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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考 (2)/김 관 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3일 10:59
“두만강” 考 (2)

김관웅

두만강 류역은 수 천 년의 력사의 흐름 속에서 그 민족 주체가 수 없이 바뀌여 왔다. 물론 고대 씨족 부락이나 부락련맹 혹은 고대 민족국가를 지금의 근현대의 민족과 동의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아래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태고시절은 그만 두고라도 문자기록이 남아있는 2천 여 년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도 그 민족적 주체는 수 없이 바뀌여 왔으며 따라서 두만강의 명칭도 수많이 바뀌여 왔으리라고 사료된다.



1. 옥저인들의 “두만강”

약 2000여 년 전에는 예맥족(濊貊族)의 한 갈래로 추정되는 옥저인(沃沮人)들이 두만강 류역에 살았었다. 2천여 년 전에 옥저인들이 지금의 두만강을 어떻게 불렀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2, 고구려시기의 “두만강”

그러나 기원 1세기 말, 고구려에 의해 옥저가 병탄되면서 두만강 류역은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어 거의 500년 가까이 고구려인들의 활무대로 되었다. 그 당시 고구려에 복속했던 백산말갈(白山靺鞨)이 두만강 류역의 주요한 거주민들이였다. 고구려인 혹은 백산말갈인들이 500년 이상 두만강을 어떻게 불렀는지도 문헌상 기록이 없다.



3. 발해시기의 “두만강”

기원 668년, 고구려가 망한 뒤 30년 후에 발해가 연변 땅에 도읍을 정하면서 두만강 류역은 10세기 초반까지는 발해의 판도에 들어갔으며 그 후로 200여 년 동안 발해인들의 활동무대로 되었다. 발해인들이 200여 년 동안 두만강을 뭐라고 불렀는지도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4. 요, 금, 원 시기의 “두만강”

기원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된 후 두만강 류역은 당연히 거란 족의 손으로 들어갔다.

11세기 이후로부터 두만강 유역은 금나라, 원나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연히 두만강의 류역의 주체 민족은 여진족들이였다.



5. 명, 청시기와 조선조시기의 “두만강”

명나라시기(14세기 중엽 이전) 두만강 류역의 주체 민족은 여진족이였다. 건주좌위의 여진인들은 주로 두만강 류역에 살고 있었다. 바로 이 건주좌위의 주요한 부락인 오도리부락(두만강 중상류 류역), 오디하부락(두만강 할류류역) 올량합부락(두만강 중류 류역)은 모두 두만강 류역에서 수백년 동안 살아왔다. 연변지역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여진인들의 활무대였다.

이런 상황은 15세기 조선조의 세종대황 시절까지 이어지다가 세종대왕의 육진 개척에 의해 두만강 류역의 녀진부락은 쫓기여 두만강 서안으로 넘어오게 되었으며 두만강 동쪽 연안은 조선조의 제일 동북쪽의 변경지역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조성왕조는 두만강 동쪽 연안에다 경흥, 경성, 온성, 종성, 부령, 회령 등 육진을 설립하고 조선반도의 남부에서 많은 이민들을 이곳에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5세기 전반기 이전에는 만주족들은 두만강에서 대대손손 살면서 줄곧 만주어로 된 “두만강”의 이름을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 부르하통강, 연집강, 가야하 등은 모두 만주어에서 나온 강 이름이고, 두만강 류역의 훈춘, 왕청, 도문 등도 다 만주어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두만강 류역의 함경북도에도 아직까지 아우지 같은 만주족 지명의 잔여가 남아있다. 지류는 몽땅 만주어로 불려졌는데, 그 지류가 합쳐서 이루어진 주류만은 조선어로 불리웠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적어도 두만강 류역이 여진족들이 주체로 되여 살았던 15세기 중반 이전에는 분명히 여진어로 된 강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두만(豆漫) 혹은 두만(豆滿)은 조선의《룡비어천가》나 《조선왕조실록》등 력사문헌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낱말로서 만주어이다, 만주어에서 두만(豆漫) 혹은 두만(豆滿) 만주족의 추장이나 부락의 두목을 뜻하는데, 중국문헌들에서는 이를 의역하여 만호(萬戶)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만주어로 "두만강"은 "새가 많은 강"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보아 “두만강”은 민주어에서 유래되였을 가능성이 십분 높지만 아직은 확실한 증명을 더 찾아야 할 가설이다. 물론 글자 풀이를 해서 겨울에 얼음이 언 두만강 강바닥에 콩 타작을 해서 두만(豆滿)- 콩이 가득하다고 두만강(豆滿江)이라고 했다는 것은 확실히 전설로 일부 지역에 유전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역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런데 두만강류역에서 콩가을이 늦어도 10월 말이면 끝나는데 두만강에 얼음이 두껍게 어는 12월 말까지 기다려서 콩타작을 했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것 같다. 그리고 콩타작을 하겠다고 일부러 두만강까지 콩밭에서 콩을 실어갔다는 것도 별로 신병성이 없어 보인다. 이는 두만강(豆滿江)이라는 한자어 표기를 보고 호사자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못한다.

각설(却說)하면 학문연구에서 가설(假說)은 언제나 새로운 중대한 발견을 하는 전제적이 조건으로 기능하여 왔다. 중세기의 기독교 교회에서 주장했던《지구중심설》은 근거가 없는 가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성을 내포한 가설인 코페르닉스의 《태양중심설》은 이단사설이라고 공격했고 심지어는 코페르닉스를 지지하는 부루노를 화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가설은 모두 자기로서의 존재할 이유와 가지고 있다. 다만 자기의 별로 근거가 없거나 틀린 가설을 가지고 남의 가설을 반대하거나 부인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취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학문 밖의 교권이나 정권이나 기타 다른 권리를 동원해 자기의 가설을 정립시키려고 망발을 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직 량지가 있는 사람이 취할 바는 공개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쟁론을 통해 진리를 규명해 내는 것이다.

다시 본론에 돌아오기로 하자.

산 이름도 마찬가지다. 옛날 중국 문헌들에서는 지금의 백두산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했고 만족은 백두산을 부쿠리산(布庫里山)이라고 했다. 불함산이나 부쿠리산이나 “밝다”, “희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白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국호 금(金)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淸)도 모두 밝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청나라 황실의 성도 뜻으로는 금(金)과 상통한다.

밝고 흰 것을 숭상하는 것은 조선민족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의 첫 임금 주몽을 동명왕(東明王)이라함은 역시 밝음을 숭상하는 고구려민족의 문화심리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朴赫居世)에서 박(朴)은 밝음과 통한다, 그러기에 박혁거세의 이름의 뜻을 문헌에서는 광명, 즉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풀이를 했다. 조선민족에서 가장 많은 성씨의 조상이라는 신라의 임금 김알지(金閼知)는 황금알에서 태여나서 바로 황금알이란 뜻으로 김알지(金閼知)라고 했다지 않는가.

이밖에도 다른 실례를 하나 더 들자면 문화적인 계승적 관계가 깊을 것으로 사료되는 밀접한 련관성을 갖고 있는 고구려족과 만주족은 모두 버드나무를 지모신(地母神)으로 섬기였고, 태양숭배의 짙은 전통을 갖고 있다. 이를 어찌 우연한 일치로 보겠는가. 오른촌족, 허저족, 만족의 곰 토템숭배 그리고 사슴숭배, 까마귀숭배 등을 조선민족의 동일 동물숭배를 어찌 우연한 일치로만 보겠는가. 만-퉁그스(滿-通古斯) 제 민족의 샤만문화와 조선민족의 무속문화 사이의 수많은 동일성을 어찌 우연한 일치로만 보겠는가.

이처럼 동북 경내에서 살았던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은 오래 동안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경제생활을 영위하면서 서로 많이 싸우기도 하고, 질시하고 반목하면서 살아왔지만 동시에 그 혈통, 언어, 신앙, 민속 등 원시문화의 제반 면에서의 문화적 뿌리가 같거나 비슷할 확률이 아주 높다.

우리는 사돈(査頓)이라는 이 낱말이 만주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북부의 조선족들은 수백년동안 여진족과 통혼을 했었다. 그러므로 여진족은 조선족의 진짜 사돈이 되는 민족이다. 특히 함경도 사람들의 피속에는 여진족의 피도 많이 섞여 있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하여 함경북도의 설화 속에는 만주족의 형상이 심심찮게 등장하며 조선왕조의 건국에도 여진족들이 많은 공헌을 하였다. 퉁두란, 즉 후의 리지란은 바로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대공을 세운 여진족출신의 대장군이다.

그러기에 중국 동북 경내의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반도의 조선민족의 혈통적, 문화적 련관성을 부인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처럼 열린 생각을 가져야만 우리민족문화의 혈통적인 련관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친연관계도 갖고 있는 주변의 여러 민족 문화와의 상호 조명 속에서만 우리민족문화의 뿌리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우리민족문화를 더욱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객관성과 과학성에 입각해야지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나 사회의 시류(時流)에 좌우지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진일보로 증명을 해야 할 문제로서 참으로 재미나는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지금 필자는 제자들과 함께 이 면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많은 분들로부터 필자의 이런 연구취향이나 연구결과에 대해 유익한 조언들을 주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2007년 7월 20일 장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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