관으로 있던 조선족혁명가 리계동(李启东)과 구대장으로 있던 리빈(李彬)도 큰 힘을 보태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봉기에 참가한 광주경위탄에도 당에서 파견한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김형평과 손문적 등입니다.》


황포군관학교뿐만 아니라 중산대학에서 혁명리론을 학습하고있던 수십명 조선인 혁명가들도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장지강, 김세영, 류우상을 비롯한 조선인혁명가들은 여러차례 비밀회의를 열고 봉기준비를 진행하였고 혁명가 김산도 이들 조직사업과 선전사업을 맡았다. 이들은 선전대의 신분으로 혁명에 참가하였고 봉기에서 무기운반과 부상자운반을 적극 도왔다.

혁명자들은 혁명을 배반하고 혁명자들을 마구 살해하는 국민당반동파들에 대한 지대한 배신감과 적대감을 안고 전투에 뛰여들었다. 조선인 혁명자들도 꼭 같은 심정이였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전쟁에서 조선혁명가들은 두려움 모르고 싸웠고 뛰여난 통솔력으로 유명하였다. 국민혁명군 장군들은 모두가 조선인을 자기 부대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혁명군에서 조선인혁명가들은 두려움 없이 싸워 전과가 컸던것이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그들의 가슴은 더욱 벅차있었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조선인 혁명가들의 가슴은 미칠듯이 기뻤고 무한한 환희와 열광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꿈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승리의 문턱에서 산산이 깨여지고말았다. 게다가 도처에서 살벌한 도살이 시작되였다. 많은 조선인 혁명자들도 살해되고 체포되였던것이다.

혁명을 배반한 적을 소멸하고 로농대중이 모두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희생을 내더라도 싸워야 했다. 오직 혁명의 붉은 피를 흘려야만이 암흑을 몰아내고 야수적인 반동파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함으로써 아시아의 해방을 이룩할수 있었다.

1927년 12월 10일 밤, 광주시의 조그마한 려관방에서 20여명 조선인들이 비밀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이제 곧 시작될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생각하면서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유명한 의렬단 단원인 오성륜이 새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에게 총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조국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들은 이번 대중투쟁을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과 련계시켜 생각했던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오성륜과 김산, 그리고 로씨야에서 온 포술전문가 양달부는 봉기의 첫 본부로 사용하게 될 교도퇀사령부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사령부에 도착하였을 때 2000여명 교도퇀 사관생들이 모여있었고 얼마 안되여 봉기지휘자들인 장태뢰와 엽정, 운대영 등이 도착하였다. 엽정은 남창봉기가 실패한후 한동안 향항에 피신하였다가 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에 왔던것이다.

광주봉기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조선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

근 100명에 달하는 조선인들도 한데 모여 반갑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면서 봉기시각을 기다렸다.

봉기시각이 다가오자 장태뢰와 엽정이 선후로 연설을 하고 혁명위원회 명단과 각 부대 지휘자를 공포하였고 각 부대에 임무를 하달하였다.


(권립 교수): 《봉기지휘부에서는 조선족혁명가들을 중히 여기고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의 우수한 포병전문가 양달부를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하고 중산대학교 법과를 다닌 김산을 엽정의 비서 겸 교도퇀의 통역관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리용은 엽용의 군사고문으로 임명되고 광주공안국을 공격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봉기 모든 활동부문에서 조선인은 요직에 있었다. 양달부는 봉기 총지휘자인 엽정의 군사참모로 있었다. 그는 봉기 5인 군사책임자중의 한사람이였다. 김산은 엽정의 비서 겸 교도퇀의 통역관으로 임명되고 리용(李鏞)은 신임 교도퇀 단장 엽용(叶鏞)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리빈(李彬)은 포병지휘관으로 임명되여 북로경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교도퇀 제2영 5련 련장으로 박영, 5련의 당조직 책임자 김규광,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 련장으로 최용건이 있었다. 오성륜, 박진(朴振), 박건웅은 소분대 대장으로서 각기 임무를 맡고 행동하게 되였다.


조선인 혁명가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모스크바에서 훌륭한 정치, 군사훈련을 받았기때문에 중국공산당과 봉기지휘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던것이다.

봉기지휘부는 교도퇀을 홍군으로 개칭하고 망치와 낫이 새겨진 붉은기를 게양하게 하였다. 봉기에 참가할 부대는 교도퇀 정규부대와 로동자, 농민 적위대(赤卫队)였다. 그러나 적은 봉기군보다 훨씬 더 많은 정규부대를 가지고있었다. 광주시 백운산(白云山)기슭의 사하진(沙河鎭)과 연당(燕塘)에 적 정규군이 주둔하고있었고 관음산(观音山) 요지에도 적이 주둔하고있었다. 그리고 주강이남에는 군벌 리복림(李福林)이 거느린 막강한 주력부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승리에로 이끌자면 목표 명확하게 적의 본거지를 불의에 습격하여야 했다. 그리고 선전공작을 잘해 더욱 많은 적병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더욱 많은 로동자, 농민들을 봉기군에 참가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밤은 더욱 깊어만 갔고 정적이 깃들었다.

홍군부대 장병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후 교도퇀 사령부로 수많은 트럭과 자동차가 달려왔다. 차에는 많은 공장 로동자들이 타고있었다. 로동자들은 사령부에서 무기를 받아가지고 홍군부대와 합세하였다.

11일 새벽 3시가 다가오자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공격명령을 내렸다.

봉기군은 몇갈래로 나뉘여 각자의 목표를 향해 신속히 진격하였다.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였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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