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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0.08.26일 10:15
(흑룡강신문=하얼빈) 2019년6월 6일 나는 간직하고 있었던 조선족학교 공인(公章), 학교당지부 공인(公章), 학교재무 전용공인 등과 함께 기타 증명서류를 들고 현교육국 국장사무실로 향했다.

교육국 국장은 그동안 수고 많았었다며 교육국당위원회 조직위원을 불러 모든 공인을 넘겨받게 했다. 증명싸인을 받고 국장사무실을 나오는 나의 심정이 홀가분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껏 조선족학교 교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항상 신경을 도사려 제발 아무 일이라도 일어 나지 말기를 바라며 근심반 기대반 버텨온 나날들이 이제는 추억거리로 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

2017년 10월에 현편제개혁위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학생래원이 없어 문을 닫은지 거의 10여년 되는 현조선족학교를 철회시킨다는 정식 문건을 발부했다. 그후 거의 반년동안 여러가지 철수서류 수속을 밟다보니 응당 일찍 상급 주관교육 부문에 바쳐야할 학교의 공인을 모든 인계수속을 마친 오늘에야 바치게 된 것이다. 조선족학교의 책임자로서의 사명감도 이제는 막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보다.

2006년 3월 1일 내가 조선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도에 전현의 조선족중소학교를 합병하여 현성으로 옮긴지 6년철을 맞으면서 학교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페교의 위기에 놓이게 되였다.

학교의 원 교장과 교원들간의 모순이 하늘까지 치달아올라 몇몇 교원들이 교장을 검찰원에 고소하고 대량의 젊은 교원들이 교원직을 버렸다. 한해에 10명이나 한국과 일본으로 떠나가고 학부모들은 학교를 믿을 수 없다면서 애들을 다른 학교로 보냈다. 교원과 학생 래원의 대량류실로 하여 9년 일관제 학교가 2003년에 초중부가 없어지고 2006년에는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두개 학급밖에 남지 않았다.

문제가 심각했다. 현정부에서 나서서 전현 범위에서 조선족학교 교장을 공개 초빙 하기로 했다. 허나 신청한 인원미달로 정상적인 초빙절차를 진행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정부에서는 조선족학교 교장임명 임무를 현교육국에 내렸다.

2006년 2월, 교육국 국장이 나를 호출했다. 국장사무실에 들어서자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가 이렇게 허무하게 문을 닫을 수 없지 않냐며 학교 책임자로 나설 수 없겠냐고 상냥 반 엄포 반으로 나를 설득하기에 힘썼다.

학교가 이렇게 억망이 된 것을 뻔히 보면서 내 재간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다른 훌륭한 분을 찾으라며 거절했다. 내가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 지 않으니 책상을 두드리며 당신이 공산당원이 맞냐고, 왜 상급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 않냐고 으름장까지 놓았지만 나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그때 나는 학교의 당지부 부서기 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 국장실에 불러 갔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자 주관 인사업무를 책임진 부국장이 교육국 인원들을 인솔해 학교로 내려왔다. 몇날 며칠이고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교원들과의 담화는 물론 교원대회를 소집하고 교원들의 의사와 의견을 집중해서 교원들가운데서 교장을 임명하기로 했다. 여러가지 정책과 문건전달은 물론 전현의 유일한 조선족 학교가 이렇게 없어질 수 없지 않냐면서 민주 투표의 방식으로 교장 후선인을 뽑고 후선인 가운데서 득표수에 따라 교장을 임명하기로 했다.

세명의 후선인이 투표로 산생되였다. 3명의 후선인을 두고 재 투표가 시작했다. 30명 재직교원들중에서 21표가 나에게로 집중되였다. 전현의 공개 초빙때도 이름을 신청하지 않았고 국장사무실에 여러번 불려가 국장의 으름장에도 허락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21명 재직교원들의 민주투표 앞에서는 굳게 먹었던 마음을 내려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때론 약해지는 경우가 있구나 하는것을 그번 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쩔수 없이 투표 결과에 승복하면서 이렇게 나를 믿어 주는 교원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못하겠다고 거절할 수 없었다. 대다수 교원들이 나에 대한 믿음, 이것 하나로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일념에 학교의 일상업무부터 틀어쥐고 2006년 3월 새학기를 맞이 하게 되였다.

허나 개학은 했지만 곤난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우선 학급은 적은 반면 교원들이 남아돌아 교수임무를 맏길 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하여 50세이상 교원들은 자신이 신청하고 한달에 얼마간의 비용을 받고 집에서 휴식하라고 한 반면 젊은 교원들은 무조건 교학 임무를 맡기고 과당교수 시간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일정한 보수를 주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하니 서로 교학 임무를 맡지 않으려던 교원들도 입을 다물었다.일단 교수담당 인원 배치가 끝나자 몇년간 끌어오던 교원들의 로임 지불 문제와 의료보험 가입문제를 해결했다. 조선족학교가 현성으로 합병되면서 현에서는 개혁이랍시고 전현적으로 우리학교를 시점으로 현 재정국에서 교원들의 로임가운데서 70%는 개인의 로임통장에 입금시키고 나머지30%는 학교로 내려보내여 교수 임무량과 완성도에 따라 수당을 지불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의견이 많았다. 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 현교육국과 현재정국에 보고를 제출해 100%의 로임을 교원들의 개인로임통장으로 입금시키게 함으로써 개개인의 리익을 최대한으로 지켜주었다.

의료보험 문제도 그렇다. 전임 교장과 의견차이가 있던 몇몇 교원들이 불동의로 하여 다른 학교에서 몇년전부터 가입했던 의료보험도 유독 우리 학교만은 신청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상급의료보험국에서는 단위사람들 전원이 동의해야만 의료 보험 신청을 받아들였기에 의료보험 가입이 막혀 있었다. 나는 교원대회를 소집하고 의료보험의 필요성과 금년부터는 누구를 물론하고 의료보험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으며 의료보험에 참가한다는 동의서에 싸인하게 했다. 하여 그해부터 의료보험을 참가했기에 다행이라 할가 큰병으로 하여 입원했던 몇몇 교원들이 제때에 의료비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런 혜택을 보니 처음에는 나의 처사에 마뜩잖아 하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학생은 적고 교원이 많이 남아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0세 이상되는 분들을 동원해서 날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달에 200원씩 학교에 들여 놓고 그 돈은 교수에 참가하는 교원들의 시간수에 따라 배당시켰다. 허나 그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나가는 사람은 한달에 내는 돈이 아까와 출근하겠다 하고 학교에 남아 교학임무를 맡아야 하는 젊은 교원들은 우리가 그 돈을 낼테니 잠시 집에서 쉬는 년세 있는 그들보고 출근하라며 서로가 언성을 높였다. 단순히 나를 골려주자는 것 같기도 했다. 년세가 있으면서 견결히 출근하겠다는 몇몇 교원들에게는 숙질실 당직을 서게끔 배치했고 젊은 교원들한테는 무조건 교수임무를 맡겼다. 학급이 적다나니 교수 임무가 적었지만 서로서로 눈치를 보아가면서 적게 하려고 했다. 하여 시간당 보조금을 늘였더니 한달후에는 점차 사그라 졌다. 이렇게 첫발작을 힘겹게 내디디면서 교장으로 취임해서 개학 첫 한달을 보냈다.

교수는 교무주임한테 맡기고 나서 어떻게 하면 학생래원을 보장할 수 있을가 하는 생각에 현 산하에 있는 마을을 돌면서 촌간부들과 학부모들을 방문하고 학교가 이제는 안정이 되였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학교로 보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학급담임들을 동원해서 남아있는 학생들에게 더욱 많은 사랑과 관심을 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후 여름방학이나 겨울 방학때마다 학교지도부 성원들과 학급담임들을 동원해 각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학부모들의 마음을 안착시키기에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한족 령도들과의 소통도 소홀이 할 수 없었다. 무릇 잘 알든 모르던 일단 교육국의 어느 령도나 직원의 집에 경조사가 있을 때면 무조건 참가해서 얼굴을 익혔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해마다 맞는 음력설이라 해야겠다.

학교를 합병하면서 기초시설건설을 하면서 전임이 나한테 남긴 학교빚이 거의 50여만원이나 되였다. 한족빚군들은 평상시에는 전화로 빚독촉을 하다가도 음력설 전후에는 사무실이나 심지어 집에까지 찾아와서 빚독촉을 하군 했다. 사실 내가 진 빚도 아닌데 하면서 버티기도 했지만 그들한테 잘 먹혀들지 않았다.

교육국에서 해마다 학교에 내려 보내는 경비도 학생수와 교원수에 따라 정해졌기에 일상 사무와 년말에 드는 난방비를 지불하고 나면 빚갚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교육국을 제집 드나들듯하면서 국장을 조르다싶이 해서 얼마간의 경비를 더 얻어와서 바쁜 대목을 막기도 했다. 허나 그것으로 어림도 없었다. 그후에 다행으로 나라에서 의무교육단계 학교건설을 위해 짊어진 채무를 갚아주는 좋은 정책으로 하여 몇 번에 꺾어서 50여만원의 채무를 청산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음력설이 되면 간혹가다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거나 집문을 두드리면 그때의 빚군들때문에 마음을 조아리던 때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학교의 일임자 자리가 그렇게 쉬울 수 없었다.

2008년 3월, 개학날을 맞아 나한테는 최대의 위기로 다가왔다. 교원들과 함께 출근해서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전 9시가 다 되도록 학생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무주임과 학급 담임들을 불러 웬일인가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방학에 학부모회의를 열고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할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허나 현실은 너무 랭혹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몇몇 학부모들이 교무실로 들어섰는데 학교에 찾아온 목적은 교과서를 타러 왔다는 것이다. 언제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는 학교에 더는 보낼 수 없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였다. 학부모들이라 해봤자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임에야. 학생을 학교에 보낼 수 없는 반면 다른 학교에 가더라도 교과서만은 필요해서 찾아왔다고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이러는 학부모들이 렴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야속하다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허나 어떤 학부모인들 귀한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그들 말대로 학교는 풍전등화마냥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현실에서,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교무주임을 불러 교과서를 내여주라고 부탁한후 현교육국에 학생이 없어 개학할 수 없다고 소식을 알렸다.

개학 날을 맞이했지만 학생이 없는 개학날, 너무 처참했다. 교육국의 령도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한 듯 비록 학생은 없지만 교원들은 정상적으로 출근하란다. 이때로부터 학생이 없는 학교 지키기가 시작된다. 그것도 우리 조선족교원들을 다른 학교로 분류하기까지 장장 5년, 학교 이름을 취소할때까지 9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와 교원들 지키기 위한 ‘혁명’이 시작되였다. 첫학기에는 출근이랍시고 학교에 나오던 교원들은 슬슬 눈치를 보아가면서 한두명씩 한국이나 일본으로 나가서 돈벌기를 시작했다. 교육부문에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척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누구든지 고발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해마다 개학철이면 혹시 교원들이 손해라도 볼까봐 국제전화를 걸어가면서 학교에 등교하라고 소식을 알렸는가 하면 학기중에도 가끔 현 인사국에서 출근 상황을 조사할 때도 항상 마음을 조아리면서 제때에 소식을 알려 피해를 보지 않게 했다.

허나 나의 이러한 고심을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어떤 교원들은 별로 일도 없으면서 오라고 한다면서 뒤에서 불만을 늘어 놓는 것이였다. 혹시 검사에 걸려 로임이 못오르거나 년말평의에서 불합격 되여 피해를 볼까봐 자기돈을 팔면서까지 국제전화로 알린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돈벌이에 영향을 받게 되고 오가는 항공료에 번 돈을 다 써버린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그들을 위해 입막음은 물론 얼마나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그들은 몰랐다.

학교건물과 교학시설을 지키기 위해 한족 당직을 세워놓았지만 해마다 설날은 학교에서 잠을 자면서 상급의 검사를 응부한 일이 얼마인지 모른다. 해마다 봄철이면 지세가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건물의 양철지붕이 세찬 바람에 날려갈까봐 항상 신경을 기울여야 했고 겨울철이면 학생은 없어도 난방을 끊을 수 없어 불을 때야 했기에 혹시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하여 발편잠을 잘 수 없었다.

명색이 소수 민족학교라 아마도 쉽게 조선족학교단위(机构)를 없앨 수 없었는지 해마다 교원들의 배치 때문에 교육국이나 민족종교사무국에 철회보고를 써서 바쳐도 그냥 기다리라는 애매한 대답만 들려올뿐 가타부타 다른 확답이 없었다.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오다가 드디여 2013년 11월에야 현 기구편제위원회에서 조선족학교 기구이름은(机构) 계속 보류하고 몇몇 교원만 남겨두고는 대부분 교원들을 다른 한족 중소학교로 분류시켰다. 매일이다싶이 마음을 조아리면서 교원들의 배치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이렇게라도 해결할 수 있어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학교도장이 찍힌 사업조동서류를 넘겨 받으면서 어떤 교원들은 마치도 부모곁을 떠나 시집장가 가는 심정이라면서 새로운 환경에 가서 적응할 수 있을지 하는 근심반걱정반의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는 그들의 심정을 다독여주기 위해 어디에 가서든지 열심히 일하면 자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고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렇게 대부분 교원들의 배치문제가 해결된 후 또 5년이라는 어렵고 긴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면서 2018년10월에야 드디여 조선족학교의 모든 취소절차를 매듭짓고 현기구편제위원회의 동의를 거치고 할빈시 정부판공실의 비준(조선족학교가 부과급단위(副科级单位) 였기에 할빈시정부 판공실의 비준이 있어함) 을 거쳐서 학교이름을 취소하게 되였다. 그사이에 원학교의 퇴직교원과 재직교원들의 로임인계, 양로보험, 의료보험 수속, 학교 고정자산 처리수속 등을 긴 시간동안 밟아오면서 내내 눌려오던 모든 짐을 드디여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 조선족교원들이 나에게 보냈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내가 들인 노력과 희생한 대가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 믿음 하나 때문에 그들에게 최선의 선택을 해주기 위해 내가 흘린 땀과 눈물을 어느 누군들 알아주랴, 나의 이런 말없는 희생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속으로야 불만이 많았겠지만 내가 힘들어 할까봐 내색하지 않고 홀로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안해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외지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있는 딸애에게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항상 걸린다. 허나 어떻게 하랴? 만약 내가 스스로 포기하고 학교가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은 후 나 몰라라 다른 교원들처럼 외국으로 나갔다면 지금 나를 포함한 우리조선족교원들은 어떻게 되였을까? 교장으로 임명 되여서 오늘까지 지내오면서 듣기 거북한 말로 하면 남의 뒤시중만 해온 13년 세월, 내 인생의 황금기를 이렇게 보냈다.

30대후반기로 부터 40대의 좋은 황금 세월 말이다. 그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믿음 때문에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깐. 세월이 흘러 먼 훗날 내 삶을 돌이켜 볼때 그래도 그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해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장으로서의 사명감, 이를 말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들인 노력을 다시 한번 자부해본다. 그만하면 누구한테나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감은 남았겠지만 후회는 없다고.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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