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시 보산향 신툰촌 황명자지부서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류대식 기자 =대가집 맏며느리같고 녀성령도자 기질이 엿보이는 그녀다.바로 오상시 보산향 신툰촌 당지부서기 황명자(56세)씨이다. "촌지부서기사업이 이렇게 힘든줄은 생각도 못했어요.그래서 처음은 몇번 그만두겠다고 나누웠는데 촌민들과 향 간부들의 설득으로 다시 하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왔고, 그러다나니 사명감이 생기고 최선을 다하게 되더라고요"황지부서기의 진실한 고백이다.
오상시 보산향 신툰촌 황명자지부서기/본사기자
신툰촌은 오상시내에서 80여리 떨어진 비교적 외진 곳이다. 2013년 7월,황지부서기가 금방 부임했을 때 그의 말대로 하면 종이 한장도 인계못받은 완전 공백이였다.마을의 기본인 인적사항과 토지대장 같은것도 없었다.그래서 처음에는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길밖에 없었다.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향에가서 정보를 수집해 서류를 만들기 시작했다.촌 사무실이 없어 처음에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비좁아 집을 하나 임대하여 엇비슷한 사무실을 꾸려놓았다. 특히 골머리가 아픈것은 토지대장이였다.2014년부터 전국적인 토지 재확정이 시작되였는데 원래 장부가 없는지라 우선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찾아가 조사하고 외지에 있는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기본 정보를 장악한후 한뙈기한뙈기 다니며 자로 재서 토지대장을 만들었다.
신툰촌은 380여호에 호적인구는 1700여명, 5800여무의 토지를 갖고있다.토지는 마을 사람들이 40여쌍 붙이고 나머지는 타민족이 붙이고있다. 지금 신툰촌은 기타 조선족마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외지로 나가고 마을에 살고있는 호수는 22호에 40여명인데 대부분이 로인들이다.때문에 로인 관련 사업이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되였다. 우선은 마을 경제가 넉넉치 못한 상황에서 로인들의 문예오락활동을 능력껏 지원하였다.마을의 로인들을 보면 거의가 자식들이 외지에 있기에 앓거나 하면 수시로 황지서가 배동하여 병을 보거나 해야했다.무슨 일을 봐도 한어가 따라가지 못하기에 역시 같이 배동하며 처리해야 했다. 특히 오보호 같은 경우는 의지가지할 때 없는 사람이라 양로원 선택부터 시작해서 구석구석 신경을 써야했다.박씨라는 한 오보호는 정신상태가 좋지 않아 쩍하면 밤잠을 자지 않고 소란을 피우기에 양로원에 보내면 보통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전화가 와서 데려가라하여 방법없이 가서 데려와서는 또 다른 양로원에 보내야했다.들어보니 애초에 하다가 왜 나눕기까지 하였는가 하는것이 리해가 갔다.
녀성으로서 황씨가 이렇게 고향에 남아서 지부서기사업까지 하게 된데는 운명같은 사연이 있었다.지난세기 90년초부터 불기 시작한 한국행 바람에 황씨도 한국행을 계획해 보지 않은것은 아니였다.그런데 호적사항문제로 나갈수가 없었다.방법없이 눌러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때는 농사를 지어도 효익이 적을 때인지라 몇년을 남방 대도시에 가서 여러가지 장사도 해보았다.
2007년에 고향에 돌아와 15헥타르 가량 농사를 지으니 가정생활비와 두아이를 공부비용을 제치고도 10만원저축 되더라는것이였다.여기서 재미를 본 그는 그때부터 고향에 남아서 꾸준히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꿈을 키웠다. 2013년, 신툰촌의 원 당지부서기가 자리를 내놓게 되였는데 많은 마을사람들은 그가 경선에 나설것을 요청했고 그도 고향에서 창업해보리라 작심한 이상 지부서기 사업도 잘해보고 싶어서 경선에 나섰던것이다. 지금 그는 지부서기사업을 하면서 논을 10헥타르가량 붙이고있는데 순수입이 일년에 10만원가량 된단다. 남방에서 장사를 하는 남편이 모내기때만 와서 도와주고 나머지 일은 혼자서 하는데 다 기계로 하기에 농사하기가 이전에 비해 훨씬 쉽다고 한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게 큰 근심이야요.괜찮은 사람을 물색해서 배양하고 밀어주는것이 제가 해야 할 또하나의 중요한 일인것 같아요.그래서 우리의 근거지를 잘 지켜야죠" 녀성으로서 고향을 지키는 중임을 떠맨 황명자 지부서기,그의 꿈은 더욱 아름답게 영글어가고 신툰촌도 계속 든든한 마을 사람들의 후방으로 근거지로 존재해 갈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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