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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글짓기응모] 행복이 샘솟는 삶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9.09.29일 15:33
- 글 / 유춘란 -



  (흑룡강신문=도쿄) 일본 조선족 문화 교류협회에서 기획한 작품 응모통지; 주제는 "당신만의 소중한 이야기 들려주세요 "이라고한다.

  바다건너 일본 땅에도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시는 분들 있다는게 너무 큰 감동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은 다른 일 제쳐놓고 "나만의 소중한 이야기"를 적어 보내려한다. 수상을 떠나서 그저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 분들에게 …

  돌이켜보면 벌써 20년도 더 되여 간다.

  그때는 우리 조선족들가운데서 한창 자식들을 한족 학교에 보내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였다.

  "중국땅에 살면서 한어를 모르고서는 절대 큰일 할수없다"는 거다. 그렇긴 하다. 큰일은 제쳐 놓고라도 한어를 모르면 시장에 가서 물건값도 제대로 흥정할수 없어 마냥 답답하고 억울한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민족 언어와 문자를 버리면서 한족학교에 애들을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을가?

  언어와 문자는 민족의 얼이고 혼인데 한어를 잘 배우기 위해 자기민족 언어와 문자를 잃어야한다는건 자신의 령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거창한 리론은 제쳐 놓고라도 한족말을 모르면서 한족학교에 다니는 손군들을 맡아 키우고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한숨소리에 땅이 꺼지고 있었다. 이런 풍경앞에서 소학교에서 몇년간 교편을 잡은적 있던 나는 조선족 어린이들을 위한 학전교육을 향해 도전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유치원에서부터 조선어와 한어를 함께 가르치면 애들이 한족학교에 입학해야 할 리유가 없을텐데…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나는 유치원을 꾸려보기로 결심하였다. 장애때문에 장장 6년이란 세월을 고스란히 바쳐왔던 교단을 물러나야했던 아픈 과거가 있었건만 나는 왜서 인지 그래도 애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1996년 금방 설이지났을 때, 나는 림시공으로 근무하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곧바로 내가 살고있는 훈춘시 영안진에서 페교된 유치원을 인수했다. 1년동안 문을 닫았던 유치원교사라 문을 떼고 들어서니 맞아주는건 먼지와 거미줄 뿐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니 연기가 거꾸로 쏟아져나왔다. 혼자서는 어떻게할 방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군을 청할 여건이 안되였기에 친정엄마한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엄마가 온돌 수리할줄 알았다.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온들을 뜯고 구들고래를 메운 검은 재와 얼기설기 엉켜붙은 찐득찐득한 검데기들을 훑어내고 다시 덮개돌을 덮고 매질까지 하고보니 열손가락은 얼어서 감각을 잃을 정도였고 손등은 만두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이제 여기서 내 꿈이 꽃필거라는 희망에 마음만은 즐거웠다. 꼭 유치원을 잘 꾸려서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한어까지 잘 가르치리라 다짐하며 나는 힘드는줄 모르고 유치원 꾸미기에 정성을 쏟았다.

  10여일 동안의 노력끝에 제법 아담한 유치원이 꾸려졌다.

  그해 3월 11일 드디여 나의 이름으로 등록된 유치원이 "지력 유치원"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했다.

  든든한 경제력없이 시작한 사업이라 나는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유치원이 일정한 규모로 발전할 때까지 사람을 쓰지 않고 친정엄마와 둘이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목재가공 공장에 가서 버리는 톱밥을 실어다 석탄을 대용해서 침실도 덥히고 애들의 점심밥도 지으면서도 힘드는줄 몰랐다. 헌데 떠도는 뒤공론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저 아줌마 유치원 할 수준되나? 저 아줌마 다리 병신아니야?"

  현실은 항상 이렇게 무정한 법이다. 누구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시 중점고중을 졸업했고 장애라는 육체때문에 사범학교로 진학할 기회마저 다른사람에게 양보하긴 했어도 통신학부 공부로 사범공부를 마치고 소학교에서 우수한 교원으로 사업하였건만 사람들 눈에는 왜 약점만 보일가?

  "하늘이 내린 운명이기에 피해갈수 없는 시련이다."

  "탄탄한 실력만이 내 장애를 미봉할수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신조를 마음에 새기고 나는 우체국에가서 학전교육에 관한 잡지들을 주문해서 탐독했고 구소련의 위대한 교육자 까이로브의 저서 《교육학》도 반복적으로 읽었다. 훈춘시 교원연수학교를 통해 한국어린이 육영회에서 보내온 수십권에 달하는 전래 동화책들을 사들이고 한국 고려학원 문상주원장님에게 편지를 써서 그림과 함께 배울수 있는 《한글》교재를 지원받아서 학전반 어린이들이 우리글을 익히는 식자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밤을 패가며 그림(简笔画)그리기 련습에 몰두했다. 덕분에 우리글 자모표의 매 글자들을 대표하는 실물들을 간필화(简笔画)로 그려낼수 있었다. 아빠 얼굴을 그려주면서 [아]자를 가르쳤고 여우를 그려주면서 [여]자를 가르쳤다. 애들은 내가 그려준 예쁜 그림에 알록달록 색을 올리면서 신나게 우리글을 익힐수가 있었다. 이렇게 노력과 탐구로 실천해가는 나의 교육모식은 소학교 1학년 교재를 들고 학령전 아이들을 가르치던 다른 유치원의 교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애들이 유치원이 재미 있대요."

  학부모님들이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 말이 내게는 큰 고무가 되였다.

  차츰 한족유치원에 다니던 애들도 하나 둘 우리유치원으로 찾아왔다.

  원아들이 하나둘 불어나기 시작하자 나는 교원을 초빙해야 했다.

  먼저 영안진 중학교로 찾아갔다. 그 학교 졸업생들가운데서 사범학교로 진학해 간 한족학생들의 명단을 가져다가 학생들의 품행, 성격까지 하나하나 체크한후 유아사업에 열정을 갖고있는 관숙연(한족)을 제일 처음으로 한어교원으로 초빙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어와 한어 두가지언어 교학을 도입했다.

  헌데 어떻게 해야 애들이 재미있게 한어 공부를 접수할수있을가? 하는것 또한 난제였다. 옛날 모식대로 병음->한자->단어->… 이런순서대로 가르치는 방법은 너무 따분할것 같았다. 고민하고있을때 우연히 리양선생이 쓴 영어공부에 관한 책을 접하게되였는데 책속의 한마디의 말이 내마음을 확 틔워주었다.

  《문장 읽으면서 그속에서 단어의 뜻을 익히고 단어를 통해 글자를 익히는》 방법을 리양선생은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있었다. 바로 먼저 읽고 리해하고 그다음 글자를 배우는 방법이였다. 애들의 한어공부도 이렇게하면 될수있을것 같았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구상을 나는 주저없이 실천에 옮겼다. 애들의 생활속에서 소재를 찾아가지고 애들의 입에 쉽게 오를수 있고 될수록이면 같은 단어와 글자들이 여러번 반복되는 동요를 나절로 직접 쓰기도 하고 아동서적들중에서 수집하기도 하여가지고 재미나는 률동과함께 가르치고 그속에서 한자를 익히게 했더니 애들이 즐겁게 공부할수 있었다.

  례를 들면 (小手小手我的小手) 이와 같이 제일 간단한 률동부터 시작했다. 나는 또 나의 간필화 실력을 한자를 가르치는데도 활용했다. 그림속에 한자를 그려넣어 애들이 정감적으로 한자와 더가까와 지게하였다. 례를 들면 아기병아리를 그리는 그림공부시간에 병아리의 발을 작을《소》(小)자로 그리고 병아리의 날개를 마음 《심》(心)자로 그리고 가르쳤다. 이 방법 또한 3-4세 어린이들이 그림그리기와 놀이속에서 한자를 배울수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였다. 그리고 나는 한어수업과 조선어문수업을 갈라놓지 않고 통털어 언어공부시간이라 이름짓고 자유롭게 한어와 우리말을 구사하게 하고 한어와 조선어를 함께 가르쳤다. 례하면 "어머니"란 단어를 가르치면서 이 단어는 한어로 "妈妈"라고 쓴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두가지 언어 교학모식을 도입하기 위해 나는 한족교원들에게 내가 직접 우리말과 우리글을 한마디 한글자 배워주면서 두가지 언어교학을 할수 있는 교원 배양에도 정력을 쏟았다.

  이렇게 애쓴 보람으로 우리 유치원 애들은 학교가기전에 조선어와 한어로 씌여진 어지간한 동화책은 자체로 읽을수 있었다.

  이 기초하에서 나는 또 우리 아이들에게 예술적인 감수성을 키워주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일개 향진 개체 유치원이면서도 훈춘시 교육 계통에서 조직하는 예술절 활동에 발벗고 달아다니며 참가자격을 가져오군 하였다.

  2001년에는 유치원으로서는 훈춘시 제일유치원과 제3유치원만 참가하는 훈춘시 중소학교예술절에 억지를 써가며 참가해가지고 표현 우수상까지 받아왔다. 우리가 농촌 개체 유치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하던 주위사람들의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때 장애때문에 후줄근한 나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대체 선생의 몸 어느 구석에 예술 세포가 숨겨져있느냐?"고 물어보는 한족선생들도 있었다.

  그해에는 우리 유치원에 신동이 났다고 채방하러 오겠다는 기자의 전화가 두번이나 걸려왔다. 한입두입 건너간 입소문이 너무 과장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할가 애들의 한족말 발음만은 그리 완벽하지 못한것 같았다. 보다 우월한 언어환경이 필요했다. 나는 조선말과 조선글을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한족애들을 유치원에 받아들였다. 한족애들과 조선족애들이 함께 어울릴수 있게 되자 어린이들의 한어말수준이 제고된건 물론 적지않은 한족애들이 우리유치원에서 조선말과 글을 배워가지고 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할수있었다. 참으로 뿌듯했다. 그때 딸애를 우리 유치원에 입학시키면서 하던 어느 한족학부모의 말이 지금도 귀가에 쟁쟁하게 들리는듯 싶다.

  "언어는 사람이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과 같은데 조선족과같은 우수한 민족의 언어를 배운다면 애들의 전도에 아주 큰 도움이 될겁니다."

  하지만 한족애들에게 조선어를 배워준다는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혀와 입술로 발음이 완성되는[ㄴ] [ㅁ]와 같은 발음들은 괜찮았는데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야 하는 받침(ㄱ)소리는 정말 가르치기가 어려웠다. 2006년 여름 일곱살난 한족학생 왕로흔이가 당금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기윽받침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할수가 없었다. 한어에는 그런 발음소리가 없기때문인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족학교 교원들이 한족애들을 받았다가 간혹 애들이 조선말 교학을 접수하지 못할가봐 많이 우려하는데 자칫 그애가 입학을 거절당할가 우려되였다. 나는 그 애 앞에서 반복적으로 기윽받침이 들어간 음절자의 발음을 시범해 보이기도하고 그 애더러 손을 내 턱밑에 대게하고 내가 기윽 받침소리를 발음할때 혀뿌리로 목구멍을 막는 감각을 느껴보게 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로흔이는 끝내 정확한 기윽받침소리를 낼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한족들애들에게까지 배워주면서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지만 조선족의 자부심을 느낄수 있어 너무 뿌듯했다.

  우리 유치원에서 조선말을 배워가지고 조선족고중까지 졸업한 류영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였다. 최고의 번역가가 되는게 그애의 꿈이란다. 내가 가르쳤던 한족애들중 이러한 꿈을 가지고 조선족 학교에 입학한 애들이 무려 10여명도 더 된다 류영, 류설, 전옥걸, 손혜, 김흠, 왕로흔, 류상, 왕홍매, 왕준아, 기적, 동지매, 풍위헌 등………지금도 간혹 가다 길에서 고맙다고 선생님과같은 좋은 선생이 있었기에 애들이 한가지 언어를 더 배울수 있었다고 치하를 아끼지 않는 한족 학부모들이 있다.

  그렇듯 학부모들이 만족할수 있는 유치원을 꾸리기까지 나는 힘들고 아픈 길을 헤쳐왔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2001년의 6월 18일 나는 훈춘시 중소학교예술절에 내여놓을 무용종목에 수요되는 도구들을 만드느라 저녁늦게야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집안에는 석탄 연기가 꽉 차있었고 열두살난 아들애 혼자 구들목에 누워있었다. 다급하게 부르며 아들을 안아일으키는데도 아들은 눈을 뜨지 못하였다. 입술이 새파래진 아들을 보며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짜고짜 둘쳐업고 병원으로 가는도중 아들애는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다. 그날 공교롭게도 남편마저 밖에서 늦어지다보니 아들애 혼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자다가 봉변을 당했던것이다.

  이렇게 소름 끼치는일을 겪으면서도 나는 유치원을 접을 생각은 해본적없이 아들애를 시어머니한테 보내놓고는 또다시 유치원사업에 자신을 깡그리 바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좀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보다 자신의 업무실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한국 제주대학교 교수 허철수선생님(훈춘에 오셔서 여러번 강의했음), 연변대학 사범분원 리화교수님, 동북사범대학교수 채극신선생을 모시고 국내외의 새로운 교육리념에 대해 열심히 배움과 동시에 연변유아교육사업의 코기러기들인《6.1유치원》 《새싹유치원》《향양유치원》들을 참관방문하면서 그들의 앞선교육리념을 우리 유치원실제에 결부시켜 농촌 유치원 실정에 맞는 교육방법을 탐색하느라 모지름을 썼다. 끝내 2004년부터《구역놀이법》이란 새로운 교육모식을 남먼저 도입하여 훈춘시교육부문 지도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그 탐구과정을 적은 론문 《유치원의 구역놀이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훈춘교육》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재충전과 끝없는 책임감으로 가르친 결과 시교육국에서는 개체유치원인 우리유치원을 영안진 중심유치원으로 임명했고 나는 훈춘시 골간 교원으로 평의되였다. 2008년에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고향의 아침》프로에서 나와 우리 유치원을 소개하기도 했다.

  허나 장애인 녀인의 힘은 미약했다. 나의 노력과 심혈을 무시한채 조선족 인구의 마이나스 성장은 갈수록 심해졌다. 우리 유치원도 학생수가 줄기 시작하는데 상급에서는 보다 완벽한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유치원 표준을 제정하였다. 학생 통학 전용차까지 갖추어야 한다니 학생래원이 더 불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더 투자할수가 없었다. 2011년 4월1일 전 주적으로 마지막 조선족 향진 유치원으로 남아있던 우리 유치원도 끝내 문을 닫고야 말았다.

  유치원을 접고 훈춘시내에 들어와 거주하면서 글 몇편 발표했더니 학부모들로부터 애들의 글짓기 지도를 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어떻게 감히 애들의 글짓기 지도를 할수 있을가? 주춤거리는 나한테 막무내가로 애를 맡기는 학부모가 있었다. 나는 또 "우리말 글 짓기 지도"라는 생소한 길에 오르기 위해 먼저 시험에 참가해 소학교 교사 자격증 부터 땄다. 그런후 애들을 맡았다. 그런데 맡고보니 입이 딱 벌어질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소학교 고급학년생인데 그날 일기 쓰라해도 필을 들지 못하고 책상에 머리를 틀어박고있었다.

  한족말 언어환경에 푹 빠져있다보니 우리말을 근본 두세마디 이상 구사할수없는 상황이였다.

  앞이 캄캄해 났지만 물러설수는 없었다.

  교원이라면 "얘는 안되겠어요" 이런 말을 뱉어내서는 절대 안된다는 도리쯤은 알고있는 나였으니깐! 어려워도 가르쳐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니까!

  나는 신화서점에가서 글짓기 지도에 관한 책들을 사 가지고 탐독하며 글짓기 지도 방법을 모색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가르쳐나갔다.

  필을 댈수없는 애들에게는 먼저 필을 놓게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다음 금방 대화한 내용들을 필기장에 적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필을 대지못하는 애가 없어졌다.

  "일기 쓰기가 쉬워졌어요"

  나한테 와서 글짓기 지도를 받은 애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글짓기 수준은 하루하루 제고되는데 애들이 우리민족의 력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것이 또 마음에 걸렸다.

  세종대왕이 어떤 분인지? 안중근이 어떤 분인지? 감감 모르고있었다.

  "위인전기 좀 읽어라"

  이런 명령식 구호는 애들에게 안 먹힐건 불보듯 뻔한 일…..

  나는 내가 먼저 책을 읽고 애들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각색놀이도 조직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을 결성한 이야기를 해주고 할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는 장면을 각색놀이로 했더니 애들은 너무 재미있어 하며 여러가지 질문들을 해왔다.

  "선생님 나라를 구하는데 왜서 꼭 손가락을 끊고 동맹을 결성해야 합니까?"

  "단지 동맹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후에 어떻게 되였습니까?"

  나는 애들에게 "궁금한 점들은 너희들 저절로 책을 보면서 풀어보려므나"라고 슬쩍 독서를 권장해주었다.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 학원에서 글짓기 공부하는 애들은 륙속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조직한 엄마랑 함께하는 독후감 쓰기에서 금상, 동상도 여러차례 수상하고 독서신동 독서우수생들도 줄줄이 나오게 되였다.

  이렇게 애들을 가르치는 길에서 힘드는 줄 모르고 달려오다보니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 저 앞에서 손짓하고있는데 왜서인지 내 마음이 허무하지가 않다. 이렇게 지나온 자취들을 글로 적어 보내라고하는 분들도 있고하니 오늘도 보람은 배로 늘어가는것같다. 그저 우리 민족애들을 위한 일이라면 그냥 앞만 바라보며 달리고 싶어진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 힘차게 달리고 있다.

  거리를 메우며 달리는건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는 자가용들이지만 그속에도 인행도는 꼭 있으니 운전도 배우지 못하고 아픈 다리로 걸어다니는 나의 앞에도 길은 언제나 찬란하게 열려져있다.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이들이 있고 나한테 귀한 자식을 맡기는 학부모님들이 있는한 나의 삶에는 언제나 행복이 샘솟는다.

  흑룡강신문사는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조선족연구학회와손잡고 글짓기응모활동을 진행합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진솔한 창업이야기, 생활이야기면 누구나 도전해볼수 있습니다.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흑룡강신문사 및 조선족문학창에 발표를 합니다. 시상식은 2019년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주최하는 행사와 함께 동경에서 진행합니다. 월드로된 문장을문화교류협회 메일로(info@jkce.org)로 보내시면 됩니다.

  문화교류협회 협찬사

  1. 전일본화교화인부동산협회

  2. (주)아시안익스프레스

  3. 코코미보육원

  4. 아세아인재연구소

  5. 우현세미나

  6. 나미여행사

  7. 주식회사아이지

  8. 메리바미용복지산업연구소

  9. 쉼터물산

  10. 삼구일품김치

  11. 글로벌핸드주식회사

  12. 연아마을

  13. 류우덴무역주식회사

  14. 카바야한방연구소

  15. 주식회사에이요상사

  개인협찬

  강지현(동경)

  김광림(니가다)

  리순옥(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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