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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7]민족문화교육으로 특색 살리고 살길 찾는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4.08.08일 12:41

2013년 5월 30일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80돐기념축제에서 사업성과를 회보하고있는 권기태교장.

-《민족교육의 기치》를 지켜가고있는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오전 9시반, 업간체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어김없이 울리면 수업에 빠졌던 500여명 사생들이 운동장에 쏟아져나와 조선민족전통놀이인 강강수월래를 시작한다. 손에 손잡고 둥그렇게 둘러선 아이들 사이사이에 교원들도 함께 하며 강강수월래를 즐기는 이들은 권기태교장을 비롯한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전교사생들이다.

민속놀이를 업간체조에 교묘하게 결부시켜 흥에 넘치는 즐거움속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이것은 《체험속에 즐겁게 성장하는》 리념속에 민족문화특색을 살려가는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또 하나의 창의적인 실천이 아닐수 없다.

뿌리깊은 민족교육의 터전

《9.18》사변이 폭발한후 길림시주위에 산재해있던 조선족농민 만여명이 길림시구역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조선인거류민회 회장으로 있던 강로영은 거류민회 회원들과 함께 전쟁피난민들과 시내 조선인군중들을 동원하고 정부당국과 교섭하여 1932년 자체자금으로 지금의 상해로북쪽에 첫 민영조선족학교 《길림시조선인보통학교》를 세웠다. 당시 교장으로는 신태호선생이였고 6명 교원에 200여명 학생들이 8개 학급에 배정되였으며 학제는 6년제였다.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지도부일동.

1937년 일제는 《치외법권페지조약》을 구실로 조선인들의 교육권리를 위만주국에 넘겨주었다. 하여 1938년부터 《길림시조선인보통학교》는 《길림시공립동영국민우급학교》로 개명되였으며 조선어는 취소되였고 학생들의 이름마저 일본이름을 쓰도록 강요당하였다.

1948년 길림시가 갓 해방되였을 때는92명 학생에 3명 교원뿐이였다. 1949년 2월 27일, 길림시교육국의 비준을 거쳐 이 학교는 《길림시조선족완전소학교》로 명명되였고 학생은 266명, 교원은 9명으로 늘어났다.

1953년경 김일성장군의 아들 김정일과 조선중앙고위급지도자의 자녀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김정일은 소선대중대위원이였고 아주 총명하고 훌륭한 모범학생이였다고 당년 담임교원 주경옥선생의 기억으로 학교력사전시관에 기재되여있다.

1954년 이 학교는 《길림시통천구조선족소학교》로 다시 명명되였고 1957년에는 《길림시창읍구조선족소학교》로 명명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민족학교는 첩첩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민족학교는 쓸모없다》는 극좌로선의 영향하에 조선족학교를 없앤다는 통지를 학부모들에게 발부하였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대로 조선족학교를 겨우 지켜내게 되였다.

당의 11기3차전원회의이후 당의 교육방침과 민족정책이 전면 관철되면서 1978년부터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는 실정에 따라 《조선어교육을 강화하고 장점으로 단점을 미봉하며 교수질을 전면 제고》하는 교수개혁을 진행하였다. 초기 연변에서 제공하는 교재를 기준으로 학과목수업을 진행하였으나 산재지역 실정과 맞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어문은 목표에 접근시키고 한어는 한족학교 어문교재를 직접 도입하면서 자체로 교재를 편찬하고 수업내용을 조정하였다.

1985년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 《길림성조선족소학교교육개혁현장회》를 개최하게 되였다. 이 회의에서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는 《길림성조선족소학교교육개혁의 한폭의 기치》로 평의되였으며 교수개혁성과는 전 성 산재지구조선족학교들에 보급되였다.

민족학교로서 어떤 특색을 구비해야 할것인가?

1993년부터는 조선족학생들의 총명과 장기에 근거하여 《세가지 언어를 고루 돌보고 수학과 예술로 장기를 보이면서 전면 발전하는》운영특색을 세웠다.



사생들의 공동노력으로 신동컵수학경연이며 올림픽수학경색에서 우수한 성과를 따내여 조건이나 자질이 월등한 기타 한족학교들을 훨씬 초월하였다.. 또한 예술면에서도 민족학교의 특장을 발휘하여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1998년에는 진달래꼬마예술단을 따로 조직하고 전국민들레예술축전이며 전국조선족중소학교예술경연에서 길림지구대표단위로 전국중소학교 예술교육사업현장회의무대에도 올라 전시공연을 펼쳤다. 또한 말레이시아, 한국 등 국제어린이공연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이 학교 예술교육은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 소학교올림픽수학이 정지되면서 《수예특장》은 한계에 직면하였다. 학교지도부에서는 민족문화교육과제연구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일반교육자로서 직책을 완수했다고는 할수 있으나 민족교육자로서 민족학교를 위해 어떤 민족특색이 있는 일들을 해왔는가》하는 반성을 하게 되였다.

하여 민족교육에서 《민족문화특색을 살리고 살길을 찾자》는 의념을 갖게 되였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인사례절부터 뭔가를 달리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졌으며 2006년부터 특색있는 례절교육을 진행하였다. 《인민의 리익이 무엇보다 높다》는 뜻으로 통하는 소선대대례 대신 색다른 민족특색을 띤 례의를 갖추었을 때 그 친절감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잇달아 매일 하는 업간체조도 보다 민족특색이 있고 재미있고 즐겁게 하는 놀이를 결합시켰다. 학급특점에 따라 다종다양한 체육활동과 우리 민족의 전통무용인 《강강수월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는데 효과가 좋았다. 학생들은 업간활동시간을 통해 체육활동도 흥미롭게 진행할수 있었고 또한 우리 민족 고전예술의 미를 체험하는 가운데서 민족인의 자부감도 느낄수 있었다.



또 민족학교라면 학생들에게 어떤 민족특성을 수립시킬것인가? 지도부의 연구는 계속되였다. 결과적으로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후덥다》는 세가지 가장 전형적인 우수한 품성을 귀납해내였다. 교문중앙에는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후덥게》라는 표어가 나붙었고 이 과제는 학생들의 로동학과목과 결부시켰다.

김영애서기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언제 어디서나 부지런한 사람,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대하든 후더운 사람》 이 세가지를 구비하고 실천한다면 세상 어디서도 환영받는 우수한 조선족으로 살아갈수 있을것》이라고 어조에 힘을 실었다.

2006년 5월 24일, 길림시덕육정품현장회의가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 열린가운데 이 학교의 덕육학과는 《체험속에서 즐겁게 성장하는 운영리념과 조선민족특점을 결부하여 영광스런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례절교육을 룡두로 하고 덕으로 사람을 육성하며 덕을 첫째로 하는 새로운 덕육구조를 이루었다. 례절교육무대를 마련하여 교육의 인본화와 생활화를 실현하였다》,《민족특색이 선명한 덕육정품》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민족문화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속있게

민족문화교육에 착안점을 두고 체계를 형성하고 특색을 살리며 살길을 찾는것 역시 실천과 연구, 연구와 실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탐색해낸 일로였다. 민족문화특색을 살려감에 있어서 이 학교에서는 단계적이고 목표있게 그리고 실속있게 실시하였다.



2011년 전국교육과학《11.5》계획 교육부계획과제연구토론회에 올린 학과목전시장면.

우선 학생들에게 자기 민족에 대해 충분한 료해와 체험을 갖도록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독서체험활동과 결합하여 단계적 실천활동을 펼쳤는데 1년 첫학기와 제2학기에는 독서애호자, 독서왕 독서애호가하령영 체계를 형성하였다. 저급학년에서는 민족동화이야기 전래동화 등을 읽고 중급학년에서는 고전소설 토끼전, 홍길동전 등을, 고급학년에서는 인물전기 리순신장군, 세종대왕전 등 단계를 나누어 읽는다

하반년에는 민족문화체험활동으로 전통음식, 례절배우기, 력사알기 등 체험활동을 진행하며 전 과제를 3년만에 끝낸다. 이런 활동은 교정복도문화활동과 결합하여 진행하였다. 교정복도는 층수에 따라 내용차원이 달라진다. 조선민족풍속습관이며 민족명절유래, 민속놀이, 민속음식 그리고 민속전시관…아이들의 손때 묻은 아기자기한 민속작품들, 복도 곳곳에 걸려있는 민속그림들 그야말로 이 학교에서만 찾아볼수 있는 정감있는 풍경들이다. 교정복도에는 500여건의 창작품들이 진렬되여있고 학생, 학부형, 교원 모두의 참여로 폭넓은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체험속에서 민족 력사와 문화를 배워가는 학생들.

2011년 11월 4일 동북3성조선족중소학교 교육계의 300여명 동인들은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서 진행한 전국교육부 《중소학교민족문화교육체계구성 및 효과적인 실시연구》제2차연구토론회 및 양성회에 참가하였다. 이 학교의 교정문화며 학교에서 자체로 편성한 6편의 교재와 교사들의 연구성과를 집성한 론문, 6개 학과목 전시, 학생들 자체로 만든 조선족민속물, 100여폭에 달하는 민속그림과 학교문예공연 등 연구성과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는 《11.5》계획 과제연구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학교도 사랑 먹고 크는 학생과 같다

그간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관심은 컸다. 이 학교 학부모협회 회장을 담임하고 명예교장으로 있는 길림시만리쇼핑센터 조약걸회장은 먼거리 통학으로 고생하고있는 학생들에게 통학차를 지원하였다.



업간체조시간에 체조와 민속놀이를 겸한 《강강수월래》를 즐기는 전체사생들.

조선족과학자협회에서도, 부녀협회 녀성들도 장학금, 조학금을 보내오고 국외인사들도 컴퓨터며 놀이기구들을 보내주었다. 교원들은 교사절을 《학생 사랑하는 날》로 정하고 학생들앞에 사랑의 승낙을 하며 반날 로임을 떼여 빈곤학생을 돕는다. 학생들 또한 이틀간의 소비돈을 모아 빈곤학생들을 돕기도 한다. 《사랑의 일기쓰기》(한해사이에 천여편) 기재된 내용들만 보아도 감동적인 일화들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국외인사들의 사랑의 마음도 못지 않았다. 한 일본인 부부는 켬퓨터를, 한국 민간인사들은 어린이 놀이기구를, 한국 꿈장학재단에서는 교원들의 해외연수를 맡아주고있을뿐더러 정기적으로 10명 학생들에게 장학금, 조학금을 조달하고있다.

물론 다방면의 사회적 지원과 지지는 학교성장의 지팡이로 많은 도움을 주고있지만 민족학교운영에서 정부적차원의 지지와 지원은 관건적인 보장으로 된다.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는 1991년 12월 길림시창읍구조선족학교로부터 시급학교로 격상하여 길림시 당위와 정부의 관심과 지지를 대폭적으로 받았다. 당정 최고지도자들은 6.1절이나 교사절이면 꼭꼭 학교를 찾아 위문하고 우수교원들에게 장려금을 발급하기도 하며 교원들의 직함대우부터 개선해주면서 적극성을 동원하였다.



민속작품.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받는데는 또한 준비된 자세와 전략이 따라서야 했다. 조선족사회의 결손가정의 폭증과 함께 학생수가 절감되는 현상에 근거하여 이 학교 5학년3학급에서는 <결손가정>을 주제로 한 주제반회를 조직하였다. 아주 놀라운 설문조사결과가 나왔다. 길림시제1소학교(한족학교) 5학년3학급과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5학년3학급을 비교하니 한족학교 5학년3학급은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량부모의 슬하에서 생활하고있었다. 하지만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5학년3학급 학생들은 3명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이 전부가 결손가정자녀였다.

이런 대비결과를 정부관원들이 피부로 느껴알게 하기 위해 이 학교에서는 6.1절 방문을 온 시당위 주화진(周化辰)서기앞에서 결손가정학생과 출국로무로 멀리 떨어져있는 학부모와의 전화대화과정을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감동실황으로 조직하였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주화진서기는 이 학교의 결손가정학생비률이 높고 발전공간이 비좁으며 학생들 주숙이 어려운 상황을 깊이 료해하고 새교수청사를 지을 결정을 내렸다.

2009년 10월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는 드디여 부지면적이 1만여평방메터에 달하고 건축면적이 7781평방메터에 달하는 성급1류 새 교수청사에 입주하게 되였다. 길림시민족사무위원회에서도 30만원을 투자하여 판공설비를 개선해주었고 길림시교육국 국장도 친히 학교를 찾아 구체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리하여 20개 학급마다 컴퓨터와 다매체교수시설을 갖추어 개방화, 현대화, 민족화, 국제화한 신형의 학교로 각광받고있다.



영광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는 력사전시실 일각.

개혁개방의 혁신속에 2000년 그때는 학생수가 800명을 웃돌던 이 학교에 출국바람과 연해도시진출의 격변기를 겪으며 지금은 524명 학생에 54명 교원뿐이다. 기회속에 위기가 숨어있는것이다. 교단에 오르는 교원들로 기숙생을 돌보며 1년간 지탱해오던 기숙제는 여력이 딸려 그만 잠정 페지되고말았다. 이는 학생수가 줄어들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되기도 한다.

권기태교장선생은 《여러해째 상급에 교원편제를 요구하고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지금 산재지역 여러 학교가 통합되거나 페교의 위기에 직면해있는데 그런 학교들에는 교원이 남아돌기마련입니다. 그들이라도 우리 학교 관리에 동참할수 있도록 민족교육자원을 동원해준다면 얼마나 큰힘이 되겠습니까?!》라고 퍽 안타까워하고있었다.

산재지역 조선족어린이들의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일념으로 절절히 호소하던 권기태교장의 목소리는 오늘도 귀전에 울리는듯하다.

편집/기자: [ 김청수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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