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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인생》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10.16일 08:46
-고 유영호선생을 추모하며

가요《교정의 종소리》의 작사자 유영호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언 1년이 넘는다.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그 길을 시인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그렇게 가버리고말았다.유영호선생과 함께 했던 지난날의 짧은 추억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오른다.

내가 처음 유선생님을 만난것은 1983년 7월《제 1차 장춘음악주》행사에서였다. 당시 길림성 교하탄광학교 음악사범부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나는 길림지구대표단 성원들과 함께 음악회를 관람하러 장춘으로 갔다.

장춘시 춘성극장에서 음악회를 관람하던중 한 고향선배의 소개로 안도현문화관 창작조 일원으로 음악회를 관람하러 온 유영호선생님과 풋인사를 나누게 되였다. 그 때 내가 그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키가 크고 말수는 적지만 조선족치고는 중국어를 꽤 잘한다는것이였다. 그렇게 잠간 만난것이 인연이 되였을가, 나의 대표작이 바로 그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가요《교정의 종소리》가 될줄을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82년 5월, 나는 연길시문화관 음악부에 전근하여 대중가요창작과 보도사업에 젊음의 모든 정열을 쏟아붓고있었다. 덕분에 가곡《눈우에 쓴 이름》(석화 작사)이 1988년 주정부 진달래 문예상을 받았고 가요《오빠의 편지》(김욱 작사)는 그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문예야회에서 구련옥가수가 불러 방송되자마자 재빨리 전국 각지 조선족들속에 전파되였다. 하여 이듬해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에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변애창가요》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쯤에 유영호선생도 연변군중예술관 창작실 창작원으로 전근되여오게 되였다.

1990년 여름, 연변군중예술관에서는 화룡현 숭선향에서 전 주 대중가요창작학습반을 꾸리게 되였다. 나는 연길시문화관 음악부 음악보도원 자격으로, 유선생님은 연변군중예술관 창작실 창작원 자격으로 함께 동행하게 되였다.

전용차로 숭선향 어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오솔길에 늘어서서 웃고 떠들며 천천히 마을로 걸어들어가고있었다. 이때 숭선아가씨로 보이는 젊은 처녀 두명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다. 빨강과 파란 치마를 각각 입은 그 두 처녀는 얼굴피부가 말쑥하고 키가 늘씬한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선생에게 한마디 했다.

《화룡이 물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아가씨들이 저렇게 예쁠수가요. 이참에 차라리 숭선아가씨를 노래하는 가사를 써보는게 어떨가요?》

이쁜 처녀들을 눈앞에 두니 유선생도 기분이 금시 더 좋아져서《그래, 알았다.》하고 시원스레 대답하더니 그날 저녁식사때 벌써 가사를 내앞에 척 내놓는것이였다. 워낙 유영호선생은 존대말에 익숙치 않고 말을 놓기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와는 초면이든 구면이든 스스럼없고 편한 관계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유시인이 쓴 가사 제목은《두만강아가씨》였다.

산천이 수려해 살결이 맑나

강물이 맑아서 목청도 곱나

두만강 푸른 물에 발목 잠그고

미역감는 아가씨 어여쁘구나

아 두만강 아가씨

물처럼 깨끗한 두만강아가씨

숭선땅에 발이 닿은 순간부터 웬지 마음이 즐거워져서 기분이 붕- 떴다.

가사를 받아쥐고 읽어보니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길에서 조금 피곤했던터라 나는 가사를 머리맡에 놓고 음미하면서 잠부터 청했다. 시골의 밤이란 말 그대로 불빛 한점 없는 까막나라 풍경인데 두만강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귀전에 들려왔다. 그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편안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이튿날 새벽, 나는 일어나자 바람으로 가사와 볼펜 및 원고지를 챙겨가지고 두만강변에 나갔다. 안개 자옥한 산봉우리며 멀리 산굽이를 에돌아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물을 바라보며 청신한 새벽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나서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 나는 가사《두만강아가씨》를 조용히 읊으면서 선률을 더듬어보았다.

가사내용이 두만강에서 미역을 감는 처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한만큼 선률의 정서도 되도록 출렁이며 흐르는 물에 대한 감각을 많이 고려했다. 다 쓰고나서 숙소에 돌아온 나는 이튿날 아침 다시 그 곡을 갖고 두만강가에 나가서 온몸의 열정을 다 담아 한바탕 불러보았는데 마음에 드는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확신이 서는것은 아니였다. 일단 다시 수정을 할 곳이 없는듯싶어서 악보지에 깨끗하게 정리해놓았다.

그 창작회의에서 여러 작곡가들이 내놓은 작품은 200여수 되였던것으로 기억이 되니 당시 작곡가들의 창작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음을 알수가 있었다. 나자신도 도합 5수의 가요작품을 내놓았다.

시창(試唱)회의때 나와 박위철씨가 전자오르간반주를 도맡았고 연변군중예술관의 리순옥가수가 내가 곡을 붙인《두만강아가씨》를 불렀다. 시창회가 끝나자 유영호선생이 신이 나서 나에게 말했다.

《 야, 말도 말라. 노래를 척 들으니까 벌써 알것 같다. 성공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번 평의에서《두만강아가씨》가 1등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연길에 돌아온 후 그번 학습반에서 창작된 부분적 작품들을 연변인민방송국에 가져갔는데 공교롭게도《두만강아가씨》가 가사내용이 너무 평범하다고 다른 가사로 바꾸라는것이였다. 유영호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그 이튿날《두만강어머니》,《교정의 종소리》를 포함한 가사 5수나 내앞에 내놓으면서《에라, 모르겠다. 다섯개 다 가져가봐라》라고 하는것이였다.

곡을 쓸 때《두만강 아가씨》가사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나는 다른 가사들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교정의 종소리》는 더군다나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선택한 가사는 공교롭게도 내가 제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교정의 종소리》였다.

출렁이던 나의 《두만강 물결》이 바야흐로 땡땡 하는《교정의 종소리》로 바뀌는 력사의 순간이였다. 이를 어쩌노? 별수없이 나는 그 가사에 곡을 다시 붙여 바치는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태여난 우리의《아기》는 행운스럽게도 그해《뻐스컵 대중가요창작콩클》에서 1등의 영예를 받아안게 되였다.

이 노래가 연변인민방송국 매주일가로 방송된 후 점차 퍼져나가더니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작 작곡자인 나는 가사가 바뀌는 통에 오래동안 그 가사를 외울수가 없었고 자꾸만 원래의 가사로 곡을 흥얼거리기가 일쑤였다. 내 사정이야 어찌됐든 그 이듬해 교원절에는 연변TV방송국에서 이 노래를 매주일가로 방송했고 요청프로에도 자주 방송되였다. 몇년이 지난 뒤에야 드디여 내 마음속에서도 차츰 원래의 가사가 밀려나고 새 가사가 자리잡게 되였다. 만일 가사를《두만강아가씨》로 했더라면 과연 어땠을가? 어쩌면 이 노래가 지금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꿈많은 시절을 축복하는가

배움의 새날을 불러오는가

가슴을 울려주는 교정의 종소리

언제나 들을수록 정다웁구나

아 교정의 종소리

희망찬 래일을 부르는 메아리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학창시절, 사람들은 그 시절에 대한 많고많은 애틋한 추억들을 가슴속에 간직한채 살고있다. 인생의 세파속에 부대끼며 코앞에 닥친 일들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채바퀴 돌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학창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을 되새겨주는것이다. 시인의 따뜻한 마음과 소박한 언어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여 공감을 불러일으킨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영호선생은《교정의 종소리》외에도《인생은 사흘이야》,《진달래 고향》(박학림 작곡),《무지개인생》(윤강철 작곡) 등 여러 수의 애창가요를 써냈다.

유영호선생은 유명을 달리하기 보름전쯤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야, 내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네? 언제요? 아주 왔습니까?》

《응, 이제는 여기서 살아야지. 언제 술 한잔 하자. 그건 그렇고 내가 지금 모아산에 등산왔는데 산이 너무 좋구나! 그래서 가사 한수 적어보았다. 요즘 등산에 대한 노래가 별로 없지 않니? 먼저 1절만 나왔으니 그런대로 빨리 받아 적어서 곡을 만들어봐라.》

유영호선생은 한동안 북경의 아들집에 거주했었다. 아마도 오랜만에 고향의 산을 밟으니 감회가 새롭게 느껴져서 또 다시 창작의욕이 솟구친듯했다. 그 순진무구함을 대하는 순간 아, 선생은 어쩌면 아직도 예전과 꼭같을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웬지 가슴이 알짝지근했다.

맘에 드는 가사를 썼다고 전화로 흥분하는 시인에게《곡을 써봤자 제작하기도 힘이 드니 나 지금 곡 쓰고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하고 말하려다가 차마 찬물을 끼얹을수가 없어서 그런대로 받아 적긴 했지만 구석에 박아두고 다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그것이 고인과의 마지막 통화가 될줄을 내가 어찌 알았으랴?

이제 유선생은 세상에 없다. 매사에 즉흥적이였던 유시인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건강관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것으로 알고있다.

《때가 되면 죽겠지. 죽을가봐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면 뭐하냐, 살았을 때 마음껏 술도 마시고 놀기도 해야지.》그러던 그가 어느 해인가 생일이라고 전화가 왔다. 큰병을 앓고나서 모든 외출을 삼가할수밖에 없었던 내가 못가겠다고 했더니《야, 내가 50년만에 어쩌다가 생일을 쇤다고 청했더니 못오겠다는거냐?》 라고 소리질러서 할수없이 참석했다. 그때 초대손님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그렇게 즐거워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활달한 성격 그대로 아무리 심각한 일도 웃어넘길줄 아는 호탕함을 갖고있었던 선생, 그가 영영 아침이슬로 사라진 지금, 웬지 무심하게 지나쳤던 선생과의 작은 인연마저도 새록새록 떠오르며 가슴이 찡-하게 저려온다.

비온 뒤에 솟아나는 칠색무지개는

사는 동안 짧다 해도 눈부시게 어여쁘네

한백년을 살고 가는 우리의 인생도

세월의 하늘에선 한순간의 무지개

아~ 인생은 무지개런가

진정 시인은 자신이 원하던 무지개같은 삶을 살다 간것이 아닐가?

/김경애(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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