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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25] 청산처럼 창공처럼

[인터넷료녕신문] | 발행시간: 2019.11.14일 09:31



1993년 7월, 신강의 이리까자흐자치주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아동신문잡지회의에 참가한 김영금(첫줄

가운데).

녀성고급지식인들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나는 우리 나라

과학계에 우수한 조선족남성과학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였지요. 한세대, 두세대의 조선족과학자들은 공화국 창립이래 가난하고 말끔한 조국땅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불태워 과학의 성과를 이루어낸 갸륵한 지성인들이였지요.

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어요. 그들 한세대

지성인들이 이미 남겼거나 남기고 있는 유산-정신재부와 물질재부를 지금 발굴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다시 찾을 길이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되였지요.

나는 동시대 문인으로서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가지게

되였어요.

신변의 제1대

의학자‘로박사'로부터

연변사람들은 로기순(鲁基舜)이란 이름은

몰라도‘로박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 민족의 걸출한 의학박사이며 생화학전문가인‘로박사'는 벌써 35년전에 세상을 뜬

분이였지요.

천만다행으로 로박사의 가장 충실한 조수였던 유명한

진단학가 정규창교수가 생전이여서 그의 회억에 의해 ‘로박사'에 대한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였지요. 내가 의학원에 세워진 로박사의 동상 앞에서 그

위상을 우러르고 정규창 교수를 찾아갔을 때 정교수도 로문하여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조선족의 저명한

의학박사 로기순.

로기순박사는1893년 조선 황해도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였어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에 열중하였던 그는 서울의과전문학교, 일본 규슈제국대학의학부를 나왔지요.

1931년 6월에는 일본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생화학연구생으로 졸업하면서 《우리카제(뇨산산화 효소)에 관하여》, 《신생아와 임신부의 오줌 및 양수가운데의 알란토인의 함량》을 비롯한 4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일본학계를 놀래웠지요. 그가 론문에서 론술한 원리는 당시 일본의학계의 새로운 발명으로 되였고 그 기본원리는 후세의 생화학령역과

림상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였지요.

그는 독일어도 정통하여 일본 도꾜에서 꾸리는

《생화학잡지》에 이 론문들을 독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또다시 일본학계를 크게 들썽하게 만들었지요. 1932년 1월 그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어요. 이때로부터 그는 세계 유명한 생화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것이였어요.

그는 1936년 6월 중국으로 이주하여 10여년간

도문시병원 원장을 지냈어요. 1949년 4월 연변대학이 창립되고 연변의과전문학교가 연변대학 의학학부로 되면서 그는 이 학부의 제1임 학부장을

담임하였지요.

그는 친히 교단에 올라 생화학 강의를 하면서 수천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였지요. 그는 박식한 의학자로서 생화학 뿐만 아니라 병리해부, 병리생리, 약리 등 분야의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그는 의사사업에 종사한 25년간 소아과와 내과에서 고명한 진단술과 환자들에 대한 참다운 봉사태도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요.



유명한 진단학 교수

정규창.

자기 몸을 돌볼 사이 없이 의학사업에 몰두했던

로기순박사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게 되였어요.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학생들의 림상실습을 지도하였지요. 1957년 4월 1일, 연변대학 창립

8돐 기념 학술보고회를 조직할 때는 병세가 위중하여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면서도 교원들과 학생대표들을 불러 의견을 교류하면서 학술연구보고를

구체적으로 지도하였지요.

그는 마지막 림종에 이르러 자신의 유체를 학원에 바쳐

병리해부학교수에 쓰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1957년 6월 7일 22시에 로박사는 동맥경화, 뇌익혈로 세상을 영결하였어요. 6월 9일,

로기순선생을 추모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연변의학원 정원에서 추도식을 장중히 거행하였어요. 그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유체를 병리해부한

후 병이 든 부위를 병리표본으로 취하여 연변의학원 별리표본실에 진렬하였지요.

자신의 지혜와 학문을 나라와 인민에 고스란히 바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체마저 의학연구에 바쳤던 로기순박사, 해박한 지식과 고명한 의술, 숭고한 의덕으로 연변의학의 교육사업과 연구사업을 지도한

로기순박사, 그를 두고 "원견이 있고 박식하고 재능이 있는 우리의 훌륭한 스승이였으며 연변의학의 정초자"였다고 정규창교수는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요.

수도 북경의 저명한

지질고생물학자

1993년 봄날, 북경대학 지질학부대청 연구실에서

만난 안태상교수(1932년생)는 겸손하고 후덥고 넉넉하고 쾌활한 분이였어요.

연변의 돈화에서도 180리 떨어진 두메산골 청구자에서

동년을 보낸 그는 ‘청산을 좋아하고 강물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하며’고운 돌, 괴상한 돌을 옷섶에 싸안고 다니던 아이였지요.



1993년 여름

북경대학 지질학부 고생물학자 안태상교수를 취재하고.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공부시키겠다고 기어코

액목으로 이사를 나오던 아버지의 간곡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95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대학지질학원에 입학했던‘개천의 룡', 대학 4년간

고학으로 뛰면서 2학년을 다닐 때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당원, 1955년 북경시 3호 학생으로 저명한 과학자이며 문학가이며

중국과학원 원장이였던 곽말약동지의 접견을 받았던 우수 대학생…

북경대학지질학부 안태상교수는 우리 같은 평민들은

들어도 못보고 외우기도 힘든 《무척주고생물삼엽충》(三叶虫)이며 미체고생물 코노돈트(牙形石)라는 연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영국, 미국

명인연구소에서 편찬한 《세계명인록》(1988년)에 ‘세계 과학연구의 걸출한 선줄군'으로 평가받은 조선족과학자였어요.

안태상교수는 중국 코노돈트학의 개척자였어요.

코노돈트는 원시척추동물에 속하는 화석으로서 현미경 혹은 전자현미경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미체고생물학분야에 속하는데 이빨처럼 생겼다 하여

아형석(牙形石)이라고도 하지요.

안태상교수는 5억년 전 중국동부에 형성된 지층에

코노돈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코노돈트가 있는 지층에 석유가 있다는 것을 탐색해 내였지요. 1956년 이래로 이 어려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교수사업을 하는 한편 그 넒고 넓은 중국 땅을 돌고 돌면서 조사연구를 하였지요.



우리 나라 첫

녀비행기설계사 박서령과 그의 남편.

그의 연구성과는 화북지구 석회암가운데서 석유를

발견하고 중국 각지에서 석유를 개발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지요. 승리, 임구, 대항, 하료하 등 유전의 석회암개발에서 대공을 세웠지요. 또한

우리 나라 석유, 천연가스, 석탄 개발과 지질 탐사에 응용되여 인민경제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지요.

그의 연구는 1981년 이래로 줄곧 국제연구계의

앞자리에 섰지요. 그의 론저는 국제상 이 령역연구에서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되였고 중요한 학술적 가치로 국가교육위원회 1등상,

북경대학과학기술진보 1등상을 수상하였지요.

취재 도중 지도층회의가 있다고 몇번이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하지만 연변 한 끝에서 북경을 바라고 몇천리를 달려온 나로서는 모든 것을 불구하고 알고 싶은 문제에 대해 끝까지 캐여

물었지요. 안태상교수는 며칠 후면 미국, 일본, 한국으로 학술교류를 떠난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나는 다그쳐 물었어요. "석유개발에 그토록 큰 기여를

하였는데 보수는 좀 받으셨어요? "

"보수요? 우리 같이 리론연구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보수를 주자는 사람도 없거니와 받으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도 간단한 대답을 듣고 보니 괜한 물음을 한 것이 되려

후회스러웠어요.

나는 안태상교수와 기념사진까지 찍고서야 지질학부를

떠났어요.

죽음의 사신을 피해 만난 서역땅의‘산

지질사전'

1993년 6월, 나는 퇴직을 앞두고 신강

이리까자흐자치주에서 열리는 전국소수민족소년아동신문잡지회의에 참가하게 되였어요. 그 걸음에 서역의 ‘산지질사전'으로 불리우는 리정수 고급지질학자를

취재하려고 계획했지요.



신강의 ‘산

지질사전' 리정수 고급공정사.

전국소수민족소년아동신문잡지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주체측에서는 페막식에 자치주 지도자들이 다 참가하기에 오후 4시로 밀어놓고 저녁에 성대한 연회까지 베푼다며 오전시간을 리용하여 까자흐변경

홀코스통상구 유람을 배치하였지요. 즐거운 유람을 마치고 소형뻐스에 앉아 돌아오는 길에 그만 특대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였어요.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두 편집은 당장에서 뿌리워 나가

숨졌어요. 나도 6메터밖에 뿌리워나가 정신을 잃었지요. 사망자 5명 외의 나머지 10여명 중상자들은 모두 이리우의병원에서 구급치료를 받게

되였지요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뼈도 부러지고 얼굴도 다 찢겨져 온통 감싸고 있었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그 지경이 되고 보니 살고 싶지 않더군요. 며칠동안 물을

마시는 외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마침 길림에서 간 한족지원의사가 한 고향 사람이라며

나에게 퍽 친절했어요. 뼈는 끊어지지 않았고 연골만 상했으니 한달이면 걸을 수 있을 것이 라고 했지요. 걸을 수 있다는 그 말에 희망을 가지고

치료에 배합했어요.



서장 소년보사 장족

편집일군들과 함께.

전화가 통하지 않던 그때 ‘우리 집 분'은 전보를

받고 다그쳐 날아온 것이 10일만에 이리자치주에 도착했어요. 2개월간의 치료를 받고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귀로에 올랐지요. 우룸치에서

이틀을 기다려야 심양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였어요.

운신도 바로 못하면서 마음은 죽지 않아 간병을 온

남편에게 이번 기회에 리정수 지질학자를 만나지 못하면 다시는 취재를 할 수 없게 된다고 사정이야기를 했지요. 남편이 여러 곳을 뛰여 다니며 겨우

리정수 고급공정사와 전화련계를 하였지요.

늦은 저녁 때 리정수 고급공정사는 급히 려관으로

찾아왔어요. 서북땅에서 풍상고초를 겪으며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지질학자를 마주하고 보니 어쩌면 잠든 망망한 사막을 흔들어 깨우며 땅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광부같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는 오른 팔을 잘 쓸 수 없어 남편이 대신 취재를

하다 싶이 하였지요. 마침 남편과 같은 동북지질학원을 졸업한 그는 남편보다 한학년 아래 동창이였는데 서로 만나 너무나 반가와하고 기뻐하였어요.

그들은 대화가 잘 통했지요. 워낙 머리가 비상한 남편은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기억했지요.

연변 돈화지역에서 역시 째지게 가난한 동년을 보낸

그는 1955년 12월에 동북지질학원 지질탐사학부에 입학하였어요. 그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졸업을 앞두고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멀고

간고한 변강건설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하였지요. 그때 그는 산이라도 뚫고 나아갈 패기가 있는 열혈청년이였으니깐요.



1993년 여름,

뜻밖의 사고를 당한 안해를 도와 서역땅에서 취재를 함께 해 주던 남편 전춘원과 함께.

"그때는 기차가 감숙까지 통했어요. 그래서 그곳에

내려 6일동안 트럭을 타고 가서야 우룸치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비사막을 넘으면서 아무리 살펴도 인가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1962년경에야 우룸치에 기차가 통했지요." 그때의 정경을 그는 이렇게 요약해 말하는 것이였어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진지하게 이어져나갔어요. 한시간도

안되여 나는 온몸이 아파나면서 좀처럼 앉아있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그의 이야기는 지친 나를 흥분시키기에

족했지요.

그는 석유관리국에 있던 시절에 얼마나 많은 사막을

다니면서 생사고비를 넘겼는지 모르지요. 모래표면온도가 섭씨 70도를 넘는 타림분지, 활활 타는듯한 화염산, 가도가도 끝없는 얼음빙판 그 속에

묻힌 보물을 하루 빨리 파내여 나라 건설에 공헌하려는 것이 그와 지질탐사대원들의 일념이였지요.

1958년부터 신강지질국 지질광산처에서 사업하게 된

그는 우라니움 등 희유금속과 특종비금속 등 광산실무관리를 책임지고 알타이, 천산, 수정광산 등지를 답사하면서 해마다 설계임무와 설계서를

120여부씩 심사하고 비준하였지요.

1985년 그는 《신강알타이지구 국토전망계획

광산자원종합평가》과업을 책임지고 알타이 험산준령을 넘나들었지요. 야외에 장막을 치고 짐승들의 습격을 물리치면서 지하광산 저장량이

4,000만톤되는‘복해'를 드디여 발견하였지요.



생활사진 한장 없이

유일한 증명사진을 갖고 있는 연변농학원 육모전문가 김윤식 교수.

알타이지구에서 발견한 《단백토》광산의 광물은 신강에서

처음 발견한 새로운 광물종이였으며 대형광산에 속하였어요. 신강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꼬박 이틀동안 얼음 우로 40키로메터씩 걸어다니다가 얼음우에

장막을 치고 자면서 발견한 귀중한 희유금속이였지요.

청춘도 정열도 순정도 다 바친 서역땅에서의 37년,

나귀도 노새도 락타도 수레도 트럭도 찦차도 비행기도…아무튼 원시적인 운송도구부터 현대의 고급운송도구에 이르기까지 탈 수 있는 것을 모두 타면서

광활한 대지를 답사하여 신강땅에 묻혀 있는 130여가지 광물종을 손금 보듯 장악하고 있는 그를 신강의 ‘산 지질사전'이라고

불렀지요.

1992년 3월 3일, 신강위글자치구 지질자료관리처의

전체 종업원들은 고급공정사 리정수동지를 자치구 우수전문가로 일치하게 추천하였어요. 그리고 그는 이듬해에 창립된 중국광업협회 광산자원위원회에 서북

5개 성(구)의 대표위원으로 선거되였지요.

그는 국가계획위원회와 지질광산부의 직접적인 포치에

따라 《신강위글자치구광산자원 2010년 국민경제건설보증정도론증》과업을 훌륭히 완수하여 자치구전문가, 령도 평의에서 우수성과상을 수상했지요.

특히 자치구지질국 과학연구소를 책임졌던 기간에 원래

10명도 안되는 보잘 것 없는 연구소를 110여명 되는 상당한 규모를 갖춘 성급과학연구소로 발전시켰고 20여가지 연구성과를

올렸지요.

이야기는 자정까지 이어졌어요. 그는 비를 맞으며

떠나갔지요. 그가 떠나면서 하던 한마디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어요.

"언젠가는 꼭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아마도 서역땅의 귀신이 될 것 같네요."



나는 집에 당도하자 몸을 추스리는 한편 관련 자료

10여만자를 읽으며 집필에 손을 댔지요. 그리고 다 쓴 원고를 리정수 공정사에게 보내드렸어요. 나는 기사를 완성한 다음 꼭 본인들에게 먼저

보이는 습관이 있어요. 더우기 과학자들에게는 국가비밀에 속하는 것들이 따로 있기에 심중해야 하니깐요.

그때는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인지라 문의점과 함께

보낸 편지는 한달이 걸려서야 신강에 도착하였어요. 그쪽에서 보낸 답장 역시 한달이 걸렸지요. 그렇게 한 과학자를 쓰자면 시간적으로도 한두달씩은

걸려야 했어요.

리정수 공정사는 그번 취재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며

장춘으로 회의를 오면서 연길로 나를 찾아왔던군요. 그리하여 다시 만난 자리에서 완벽하게 취재를 하고 글을 마무릴 수가 있었던

것이였어요.

그외에도 우주항공연구소 고급공정사 장정자, 육모전문가

김윤식, 공군현대화척후병이며 고급공정사인 리광남상좌, 우리 나라 첫 녀비행기 설계사 박서령, 화학공업부 저명한 무기화학전문가 강태만,‘6개 나라

언어를 정통한 쏘련류학생’중국농업기계연구원의 고급공정사 오현숙, 저명한 유기화학 전문가이며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 협회 주석으로 2000여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는 강귀길교수 등 17명 자연과학자들을 취재하였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청산처럼

창공처럼》(민족출판사)이라는 실화집으로 묶어 3년만인 1995년 12월에야 드디여 출판하게 되였어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우리 후대들에게

전해준다는 립장을 고집스레 지키며 쉽고 재미있게 쓰기 위해 노력했지요.

딱딱하고 리해하기 어려운 과학명사나 술어를 쉽게

리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쓰고 소설을 쓰던 방식으로 과학자들의 련애이야기도 써넣고 수필을 쓰던 형식으로 작가의 감수를 직접 표달하기도 하고 책을

많이 읽으면서 쌓은 지식들도 얹어주면서 다양한 수법으로 생동하고 실감나게 이야기들을 엮어냈지요.

상처입은 육체적 고통과 외국어로 된 자료뭉치,

첨단과학학술론문자료를 안고 자신의 지식부족과 무능함을 탓하며 속으로 울어야만 했던 나날들, 가지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드디여 완성한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 실화집 《청산처럼 창공처럼》은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위원회의 추천도서로 되였어요.

뜻밖으로 여러 학교들에서 이 책에 오른 주인공들을

둘러싼 주제반회의를 열고 많은 중소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청산처럼 창공처럼》을 읽는 붐을 일으켜 정말 고생한 보람을

했지요.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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