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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8.28일 15:38
글 주청룡

19세기 중엽부터 광복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선반도로부터 만주땅에 건너와 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만주의 벼농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였으며 그 기술은 전 만주에 보급되였다.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우리 조선족은 공산당을 따라 참군, 참전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민당 반동정권을 뒤엎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으며 중국땅에 뿌리를 깊이 박고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되였다.

  1.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의 뜻인즉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면서라도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킨다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후대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한 꿈이였으며 우리들에 대한 기대였다. 이렇게 하였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괭이 메고 두망강, 압록강을 건너와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은 그 후대들이 국가 공무원이나 문화, 교육, 과학, 위생 등 지식분야에서 크나 큰 활약을 하고있다.

  통계자료를 보면 15세 이상의 인구문맹률을 볼 때 전국 평균수준은 22.21%인데 조선족은 7%밖에 안된다. 그리고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의하면 대학수준 소유자가 전국 평균수준은 매 만명당 122명인데 조선족은 381명에 달하고 석사, 박사는 전국 평균수준이 매 만명당 8명인데 조선족은 17명이다. 교육에서 이렇게 전국의 평균수준을 훨씬 초월할 뿐만아니라 방송, 출판, 예술, 체육 등 방면에서도 전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 하여 1993년 10월 20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아침 뉴스에서도 조선족은 우생우육(优生优育)에서 돌출한 성과를 취득하였으며 문화교육이 세계선진수준에 접근하였다고 방송하였다.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

  그전에 농촌에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토지를 집체경영을 하여 큰 가마밥으로 살아가면서 먹을 고생, 입을 고생을 하던데로부터 개혁개방후 마을마다 호도거리를 하여 자신들에게 차려진 토지를 알뜰히 가꾸면서 온당한 경제적 수입으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였으며 조선족 농촌마을마다 다분한 조선족색채로 화목하고도 안온한 살림을 하였다. 하지만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먹고 입는 문제는 해결한다지만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도시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보면 대부분 소도시에서 생활하였으며 개혁개방후 많은 중소기업들의 체제개혁이나 파산 등으로 하여 정리실업인원이 점차 늘어났다. 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개체경영자로 되여 중등생활수준에 이르렀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삯군으로 일하면서 먹고 입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였다. 중한수교전 중국의 조선족은 도시나 농촌을 물론하고 그리 부유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안온한 생활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랭전시대에 중국과 한국도 실제상에서 랭전상태에 처하여 량국간의 래왕이 없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에 랭전시대가 완화되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이 친척방문의 기회가 이루어져 몇십년 갈라졌던 혈육을 찾게 되면서 한국래왕이 시작되였다. 그때에는 단순한 친척방문이라 취업은 없었고 친척방문길에 한국에서 수요하는 약들을 가지고 가서 파는것으로써 왕복 려비를 해결하는 정도였다.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

  중국조선족은 중국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하는 이중 언어우세와 중화민족이면서도 한국인과 같은 겨레라는 어느쪽에서도 떨어지거나 멀리할수 없는 민족적 감정으로 하여 중국과 한국간의 각종 교류에서 가교역할을 하였으며 중한수교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기업이 중국의 연해도시, 대도시에 진입하면서 중국인 로동력이 많이 수요되였다. 이리하여 조선족들도 한국기업에 취직하였는데 같은 민족적 감정과 언어소통으로 하여 한국인들이 조선족을 더 선호하게 되였으며 조선족을 통역이거나 관리인원으로 많이 채용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인구가 많고 취업하기 곤난한 현실에서 조선족들에게서는 일정한 취업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기회였으며 이러한 현실은 조선족들이 집거지를 떠나 연해도시,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과거에는 조선족인구가 연변을 위주로 하여 동북3성에 많이 분포되여 있었지만 최근 국가통계국의 통계에 의하면 지역별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속한 길림성이 104만 167명으로 가장 많았고, 흑룡강성 32만 7806명, 료녕성 23만 9537명으로 이들 동북 3성의 조선족이 전체의 87.8%를 차지했다. 다른 지역은 산동성(6만 1556명), 상해시(2만 2257명), 내몽골자치구(1만 8464명), 천진시(1만 8247명), 광동성(1만 7615명), 하북성(1만 1296명)으로 나타났다.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중한수교로 하여 친척방문기회가 더 많아졌고 그에 따라 취업활동도 할수 있었다.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기에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다. 이런 높은 인건비는 중국조선족들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벌수 있는 절호이 기회였으며 그렇게 번 돈을 중국에 돌아와 쓰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기만 하면 많은 돈을 벌어 잘살수 있다는 《코리안드림》을 갖고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한국에 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위장결혼》. 《신분위조》, 《밀입국》 등(한국의 통계) 다양한 수단으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3) 외화수입으로 자지방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코리안드림》으로 한국에서 몇년간 3D업종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일을 하여 뭉치돈을 쥐고 중국에 돌아와 도시에 아파트를 사놓고 새로운 창업을 한 사람들도 있고 그 돈으로 고향마을에서 여러가지 농기계들을 사놓고 규모화한 농업을 하고있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일할 때에 농장에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생태축산전문농장을 꾸리여 년간 몇십만원의 수입을 올리고있다.

  이들은 해외에 진출하여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여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연변의 정황을 보면 11차5개년 계획기간에 조선족들이 외화(대부분은 한국으로부터)를 벌어들인것이 41.3억딸라로서 주 재정수입의 총액과 비슷하며 외화수입이 가장 많을 때인 2006년도에는 10.6억 딸라로서 그 해 주 재정수입의 2배를 초과하였으며 국민생산총액(GNP)은 전성에서 첫자리를 차지하였다.

  《11차 5개년 계획》기간의 연변조선족자치주

  GDP, 재정수입, 해외로무수이과의 관계

  년도 GDP(억원) 재정수입(억원) 해외 로무수입(억딸라)

  2006 243.4 32.3000 10.6

  2007 307.2 54.3000 10.0

  2008 379.6 64.000 7.5

  2009 450.0 72.500 5.2

  2010 540.0 88.000 8.0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대량적인 인구이동으로 하여 조선족 집거지의 인구가 감소되면서 조선족사회의 해체위기를 겪고있다. 그 주요 현상들을 보면

  (1) 조선족집거지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010년 제6차 인구보편조사에는 중국내 조선족 인구는 총 183만 929명으로, 1990년 제4차 인구조사 당시 192만 597명보다 8만 9668명(4.7%)이 줄었다. 1996년도부터 조선족인구가 마이나스 장성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산아제한으로 하여 아이를 적게 낞은것도 있겠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는 한국에 시집가거나 국내 타민족과 결혼한 원인도 있다고 본다.

  한국 법무부의 2011년 9월 30일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결혼으로 한국에 간 중국조선족이 29,894명인데 그중 녀성이 22,284명이다. 이 3만여명이 섭외혼인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조선족 인구가 그만큼 감소되지 않았을것이고 그들이 아이 하나만 나아도 조선족 인구가 3만이 불어날것이다. 거기에다 국내에서 대도시에 들어가서 타민족과 결혼한 녀성들이 조선족총각들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조선족 인구가 그만큼 더 불어날것이다. 연변의 경우 1995년 조선족 인구가 86만명이었지만 2009년에는 80만명으로 7%가량 줄었다.

  이러한 인구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그전의 아담하던 조선족마을이 한산하게 되였으며 농촌의 많은 조선족학교들이 페교되고 조선족공동체해체의 위기를 겪고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있다.

  지금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이 옛날의 아담한 모습과는 달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던 마을과 그 주변 마을들은 순 조선족 마을로서 다른 민족이 한 가구도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로 하여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에로 진출하게 되였으며 특히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토지경영권을 다른 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다른 민족들이 들어 오기 시작하였는데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인제 한족호수가 절반을 넘어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이웃마을들에는 조선족이 한두호 지어는 한호도 없이 전부 기타 민족이 차지하고있다. 하여 우리의 토지, 우리의 터전이 완전히 타민족에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조선족 집거지의 농촌마을이 다 이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들은 토지를 임대한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며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이다.

  지금 외국에 갔다 온 적지 않은 조선족 농민들은 토지는 타민족에게 임대하고 소비가 큰 도시에 들어와서 아무런 창업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몇 년간 뼈를 갈아 벌어온 돈을 물쓰듯 다 써버리고 다시 출국행을 선택하여 또 다시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것도 로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수 있지만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로후의 생활보장마저 없는 신세로 되고있다.

  건의:

  우리의 토지, 우리의 터전이 타민족에게 넘어가는것을 막자면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거나 전문농장 혹은 전문합작사에 들여놓아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아무때건 본고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는것을 효과적으로 막을수 있을 뿐만아니라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굳게 지킬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 하여 우리 조선족들이 모두 한평생 지구의 껍질을 허비면서 피와 땀으로 이 땅을 적시라는 것이 아니다. 조선족이 농경사회로부터 도시화로 넘어가는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능력에 따라 떠나 갈수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과학적으로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한 농업으로 가꾸고 지키면서 도시에 진출한 사람들보다 못지않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다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려운 원인을 분석하여 보면 아래의 네가지로 볼수 있다.

  첫째로는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여 도시에 제 3산업이 대폭 증가하면서 녀성인력이 많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많은 농촌처녀들이 초중이나 고중을 졸업하고 도시에 들어가 일자리를 구하면서 농촌에 처녀총각비례가 불균형을 이루었다.

  두번째로는 한국으로 시집간 녀성이 많아지면서 더욱 처녀총각비례가 파괴되였다. 농촌조선족처녀들의 대량적인 류실로 하여 총각과 처녀의 비례가 대부분 마을에서 20:1, 지어는 그 이상에 달하는 마을도 있었다.

  셋째로는 농촌총각들이 자립자강의식이 약한데 있다.

  한족총각들과 조선족총각들을 비교하여 보면 한족총각들은 자지방에 뿌리박고 튼튼한 내 살림을 꾸리려는 의식이 강하여 자기에게 차려진 토지를 알뜰히 가꾸어 높은 수학을 따내면서도 다각경영을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고 있는 반면에 조선족총각들은 뿌리박는 의식이 약하여 한해 벌어 한해 사는 들뜬 사유로 살아가니 굳건한 살림이 되지 못하고있다.

  날아가는 새도 안온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마련인데 처녀들도 굳건한 살림에 튼튼한 기초를 갖고 있는 총각한데로 시집가려 하지 빈 털털이인 총각에게로 시집가려 하지 않는다.

  넷째로는 처녀들의 의식에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A 농촌처녀들이 사치한 도시생활을 동경하면서 도시에 들어갔지만 이들 대부분은 일정한 문화수준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비록 도시생활이라 하지만 낮은 로임으로 고달프게 최하층생활을 하고 있다.

  B 큰 도시에서 같은 조선족 총각을 만나기 힘든 상황이라 일부 조선족 처녀들이 한족과 결혼을 하고있다. 이러한 통혼은 민족적 풍속습관 차이로 생활상에서 부부간의 모순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어 그닥 재미있는 혼인생활이라고 할수 없으며 좀 심하면 리혼을 초래하고 있다.

  C 한국으로 시집간 녀성들 가운데서 극 소수는 남편을 잘 만나 행복한 살림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것은 극 소수에 지나지 않고 방문취업제문이 열리기 전에 한국에 가기 어려웠던 세월에 시집간 녀성들가운데서 대다수는 아무런 감정기초 없이 내가 시집가서 부모, 형제자매를 초청하여 한국에 오게 하면 모두 잘 살수 있다는 소박한 감정으로 브로커를 통하여 7,8살 지어는 10살 이상의 차이로 섭외혼인을 맺었다. 감정기초가 없이 이러한 소박한 감정으로 시집을 갔기에 대상자들을 놓고 보면 대부분은 한국에서 밑바닥생활을 하는 장가가기 어려운 남성들이였기에 시집간 녀성 역시 밑바닥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어떤 녀성들은 술주정뱅이거나 변태적 심리를 가진 남성을 만나 가정폭력, 성폭행을 당하여 집을 뛰쳐나왔거나 뛰쳐나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목숨까지 일은 사례들이 적지 않다.

  금년 7월 2일에도 서울에 시집간 중국동포출신 리모녀성(57세)이 남편의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리모녀성은 평소 식당에서 일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남편 홍씨(67세)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하였으며 홍씨는 평소 알콜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자주 마셨고, 상습적으로 아내를 폭행해 왔으며 이날도 홍씨는 술에 취해 안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까지 잠그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건의:

  혼인문제를 신중히 대하여 한국에 시집을 가면 잘 살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버리고 내막을 잘 아는 자지방의 조선족총각을 만나 힘을 합쳐 잘 살아보자는 인식을 갖고 결혼을 한다면 중국조선족의 인구감소에도 일정한 미봉을 할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농촌총각들은 자기의 능력을 잘 판단하고 도시에 들어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기 바쁠때에는 농촌에 뿌리밖는 의식을 갖고 농촌의 광활한 무대에서 농사를 짓는 외에 다각경영을 잘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는것이다. 농촌처녀들 역시 맹목적으로 도시에 들어가서 낮은 로임으로 고달프게 최하층생활을 하기보다 농촌에서 사랑하는 총각을 만나 맞들어 벌면 능히 부유한 생활을 할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방문취업제 이전에 한국에 간 중국조선족은 대부분 불법체류로 있었기에 수시로 중국과 한국을 나들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남녀사랑의 갈증으로 하여 일생이 얼마라고 고독하게 내 혼자서 외로이 보내겠는가 하며 이성을 친하여 한집에서 부부처럼 생활하였다. 이런것이 나중에는 본국에 있는 배우자한테 소식이 가서 《네가 거기에서 그렇게 하는데 내라고 여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내겠는가》 하며 그도 이성친구를 사귀어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있다. 이런 련쇄반응으로 하여 그들의 가정은 종당에는 파경에 이르고 이로하여 결손가정자녀수가 늘어나게 했다.

  최근 연변조선족자주 교육국의 통계에 의하면 결손가정학생수는 5만 여명으로 전체 학생수의 30%를 넘어섰으며 그중 조선족 결손가정학생이 3만 여 명으로서 61.3%를 차지하였다. 조선족학생 중 결손가정학생은 50%를 웃돌고 어떤 학교는 70, 80% 이상이며 지어 어떤 학급은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건의:

  해외 로무의 가장 큰 우점은 짧은 시간내에 돈을 많이 벌수 있는것이다. 지금 한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가운데 갓 결혼하여 한창 재미있게 혼인생활을 하여야 할 나이에 사랑하는 처(남편)자와 갈라져 일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해외에 나가 많은 돈을 버는것도 좋지만 가정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3D업종에서 고달프게 일하는것보다 새로운 창업을 하는 의식을 갖고 머리를 써서 자기 고장에서 부부간에 함께 창업을 하여 행복한 가정살림을 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바라건대 한국정부에서도 중국동포들에게 다른 해외동포들과 같이 재외동포비자(F-4)비자 발급을 확대하여 자유로이 래왕을 한다면 불법체류가 없어질수 있고 조선족사회에 던 안정성을 줄수 있다고 본다.

  부부가 갈라져 타향에 가서 일하더라도 오직 지금의 안해(남편)를 일생의 동반자로 하고 내 한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어 본 고장에 돌아가서 행복한 가정살림을 하겠다는 사상을 수립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리혼률도 낮추고 결손가정도 줄일수 있다고 본다.

  4. 금후의 전망

  중한수교이후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를 보면 한국과의 래왕으로 하여 선진적 문화를 많이 받아드렸고 한국로무로 하여 조선족들의 생활이 많이 펴이게 되여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있으며 자지방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인구이동으로 하여 토지류전,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위기 등 문제점들도 존재하고있는데 중한관계가 날로 조선족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하고있으므로 하여 이러한 문제점들도 점차적으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것은 사람마다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모두 경제가 발달한 곳,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곳으로 가려하고있으며 이것은 법률과 정책의 허용범위 내에서 각자의 자유선택이다. 조선족들이 경제가 발달한 대도시, 연해도시 해외로 나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는 5년전에 한국의 방문취업제 문이 금방 열렸을 때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가?》는 문장에서 《떠날수 있는 사람은 모두 떠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돈도 벌고 선진적 문화도 배우고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여 고향을 건설할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해외로무만이 치부의 길이 아니라고 본다. 농촌은 땅이 넓고 할일이 많다. 자신이 머리만 쓰면 얼마든지 치부항목을 찾을수 있다. 먼저 나간 사람들은 인제 돌아와서 고향건설을 하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개혁개방이래 특히 근 10년간의 변화가 아주 뚜렷하며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농촌도 이전에는 농업세를 내면서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2600년 내려오던 농업세제도를 페지하고 이외에도 우량종자보조, 농기구구입보조, 디젤유보조 등등 많은 나라의 《삼농보조금》혜택을 받는다. 그전에는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지금은 기계로 밭을 갈고 살초제로 기음을 대체하니 어렵지 않게 농사를 짓는다. 밭을 임대주고 도시에 들어갔던 사람도 다시 농촌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려 하고있다. 그리고 나라에서 《촌촌통》계획을 실현하여 콩크리트 포장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놓고 국도와 이어져 도시에 집을 잡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고향건설에 투자하여 과학적인 규모화농업도 하고 다각경영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본다.

  2009년에 국가전략으로 격상된 《장길도선도구》개발계획과 금년 4월에 국무원에서 비준한 중국두만강구역(훈춘)국제합작시범구건설은 동북진흥의 핵심프로젝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이 지정학적 우세를 리용하여 연변을 동북아물류기지로 건설하고 《연변은 세계에로, 세계는 연변으로》 하는 전략을 실시하여 국내외의 선진기업들을 인입하여 경제를 더 활성화시킨다면 농촌의 잉여로동력이 도시에 들어오게 되고 외지에 나갔던 조선족들이 되돌아 오게 될것이다.

  연룡도 일체화로 경제가 발달한 길림성의 동부중점도시를 건설하고 연성환경건설을 잘하여 봉황이 오동나무숲으로 날아들게 한다면 외지에서 사업하고있는 조선족기술일군들이 연변으로 돌아와 연변진흥에 기여할수 있고 연변에서 간 대학생들과 석사, 박사학위를 딴 류학생들이 연변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이바지할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되면 중국조선족은 조선족이란 이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더욱 건전한 조선족동체를 구축할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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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연변독서절 및 판권선전주간활동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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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연변주당위 선전부, 연길시당위 선전부가 주최하고 연변주독서협회가 주관한 제18회 연변독서절 및 판권선전주간 가동식이 연길시에서 개최되면서 2024년 연변주 전민열독활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가동식에서 연변주 2023년도 '우수열독보급인'과'우수열독

할빈북방삼림동물원 '조류사랑주간' 행사 가동

할빈북방삼림동물원 '조류사랑주간' 행사 가동

4월 28일, 할빈북방삼림동물원에서 제43회 '조류사랑 주간' 주제 행사의 발대식이 공원의 백조호수에서 열렸다.이번 '조류사랑주간' 행사의 주제는 '보호체계 개선, 철새 이동 보호'로 철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제고하고 철새와 그 서식지 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봉황산 4월 30일 개원

봉황산 4월 30일 개원

흑룡강봉황산국가삼림공원에 따르면 룡강삼공 산하툰국회사에 있는 봉황산 공중화원 풍경구가 4월 30일에 공식적으로 개원한다.5.1련휴를 앞두고 봉황산은 할빈 주변 봄나들이 및 레저 산행을 위한 첫 번째 선택지로 각지의 관광객을 초대하여 아름다운 자연 봄 해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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