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 상가 밀집지대 진화과정서 허점 드러나
[동아일보]
31일 오전 6시 43분 서울 종로구 관수동 서울극장 뒤편 상가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소방관 184명과 차량 54대가 나섰지만 불은 상가 내 식당과 상패 제작·판매소 등 17곳을 태우고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꺼졌다. 불이 난 상가는 좁은 골목길 안에 있어서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었다. 다행히 골목길 입구에서 물을 뿌릴 수 있었지만 만약 불이 더 골목 안쪽에서 발생했을 경우엔 속수무책이었을 상황이었다.
이날 이런 골목길 화재에 대비해 도입한 ‘골목형 소방차’는 출동조차 못했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는 좁은 골목길로 신속하게 진입할 수 있는 골목형 소방차 두 대를 종로소방서와 동작소방서에 배치해 1월 10일부터 시범운영 중이다. 당시 시 소방재난본부는 “골목형 소방차는 일반 소방차보다 폭이 좁고 길이는 3m가량 짧아 기동성이 뛰어나다. 일반 소방차에 비해 물 담는 공간이 작지만 특수장비를 실어 골목길 화재를 초기에 진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범운영 결과에 따라 다른 소방서로 확대 배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지만 정작 골목길 화재가 발생하자 출동조차 시키지 않은 것이다. 종로소방서는 이날 “소방관이 부족해서 출동시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큰 불이었기 때문에 초기에 많은 양의 물을 빨리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고가차, 펌프차, 물탱크차 등에 우선적으로 인원을 배치하다 보니 정작 ‘골목 화재’에 가장 신속히 도달할 수 있다는 골목형 소방차 투입에 필요한 소방관 인력이 없었다는 것. 골목형 소방차는 운전기사를 겸한 소방대원 2명이 맡는다.
나머지 한 대를 보유한 동작소방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동작소방서 관계자는 “현재까지 골목형 소방차 출동 건수는 총 23건이다. 그러나 대형 화재 출동 시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배치할 인원이 없어 7월 이후에는 한 번도 출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화재 현장을 방문했던 시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골목형 소방차가 들어가기에도 좁은 길이었다”며 “큰길에서 2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아 일반 소방차량을 이용해서 진화해도 충분했다”고 해명했다. 소방당국은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15번 출구 앞 편도 4차로와, 화재 지점에서 약 80m 떨어진 종로18길 등 두 곳에 소방차량을 세워두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처음 불이 난 식당 바로 옆 상점 주인 A 씨는 “스타렉스 승합차 정도는 우리 가게 바로 앞까지 들어와 물건을 내려놓고 간다”고 했다. 실제 A 씨의 가게 앞 골목길은 큰길에서부터 점점 좁아져 가장 좁은 곳의 폭이 약 2.3m였다. 스타렉스를 개조한 골목형 소방차의 폭은 1.93m. 골목형 소방차가 출동했으면 불이 난 상가 바로 앞까지 진입할 수 있었을 폭이다. 일반 소방차량의 폭은 대부분 2.5m이다.
소방당국은 “좁은 길에도 신속히 출동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며 소방공무원이 낸 창의아이디어로 만들게 된 골목형 소방차를 스스로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