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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문화의 잠재지에 몸을 담근 희곡예술가 리종훈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21.06.21일 15:33



희곡예술가 리종훈.

  20세기 90년대, 당시의 중국 연극계 위기 상황을 뚫고 중국 희극계의 정수로 평가받은 연변연극단의 장막 희극 〈털없는 개〉가 남긴, 아직 쇄신을 모르는 기록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털없는 개〉, 1991년 3월부터 시작된 연길 공연의 첫막으로부터 시작하여 346일 동안에 무려 450회를 무대에 올렸고 100만원 이상의 총수입을 올렸다. 이는 연변연극단 창단 50주년이래 최고봉을 이룬 연극이다.

  이 극은 국가 문화부 최고 무대예술상인 ‘문화대상’과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조우극본상’을 비롯하여 전국 소수민족 제재 극본 창작 ‘특별상’, 제6기 전국 ‘우수 극본상’, 제1기 전국 조선족 진흥컵 ‘우수배달문예상’, 제2기 동북연극절 ‘극본 창작 1등상’, 제3기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길림성 순회공연 ‘창작 극목 1등상’,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상을 받았다. 동시에 극본 〈털없는 개〉는 《전국 도서 경전고》에 오르는 영광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 열린 국제연극절에 참가하였고 해외 공연(한국)도 실현했다. 선후하여 장춘연극원, 중앙실험연극단, 신강연극단, 산동연극단 등 한족 전업 예술단체에서 〈털없는 개〉를 한어로 번역하여 공연하였고 한국의 연극인들에 의해 한국에서 재창조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중국 조선족 연극사의 기적이였던 이 장막 희극은 중국 조선족 연극계의 거장인 배우 리영근과 최인호 연출의 대표작으로도 각인되여왔다.

  하다면 장막 희극 무대 뒤에 숨어있는 〈털없는 개〉의 센세이숀을 일으킨 장본인은 누구였을가.

  북 치는 소년의 개그맨 기질

  1947년 훈춘 량수진에서 부친 리제홍과 모친 최채금의 큰아들로 태여난 리종훈, 후날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주머니와 눈물샘을 자극하는 유능한 희곡작가로 성장하리라곤 그 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래밭과 강물가에서 뒹굴며 놀다가 밤이면 주인없는 오이밭과 참외밭을 들락거리며 보냈던 철없는 개구쟁이 종훈이가 로인독보실에 드나들기 시작한 때가 여덟살 무렵이였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달려가는 그 곳에는 흥겨운 퉁소 소리에 맞추어 성수나게 북을 치는 로인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참새잡이에 혼을 빼앗겨있어야 할 시간에 퉁소가락에 맞추어 으쓱으쓱 어깨를 들먹이며 어느새 손도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어린 종훈이가 로인들 속에 끼여있었다. 로인들이 담배쉼을 할 틈을 노렸다가 슬그머니 북채를 쥐고 제법 흉내를 내보군 했던 종훈이는 그 때 벌써 북장단의 리듬을 눈으로 훔쳤고 몸으로 기억했다.

  그 때부터 종훈이는 음악이 흐르기만 하면 어디에서든지 몸으로 리듬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닫이문과 밥상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책상을 두드리다가 선생님의 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훈이는 훈춘현문예경연대회에 량수대대의 대표로 참가했다. 퉁소를 부는 40대의 중년 사나이와 북 치는 13살 난 신동의 흥겨운 무대가 관중석을 춤판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종훈이의 첫 무대가 된다.

  연극과 영화에 대한 어린 종훈이의 호기심 또한 도를 넘을 정도였다. 욕심같아서는 연극이든 영화든 죄다 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네자식에 할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어머니에게 매번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그가 고안해낸 방법은 가짜 영화표였다. 물론 실패였다. 그나마 영화관 굴뚝으로 기여들어가는 구들고래쥐 작전과 영화관 변소 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변소 작전은 거의 성공했다.

  힘들게 본 영화나 연극은 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극중 인물들은 늘 그의 유머로 다시 태여났고 스토리 역시 종훈이식 개그로 다시 살찌군 했다. 동네 또래들은 물론 터밭에서든 논밭에서든 어른들은 종훈이만 보면 웃겨보라고 했다. 오락의 수단이 제한되여있었던 그 시절에 동네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훈이는 이름만 들어도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의 존재였다. 종훈이의 덕에 어른들은 배를 그러안고 한바탕 웃고 떠드는 것으로 여름 한철 땡볕의 지루함을 견디였을지도 모른다.‘아이풍각쟁이 종훈'이로 불리운 그는 그 때 이미 편벽한 시골 마을에서 아마츄어 코미디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연을 마치고.

  웃음을 생산하고 싶었다

  종훈이가 가는 곳에는 늘 웃음이 생겼다. 옛 저작거리의 만담군을 련상시켜주는 어린 종훈이에게는 구연(口演)의 유능함이 있었다. 그가 1인극을 하기 시작하면 남녀로소 할 것 없이 그의 몸짓과 유머에 포복절도했다. 딱히 그 때의 그 감각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여러 사람을 웃게 만드는 일의 즐거움을 익히게 된 종훈이였다. 그는 차츰 웃음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하지만 문학서적을 읽는외의 공부에는 전혀 뒤전이였던 종훈이는 중학교 시험에 실패하고 웃음 생산과는 거리가 먼 량수농중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콩밭이거나 논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였다. 학교를 졸업해도 소궁둥이나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종훈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비끼기 시작했다.

  1962년 7월말, 장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 어머니는 조선의 주을 경성중학교에 그를 보냈다. 좀더 열심히 공부하면 밭고랑 신세는 면할 것이라는 바람에서였다. 열여섯살 난 종훈이는 그 곳에 가서도 학교 문예써클대에서 북을 쳤고 문예 활동이나 오락 야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의 경극을 기해 폭소를 자아내군 했다. 1964년 3월, 졸업을 앞두고 전기전문학교와 함흥예술학원 입학통지서를 동시에 받게 된 그였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다시 량수농중에 돌아오게 된다.

  제방뚝을 쌓는 일, 한여름 논에서 초기를 미는 일, 조밭 기음, 콩밭 기음…모든 농사일은 쉬운 것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동안 어머니와 같이 닭무리에 오리새끼가 끼우듯 아줌마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익혔다. 신기하게도 매일 그 험한 농사일을 하면서도 아줌마들은 어린 종훈이로서는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할 우스개를 주고받으며 신나게 일축을 내군 했다. 가물에 땅은 입을 벌려도 아줌마들의 웃음은 고갈될 때가 없었다.

  그 때는 어린 종훈이가 배고픔도 목마름도 잠시 나마 잊게 하는 웃음의 중독성을 깨달은 시기였다. 웃고 있는 사람이 제일 행복해보이기 시작한 그 때부터 리종훈은 편벽한 시골에서 밭고랑을 타고‘어떻게 하면 사람을 웃길 수 있을가’만을 고민했다. 량수촌에서의 생활은 그의 창작 인생에서의 비옥한 토양인 셈이다. 그 곳에서 그가 진정한 의미의 코미디언의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리종훈 코미디의 고향은 량수대대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후에야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아줌마들의 걸죽한 롱담들이 후날 그의 작품에서 빛을 볼 때가 많았다.

  1966년 량수농중을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길림성재무학교에 추천받은 리종훈이였지만 개학 날자를 십여일 앞두고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 때부터 아예 량수촌에 생활의 뿌리를 내린 그는 량수대대 문예공연대의 골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자나 깨나 대본을 구상하고 어떻게 해학적으로 표현할가만을 궁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가상한 노력 덕분에 3년 후에는 량수 국영 오지공장 문예대원 모집에 첫 사람으로 뽑혔다. 농민이 월급쟁이 로동자로 뽑히다니 꿈만 같았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주임으로 사업하고 있던 이모님이 조선 특무로 몰리우는 바람에 온 가족이 조선 특무를 비호했다는 억울한 루명을 썼다. 그는 다시 생산대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 때는 모든 것을 묵인한 채 꾸벅꾸벅 열심히 일만 해야 했던 시절이였다. 집집의 변소를 돌아다니며 인분을 퍼내는 일과 요강통의 배출물을 받아오는 일이며 수직 몇십메터 되는 생산대 탄광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내는 일이며 산장에 들어가 아름드리 나무를 채벌하여 소발구에 싣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아찔아찔한 일이며 해보지 않은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울울창창한 수림 속에서 매일 새벽이슬을 밟으며 소를 몰았던 리종훈은 각양각색으로 우짖는 산새들의 소리에 매혹되군 하였다. 때론 골짜기 따라 흐르는 벽계수에서 노니는 산천어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면서 숨 쉬는 자연을 만긱했다. 후날 그가 창작하고 직접 출연한 만담 〈새소리ㅡ호부리쯔〉에서 나오는 ‘뻔들이, 뻔들이’, ‘삣쭁삣쭁 삘리리리리’, ‘호ㅡ부리쯔, 호ㅡ부리쯔’가 바로 그 때 그 수림 속에서 받은 계기로 창작된 것이다.

  당시 연변연극단의 원로 배우 허동활선생과 극작가인 홍성도선생, 배우 백종철선생이 하향 간부로 량수공사에 내려왔었다. 무대에서만 뵈였던 예술가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면서 구연 예술의 매력을 피부와 감각으로 느꼈다. 1971년 전 현 농촌문예경연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량수문예대는 백종철선생이 창작하고 지도한 연극 〈박대장〉으로 우수 공연대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박대장〉은 순 농민 배우들이 출연한 첫 연극으로서 관중들의 대절찬을 받았다. 아마 그것이 리종훈이 희곡에 눈을 뜨게 된 계기일지도 모른다.

  문예대의 공연이 끝나면 또다시 농민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4년간 몸을 담그었던 우사는 리종훈의 창작 무대이기도 했다. 소여물을 주면서 쉑스피어를 읽었고 20여마리의 소들을 상대로 챠플린의 흉내도 내보았다. 그 때 짬짬이 썼던 작품들인 단편소설 〈논벌의 동음소리〉, 〈새봄〉, 〈열의〉, 실화 〈혈육〉, 단막극 〈다시는…〉 등이 1974년에 선후하여 《연변문예》 월간지에 발표되였다.

  1977년 조선 특무 혐의 때문에 박탈당했던 오지공장 로동자직이 회복되면서 다시 공장 문예대를 이끌게 된 리종훈은 막혔던 물줄기가 터지듯 희곡 창작에 열을 올렸다. 삼로인 〈오구랑령감〉, 〈좁쌀로친〉, 노래극 〈사돈보기〉, 단막극 〈그녀가 온 날〉, 무언극 〈낚시질〉 등 생활 속에 바탕을 둔 웃음과 울음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찌르고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린 수많은 작품들은 로동자들의 공감과 웃음을 동시에 불러일으켰고 열띤 화제로 되군 했다. 그 때 창작된 재담 〈짝〉, 〈네 탈 내 탈〉, 〈보도록 곱네〉가 1979년 연변인민방송국 음력설 문예야회 프로에 선을 보이기도 했다.

  1980년 봄, 당시 훈춘문화국 부국장이였던 작곡가 임영호선생의 강력한 추천으로 훈춘예술단에 전근한 리종훈선생이다. 달리는 말이 날개를 얻은 셈이였다. 전문 예술단체의 일원이 된 리종훈선생은 배우와 관중, 희곡과 무대의 련대 속에서 마음껏 창작과 연기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오래동안 품어오던 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예술단의 배우 겸 창작원이였던 그는 입단한 직후에 장막극 〈두부장사〉에서 주인공인 두부장사 총각 역을 원만하게 연기해냈을 뿐만 아니라 준비된 자의 자세로 장막극, 재담, 삼로인, 단막극 등 여러 형식의 희곡을 쓰고 연기해냄으로써 희곡작가의 자리와 표현예술가의 자리를 다졌다.

  그 후 훈춘시문화국 전직 창작원, 훈춘시문화관 문예부 주임, 훈춘시문체국 창작실 주임을 력임하는 동안에 창작된 〈도장〉, 〈바람 타령〉, 〈신세타령〉, 〈의사 교환〉, , 〈암병환자〉, 〈열두번째 로친〉, 〈쾌속복장〉, 〈백치부부〉 등등은 각기 전 주 2등상과 전성 3등상을 수여받았다.

  중국희곡가협회 회원, 연변희곡가협회 리사, 연변구연가협회 리사인 리종훈선생은 1993년 길림성정부에서 수여한 ‘대공 1차’ 영예와 더불어 1997년에는 ‘길림성 특수 기여 중청년 전업기술인재’에 선정되여 《중국 전업기술인재 명전고》, 《당대 중국 조선족 인물록》 등 여러 기록지에 수록되였다.

  여생을 북과 함께

  1999년에 퇴직한 리종훈선생은 희곡집 《털없는 개》와 구연소품집 《새소리ㅡ호부리쯔》를 출판하였다. 재작년까지 훈춘시 소품야회(1회부터 6회까지) 총연출을 맡아온 그는 요즘 북 치는 연출가로 우리의 민간 전통 예술의 보급과 전수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지도를 맡은 훈춘시상록수예술단은 전국 음악, 무용, 기악 길림지구 선발 대회에서 북표현 금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총지도를 맡고 있는 훈춘시 밀강퉁소대 중심에는 늘 혼신의 정력으로 북을 치는 그가 있다.

  평생 코미디를 떠난 적 없는 리종훈선생이지만 그의 인생 자체는 그닥 코믹스럽지 못했다. 2016년 간암 3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며 웃음 자체를 잃을 번했던 그다. 다행히 요즘에는 한국 서울대병원 림상실험치료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보고 있는중인 그, 아마도 평생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해온 덕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암치료중이던 2018년, 한국과 훈춘 사이를 오가면서 훈춘시예술단의 3.8절 가무소품야회 총연출을 맡았을 때 “딱 한번만 무대에 올라달라”는 뜬금없는 예술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채 링게르주사를 맞으면서 무대 공연을 원만히 마친 그, 70세를 넘은 고령의 자기가 공연이 끝나기 바쁘게 걸상에 풀썩 주저앉아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하는 와중에도 관중석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에 그토록 행복했었다고 추억하는 리종훈선생이다.

  “뉘엿뉘엿 해 지는 석양빛 저녁길에 보짐을 싸는 나그네마냥 이젠 마음도 넉넉해지고 느슨해집니다. 가슴으로 삶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습니다.”

  여덟살 때에 마을 독보조 로인들의 퉁소소리와 북소리에 뛰기 시작했던 가슴이 여태 식지 않았다는 리종훈선생은 앞으로도 계속 전통 예술의 마당에 몸을 담그고 살아 움직임이 지탱되는 날까지 훈춘에서 유일한 ‘사물놀이 풍물예술단’의 장단 지도를 해주고 싶다고 민간예술인의 포부를 밝혔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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