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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령기슭에 타오른 항일봉화(상)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14일 11:57
-증조할아버지 신초시와 할아버지 신룡운의 항일족적을 찾아



왕청현 라자구진 태평령에 세운 쏘련홍군태평령전투기념비

올해는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0돐이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나날을 맞으면서 그제날 아버님(신범준)과 마을 웃어른들이 들려주던 할아버지세대의 항일 관련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는것도 자못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상기 이야기들을 근거로 라자구일대의 항일전적지들을 답사하고 라자구와 관련된 력사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이 글을 정리하였다.

-신명수

신초시일가의 래력

나는 증조할아버지 신초시의 이름을 성인이 되여서도 줄곧 알지 못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19세기말 함경도 온성군에 살았는데 19세때 초시에 합격되여 지방 고을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래서 그후에도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말만 나오면 동네분들이나 친척들은 줄곧 《신초시, 신초시》하고 불렀기에 나는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이 그냥 신초시(후에 자료를 통하여 이름이 신영호라는것을 밝혀냈다)인줄로만 알았다.

당시는 1895년, 이해 8월 20일, 일제는 조선의 국정을 간섭하면서 국모 민비를 시해하였고 11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나라적으로 양력을 쓰게 되였다. 조선반도에서는 민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치렬한 항쟁을 벌였다. 의병항쟁이 계속되자 도처에서 유생들을 잡아들이면서 온 나라가 점차 식민지화하는 시기라 세상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이 시기에 증조할아버지 신초시도 벼슬을 버리고 의병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는 불량선민으로 락점되여 일본인과 관군의 감시를 받았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가며 5촌숙이 되는 종친분을 따라 자그마한 인쇄소에 다녔다. 이 인쇄소는 반일운동단체가 경영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신초시는 5촌숙과 함께 몰래 거기서 삐라를 가져다 살포하면서 반일활동을 하였다.

이때 신초시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신룡운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거주지는 함경도 온성군 신초시네 집이였다. 그들 부부는 1908년에 첫째아들 신춘남(후에 신룡운으로 개명)을 낳았는데 신춘남은 신씨가문의 11대 후손이였다. 1910년 신초시는 둘째아이를 갖게 되였다.

월강하여 대한광복군의 근거지-라자구에 오다

바로 이 시기인 1910년경, 신초시는 조선에서 더는 배길수 없어 두만강을 월강하여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老黑山)을 거쳐 라자구 사도하자(罗子沟上房子)에 왔다. 당시 라자구는 대한광복군이 장악하고있었다.

태평령에서 라자구까지는 40리 내리막길이다. 태평령에서 내려오면서 첫 부락이 서삼도하자(서하라함)이고 조금 내려와서 왼쪽에 멀리 보이는 부락이 삼도하자이고 삼도하자에서 서쪽으로 7-8리쯤 되는 곳이 사도하자(당시 삼팡자라고도 하였음)이다.

당시 라자구지역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운동을 줄기차게 펼치면서 성세를 이루던 독립운동기지였다. 신초시는 가족들을 데리고 사도하자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자에게 가족이력서를 접수시켰다. 여기서 신초시는 가족의 두 자매와 함께 나란히 광복군정부 통신련락원에 지원하고 한인촌에 돌아왔다.

얼마후 신초시는 대한광복군정부의 역사에 근무하였다. 그들은 사도하자에 늦게 찾아온 탓에 남은 집이 없어 아래마을 삼도하자(三道河子)에 집을 잡고 매일 사도하자 대한광복군정부에 출근하여야 하였다.

라자구는 왕청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00리쯤 상거한, 연변에서 가장 큰 라자구벌에 자리잡고있다. 고개 넘어 고개, 산 너머 또 산, 이렇게 산이 첩첩, 골이 첩첩, 산허리를 돌고돌아 산기슭을 내리면 여길 에돌아 또 큰 고개가 나타난다. 이렇게 160리쯤 가야 태평령에 이른다.

이곳 태평령은 1945년 8월 쏘련홍군이 일본침략군과 싸우던 곳이기도 하다. 후날 쏘련홍군 전사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쏘련홍군 기념탑을 세웠다.



쏘련홍군태평령전투기념비 비문

태평령에서 호랑이와 조우하다

당시 태평령에는 대낮에도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여 호랑이가 목탄차에 뛰여올랐다 내렸다 하였으며 한다 하는 장정들도 한낮이 되여야 여라문씩 무리 지어 넘던 고개이다.

그날도 증조할머니인 김해김씨는 신초시의 부탁을 받고 만삭이 된 몸으로 다른 한 녀인과 함께 발구에 말을 메워가지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통신임무를 수행하러 나섰다.

독립운동에 자발적으로 투신한 한인촌 사람들은 거의 다 그렇게 각자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날 저녁무렵 출산을 앞둔 증조할머니는 이번에도 통신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고 넓은 벌판을 가로 질러가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지며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때 발구를 끄는 말이 이상한 기척을 내여 주변을 휘둘러보니 바로 길옆 저 멀리 마른 고목아래 고인돌우에 큰 호랑이 한마리가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때는 이미 지친 말이 호환을 만나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부들부들 떨면서 움직일념을 하지 않고있었으며 양수는 점점 더 흘러 진통은 더 심해갔다. 이때라는듯 피비린내를 맡은 호랑이가 슬금슬금 다가오고있었다. 급한 김에 힘껏 말을 재촉하여 계곡입구에 들어섰지만 호랑이는 슬금슬금 계속 뒤따라 오고있었다.

증조할머니와 동행한 녀인은 이러다가는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겠다고 말하면서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은 바짝 차리라 했다》고 고무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들은 진대나무숲까지 와서 마차를 멈추어 세웠다. 그들은 마른 풀과 마른 나무가지를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거기에 어린아이 주먹만한 작은 돌 세개를 구웠다.

불길이 피여오르자 주춤하고 멈춰섰던 호랑이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조금 멀리서 그들의 주위를 맴돌아쳤다. 그들은 한손에 비수를 뽑아들고 다른 한손에는 불방망이를 들고 호랑이 공격을 막았다. 이미 바람에 의해 연기와 뜨거운 화기가 가는 쪽으로 몸을 피하다보니 머리카락과 두 누섭은 뜨거운 화기에 그을었고 얼굴에는 화상을 입었다.

마침 그들에게는 동네를 지나오면서 산 돼지고기 서너근이 있었다. 그들은 그 돼지고기를 3등분하여 검붉게 단 돌 하나씩 보쌈싸듯 싸서 호랑이에게 던졌다. 이렇게 세번째 돌까지 던져주면서 《이걸 처먹고 화독이 퍼져 확 뒤져라》고 쌍욕을 퍼부었다.

굶주린 호랑이는 불에 달군 돌덩이를 싼 고기덩이 세개를 순식간에 넙죽넙죽 받아 삼키였다. 그것도 잠간 호랑이는 인츰 배속에서 뜨거운 화독을 느끼게 되자 너무 뜨거워 고통을 호소하며 앞발에 턱을 마구 비벼대며 뱉으려 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기회에 증조할머니는 동행한 녀인과 함께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말을 몰아 네발아 날 살려라 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집에 도착한 증조할머니는 그 걸음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런 란리통에도 순산하였지만 증조할머니는 기진맥진하여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는 신초시한테 그저 들개 한마리를 잡았노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이튿날 아침, 신초시는 안해와 동행한 녀인이 알려준 그 계곡 입구로 마을사람 몇몇을 이끌고 가 그 호랑이를 수레에 실어왔다. 화독을 입은 호랑이는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엎드려 앞발로 땅을 석자 되게 깊이 파놓고서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얼굴을 붙인채 두눈을 부릅뜨고 죽어있었다고 한다. 태평구에서는 오늘날까지 증조할머니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

력사에 길이 남을 라자구사관학교



리동휘(자료사진)

1913년경 할아버지 신룡운(신춘남)은 부모님 신초시일행과 함께 광복군부대를 따라 라자구 삼도하자에 이동하면서 라자구지역에 터을 잡게 되였다. 할아버지 신룡운은 여기서 태평소학교(일명 삼도하자)에 다니면서 아동단에 입대하여 혁명에 어섯눈을 뜨게 되였다.

1914년 4월, 조선혁명가 리동휘, 김립 등은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그 중요한 일환으로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인재양성에 취지를 두고 이곳에서 반일운동을 하고있던 리용익 등 반일지사들의 도움으로 라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해 가을 연길 소영자 길동학당의 교원과 학생들이 라자구 삼도하자에 오면서 동년 12월에 정식으로 라자구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얼마후 태홍서숙의 학생들이 편입되고 또 연변 각지와 조선 국내 및 로씨야의 연해주에서 온 학생들이 편입되면서 학생수는 급기야 300여명으로 급증하였다. 학교 교장은 리동휘, 교원에 김립, 장기영, 오영선 등 쟁쟁한 반일지사들이 담당하였다.

학교운영경비는 주로 구한말 군부대신을 지낸 리용익(탁지부 대신)과 로씨야주재 공사를 지낸 리권익 등이 내놓은 수만원에 달하는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학교는 여느 사립학교와는 달리 군사지식학습과 군사훈련, 반일민족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관들도 대부분이 구한말기 군직에 있던 사람들이였다. 리동휘는 구한말 륙군장령, 김하정은 구한말 륙군사관학교 졸업생, 고경재는 전략전술저작을 연구하는 연구원이였다. 학교에서는 일반 륙군보병지식외에도 《손자병법》 등 군사리론과 제석훈련, 총검술, 권투 등 전술훈련도 진행하였다.

사관학교에서는 태평소학교의 신용운 등 학생들로 소년단을 설립하였는바 이들은 공부를 하는 동시에 군사훈련도 하고 망도 보고 편지도 나르는 등 나름대로 역할을 발휘하였다. 한번은 소년단에서 일본군이 주구를 앞세워 라자구일대의 정보를 수집하고 지형을 탐지하는것을 발견하고 김광은 등 지휘원들에게 제때에 보고하였다. 이에 그 일본군 정찰병과 주구들을 당장에서 체포하여 심문한후 죽여버렸다.

반일기치가 선명한 라자구사관학교는 얼마후 일제의 눈에 든 가시가 되였다. 일본정부는 중국정부를 협박하여 해산령을 내렸다. 문을 닫게 된 라자구사관학교는 오영선의 령솔하에 훈춘현 대황구로 옮겨가 북일학교를 설립, 리동휘를 명예교장으로, 량하구를 교장으로, 오영선를 교장대리로 추대하고서 그 맥을 이어갔다.

1916년 11월, 증조할아버 신초시는 허약한 몸을 겨우 지탱하며 대한광복군정부의 통신임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오던중 태평령에서 토비들한테 붙잡혀 무참하게 살해되였다.

1920년 일제는 발광적인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의 정예부대는 라자구에 침입하자 삼도하자마을과 륙군사관학교 및 태흥중소학교를 비롯한 주변의 마을과 건물들에 불을 지르고 강탈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인 870명이 학살되면서 이 고장은 페허로 되였다.

글/사진 신명수 제공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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