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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나라 皇室의 起源傳說에 나타난 地名考/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3:06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두만강

두만강류역은 청나라 황실의 조상의 발상지로서《청밀사(清秘史)》에는 청나라 황실의 조상에 래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이 있다.



佛库伦者,长白山下一夷女也。……一日佛库伦与其长姊恩库伦、次姊正古伦,二(三?)人同浴于布库里山麓布尔湖里池,忽有鹊衔朱果,置库伦衣。佛取吞之,遽入腹,遂有孕。寻产一男,名布库里雍顺,而爱新觉罗为之姓。…… 既长,其母凌空而去,而别以小舫置儿其中,俾浮达彼岸。登陆折柳枝及蒿为坐具,端坐其上。适其地有三姓争为雄长,一人因取水至岸边,见之大奇。诘其所有来。小儿遂妄言:”我天女所生,将以定尔乱。” 众益惊异, 遂交手为舁, 引为酋长,并以女百里妻之。于是雍顺居长白山东俄漠惠之野俄朵里城,袭女真之旧称,号曰满洲。盖滿洲者, 卽肅愼地也……

이상의 원문을 조선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부쿠룬은 장백산 밑에 사는 한 夷族의 녀자였다. …… 하루는 부쿠룬이 큰 언니 언쿠룬과 작은 언니 정쿠룬 둘(셋?)과 부쿠리산 기슭에 있는 부얼호리라는 못에서 함께 미역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까치가 날아가다가 빨간 열매를 물고 부쿠룬의 옷우에 떨어뜨렸다. 부쿠룬은 그 열매를 주어서 얼른 입에 넣었더니 삽시에 배속으로 내려가서 그로 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그 후 사내애를 낳았는데 이름을 부쿠리융순이라고 지었으며 애신죠로를 성으로 하였다. …… 부쿠리융순이 좀 크자 그 어미는 하늘로 날아올라가면서 작은 배를 만들어 아이를 배안에 태워서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게 하였는데 그 아이는 한 대안에 이르게 되였다. 그 아이는 뭍에 올라 버드나무가지와 쑥대를 앉을 방석을 만들고는 단정하게 그 방석우에 앉아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 고장에는 세 가지 성을 가진 부락이 서로 우두머리로 되려고 다투고있었다. 한 사람이 물 길러 강가에 나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아주 기이하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래력을 물으니 그 아이는 “난 천녀가 낳았는데 너희들의 란을 평정하려고 왔다.”라고 큰 소리를 쳤더니 무 사람들이 더욱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손과 손을 맞잡아 그 아이를 태워서는 추장으로 추대하였으며 백리라는 여자를 안해로 맞아들이게 했다. 그리하여 융순은 장백산 동쪽에 있는 어머후이라는 들판의 오도리성에서 살면서 그 호를 만주라고 하였다. 아마 만주는 숙신의 땅이였을것이다.……

만주족은 肅愼, 挹婁, 勿吉, 靺鞨, 女眞 등 중국 고대 동북지역의 민족들과 깊은 연원관계가 있기에 그 뿌리는 깊지만 만주족이라는 이름하에서 형성된 민족공동체는 그 력사가 아주 짧다. 주지하다시피 만주족의 핵심은 건주녀진이다. 元末明初에는 建州女眞은 처음에는 두만강류역에서 살다가 후에는 압록강류역에로 이동하여 갔었다. 민족공동체로서의 만주족이 청소한 것처럼 만주족의 핵심인 건주녀진 조상의 전설 역시 아주 청소한 전설로서 그 전설속에 나타나는 그 지명들도 모두 실존했던 지명들로서 완전히 文獻을 통해 고증할 수 있다.



우에서 인용한 전설에 의하면 후금, 청나라 황실의 조상은 장백산 동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가에서 기원되였다고 한다.



그러면 장백산 동북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은 실재한 것인가? 실재한 것이라면 이 고장은 구경이 어디에 있는가?



이 전설속에서 天女들이 미역을 감았다는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은 백두산 천지에서 동쪽으로 약 60리 정도 상거(相距)한 홍토산(紅土山)밑에 있었는데 晩淸시기까지만 해도 吉林省 安圖縣 境內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1908년 안도현 知縣이였던 劉建封이라는 사람이 이 못의 서남쪽 기슭에 “天女浴躬處”라는 비석을 세운 적 있다고 한다. 이 못은 남쪽에 있는 산을 부쿠리산(布庫里山)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산은 1960년대 초반 중조 국 이에 있었던 두만강 류역의 국경을 확정하는 담판이 있은 후에 紅土山은 산은 조선의 판도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紅土山을 赤峰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이 紅土山 또는 赤峰 아래에 중조 량국의 21-2호 국계비가 세워져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 부러후리(布勒瑚里)라는 못을 “長白山圓池”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은 조선에서 비록 紅土山을 赤峰이라고 좀 달리 부르고는 있지만 모두 붉다는 뜻은 담고 있으며 “붉다”는 뜻이 만주족들이 부르던 부쿠리산(布庫里山)이라는 이 山名 속에도 담겨져 있는 것이다.



바로 “長白山圓池”를 비롯한 백두산 기슭의 못과 지하수들이 다시 땅우로 솟아나와 두만강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아 상기 전설에서 천녀가 낳은 부쿠리융순이 작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내려온 강은 분명히 두만강이다. 부쿠리융순이 대안에 닿아서 뭍에 내렸다고 하는데 그 고장은 전설에서는 “장백산 동쪽에 있는 어머후이라는 들판의 오도리성”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 부쿠리융순이 닿았고 또 거기에서 살았다는 “장백산 동쪽에 있는 어머후이라는 들판의 오도리성”은 어느 곳일까?

“어머후이라는 들판에 있는 오도리성”은 백두산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분명히 지금의 조선경내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 “어머후이라는 들판에 있는 오도리성”은 어느 고장일까?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에 있는 오도리(鄂多里, 성곽이나 부락의 이름)부락은 바로 지금의 회령을 중심으로 하고 웅거하고 있었던 동맹가테무르가 추장을 하였던 오도리부락을 가리킨다. 어머후이(鄂漠輝)는 만족어로서 조선왕조 초기에는 오음회(吾音會, 지명임)라고 기록하였다.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와 오음회(吾音會, 지명임) 는 중국과 조선에서의 동일한 만족 지명에 대한 부동한 음역이다. 15세기 중반이후에 세종대왕이 두만강변에 륙진을 설치하고 나서는 오음회(吾音會)를 회령(會寧)이라고 고쳤는데, 오음회(吾音會)라는 이 지방이 안녕해지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조선의 회령(會寧)이라는 지명에도 “어머후이(鄂漠輝)”라는 만주어 地名의 꼬리가 남아있는 셈이다. 會와 輝는 아주 비슷한 음이다.



그리고 두만강 류역의 세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올량합(兀良哈, 오랑캐), 올적합(兀狄哈, 우디거), 알타리(斡朶里, 혹은 오도리) 이 세 녀진족 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언이폐지하면 “만족시조신화”의 발생 현장은 바로 두만강의 상류, 중류지역이다.



우에서 이미 지적했다시피 만주족은 핵심은 건주녀진이며 건주녀진의 핵심은 오도리부락이였다. 오도리부락은 두만강 류역에서 오래동안 살아왔으며 오도부락의 추장이였던 휘호(揮護)와 건주좌위의 지휘였던 휘호의 아들 멍거터물(猛哥帖木儿, ?--1433)은 청나라의 건국주인 누르하치(努尔哈赤, 1559--1626)의 七世祖와 六世祖로서 두 사람 훈춘 두만강가의 斐優城에서 태여났으며 멍거터물은 1433년 녀진인들의 내분에서 양목우디거 부락의 군사들에 의해 참살당해 조선 회회령군 豊山面에 묻혔다. 청나라가 건립된 후 멍거터물은 청나라 황실의 시조(肇祖)로 추존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청밀사(清秘史)》에 기록되여 있는 상기 淸나라 皇室의 조상에 래력에 대한 전설은 사실은 청나라 황실의 조상들이 두만강 류역에서 살 때의 기억이 세세대대로 傳承되여 祖上傳說로 정착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중에서도 주로는 오도리부락과 그 추장인 멍거터물에 대한 신격화로 이루어진 전설이라고 사료된다.



만주족 내지는 청나라의 발족과 그 장성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부지중 영국의 력사학자 토인비가 그 유명한 《력사연구》에서 내놓은 “挑戰과 應戰”의 원리를 련상하게 되었다.



한 때는 명나라와 조선왕조라는 두 문화의 변두리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그렇게 천시를 당하고 리용당하고 살육당하고 추방당했던 건주 녀진이 나중에는 전 동북지역의 녀진부락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토인비가 내놓은 “도전과 응전”의 원리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두만강 여진인들은 력사가 걸어오는 도전에 직면하여 좌절도 하고 실패도 당했지만 지혜롭고 용감하게 응전하여 끝끝내 휘황찬란한 왕업을 이룩해냈던 것이다.



지금 두만강 류역이라는 이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연변조선족들도 지난날 건주녀진의 삶의 지혜와 용기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2007년 6월 14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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