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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7)—태원해방에서 위력 떨친 포병부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3.16일 08:59
1949년 2월 3일 천진이 동북야전군에 의해 공략된후 북평도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역 전선지휘부에서는 이날 성대한 북평입성식을 진행하였다. 원 동북민주련군 3종대 7사였던 동북야전군 40군 118사가 영광스럽게 입성식대렬에 참가하게 되였고 동북야전군 41군이 북평위수임무를 맡게 되였다.

40군 118사 장병들은 형제부대와 함께 영정문(永定门)으로 입성하여 천안문광장앞 전문(前门)을 지나며 전루(箭楼)에 오른 전선지휘부 총지휘자들인 림표, 라영환, 섭영진의 검열을 받았다. 우렁찬 군악주악속에서 그들은 3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보무당당하게 입성하였다. 길량쪽은 환영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모택동주석과 주덕총사령의 초상화를 들고 붉은기를 휘날리며 입성하는 이 강철의 대오를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소리높이 만세를 불렀다.

입관 공고모범영웅칭호를 수여박은 156사 466퇀 2영 지휘원들.

북평을 평화적으로 해방함에 따라 평진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따라서 국공량당의 최대결전이였던 료심전역, 회해전역, 평진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났고 인민해방군은 150여만 국민당군 정규군을 소멸함으로써 전국해방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놓았다.

료심전역으로부터 평진전역에 이르기까지 숨돌릴 사이도 없이 수천리를 전전하면서 싸워온 동북야전군 장병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들은 주둔지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면서 휴식과 정돈에 들어갔다. 모두들 오랜만에 고기를 나누어 가졌고 술도 분여받았다. 하지만 동북야전군내 조선족장병들은 무엇으로도 대체할수 없는 《김치》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을 그리고 혈육을 그리면서 몇년간 싸워온 그들은 김치라도 있어 고향생각을 달래고싶었던것이다.

연변에서 답사하던중 43군 156사 전사였던 정관채로인한테서 북평해방후 《5분간 김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5분간 김치를 어떻게 하는지 아시오? 배추를 썩썩 쏠아서 거기다 초를 툭 치고 거기에 소금을 툭 치고 고추가루를 툭 치고 그러면 조금 있으면 시쿠룸하게 김치맛이 납니다. 그래 기분좋게 바가지로 술 먹고 바가지로 술을 먹을 때 5분간 김치를 꼭 해 먹어야 됩니다. 그때 술 많이 마셨지요. 해방이 되고 북경도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깐 어찌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안되여 출발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전사들은 맥을 놓았지요. 이젠 더 싸우고싶지 않았고 고향에 돌아가고싶었거든요. 동북야전군의 조선족장병들은 이제는 조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지요. 그러니 더 싸우기 싫었지요. 그런데 모택동이 혁명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련속작전하는 정신으로 명령에 따라 계속 싸웠습니다.》

《김치 없으면 못 산다》는 민족의 그 입맛이야 어떻게 달래겠는가? 우리 전사들은 이렇게 입맛을 다시며 부대를 따라 전국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계속 싸우고 싸웠던것이다.

한편 장강이북의 요지를 전부 내주고 기동부대를 모두 상실한 국민당은 전례없던 위기를 맞게 되였다. 군사적인 실패로 민심이 황황했을뿐만 아니라 여러 파벌간의 분렬이 조장되고있었다. 게다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경제적 곤경은 더욱 가심화됐다. 급해난 장개석은 책임을 회피할수 없게 되자 《하야》를 선포하고 리종인을 대통령대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는 장개석은 국민당통수자격으로 계속 자기 직계를 동원해 군정대권을 틀어쥐고있었기때문에 리종인대통령대리의 명령은 빈 종이장에 불과하였다. 장개석은 고향인 절강성 봉화의 계구(溪口)에 있으면서 계속 국민당군을 동원해 장강방어선을 지켜낼것을 요구했고 또 비밀리에 대만을 본거지로 할 계획을 실시하고있었던것이다.

1949년 2월,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회해전역을 마무리한 류백승, 진의, 등소평을 중심으로 도강전역 전선지휘부가 설립되였다. 중앙에서는 중원야전군과 화북야전군의 주력을 동원해 도강전역을 실시하고 동북야전군 주력은 신속히 남진해 무한부근에서 백숭희집단을 견제하게 하였다.

1949년 3월말에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중앙지도부는 하북성 서백파로부터 북평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월 25일에 이미 결정한 새로운 야전군 번호에 따라 동북야전군 서렬을 배렬하게 했다. 그리하여 3월 28일부터 동북야전군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부르게 되였다. 4야전군 산하에는 12, 13, 14, 15 등 4개 병퇀을 두었는데 12병퇀에는 원 동북민주련군 3종대였던 40군과 8종대였던 45군, 9종대였던 46군을 포함하였고 13병퇀에는 원 동북민주련군 1종대였던 38군, 10종대였던 47군, 12종대였던 49군을 포함했다. 그리고 14병퇀에는 동북민주련군 2종대였던 39군, 4종대였던 41군, 5종대였던 42군이 포함되고 15병퇀에는 동북민주련군 6종대였던 43군, 7종대였던 44군, 11종대였던 48군이 포함되였다.

동북야전군의 재편성과 함께 서북야전군은 제1야전군으로, 중원야전군은 제2야전군으로, 화동야전군은 제3야전군으로 개칭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의 통일적인 개편이 있은후 제4야전군은 평한철도를 따라 남하하여 하남과 호북경내로 진격하였으며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은 도강작전행동을 준비하고있었다.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제4야전군은 40군과 43군으로 선견종대를 편성해 가장 먼저 남진시켰다. 그리고 특종병퇀의 포병부대를 산서성 태원에 파견해 태원공격전을 돕게 하였다. 왜냐하면 제1야전군의 태원해방전투는 1948년 10월부터 수개월 지속되였지만 아직 태원을 공략하지 못했던것이다.

치렬한 외곽전투를 거쳐 25만 제1야전군 장병들은 염석산의 13만 국민당병력을 태원에 꼼짝 못하게 포위하고있었지만 중무기가 없어 도저히 성곽을 돌파할수 없었다. 천진해방전투에서 제4야전군의 막강한 실력을 보아낸 지도부에서는 4야전군 포병부대의 지원을 요구했고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이를 비준해 신속히 4야전군의 포병을 집중해 서북야전군의 태원공격전을 지원하도록 했다.

제4야전군 특종병부대에는 포병기술을 익힌 1000여명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동북에서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사격기술을 익혔으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중형무기를 마련해 자신을 무장했던것이다. 1945년말에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에게는 그렇다할만한 대포가 없었다. 고작해서 일본군이 남기고간 박격포, 야포, 척탄통 등이 전부였다. 그들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과의 몇차례 격전을 거쳐 점차 대포의 중요성과 포병부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동북민주련군 본부에서는 미리부터 포병부대 창설에 손을 썼다.

동북의 광범한 군민을 동원해 산과 들을 샅샅이 뒤져 일본군이 남긴 대포를 대량 수집했을뿐만 아니라 기술일군들을 동원해 자체로 대포를 제조했으며 또한 국민당군에게서 로획한 중무기를 집중 사용했다. 그리고 문화수준이 높은 전사들을 모아 각 부대 포병으로 배치했는데 조선족장병들이 각 부대 포병으로 많이 배치되였다. 이를 토대로 정규적인 포병학교인 목단강포병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양성했는데 역시 많은 조선족청년학생들이 자진해 포병학교에 입학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드디어 동북인민해방군 포병종대가 창설되였다. 포병종대는 말과 노새가 끄는 3개 류탄포퇀, 트럭이 끄는 2개 고사포퇀 그리고 중형 직사포퇀, 전차퇀, 공병영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야전군 각 부대에 군 포병퇀과 사 포병영을 두었다.

《전쟁의 신》으로 불리우는 포병, 동북야전군 포병종대는 금주해방전투, 천진해방전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949년 4월 15일, 제4야전군 포병종대가 태원외곽전투에 참가했다. 4야전군 포병부대 일부는 20병퇀을 도와 태원 동북부와 서북부로 공격했고 일부는 19병퇀을 도와 태원 서부와 남부로 공격했으며 또 일부는 18병퇀을 도와 중점지역인 태원 대동문(大东门)쪽으로 공격했다. 아군의 막강한 화력을 당해낼수 없게 된 염석산군은 대부분 소멸되고 나머지는 태원성내로 도주해버렸다.

4월 24일 5시 30분, 태원해방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주변에 포진한 1300여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토했다. 청천병력과 같은 포사격에 대지가 흔들리는듯하였고 성곽이 무너져 내렸으며 크고작은 적의 보루가 삽시에 날아났다.

사령부에서 망원경으로 포사격의 위력을 관찰하던 좌로군 사령인 류충(刘忠)은 저도몰래 혀를 내둘렀다.

《어허, 4야전군의 포사격이 참으로 대단하구려!》

《전문훈련을 받은 포병이 다르긴 다릅니다. 포격이 이처럼 정확할줄 생각지 못했습니다.》하고 곁에 있던 정위 서자영(徐子英)이 동을 달았다.

근 40분간의 포격을 거쳐 아군의 공격로선이 모두 뚫렸다. 일찍부터 대기하고있던 20여만 보병은 포격이 끝나자 신속히 13개 방향으로 나뉘여 돌격했으며 5시간만에 남은 적을 전부 소멸하고 드디여 태원을 해방하였다.

5분간 김치 이야기를 들려준 김병욱 로인.

태원을 해방한 제4야전군 특종병부대의 조선족 포병들의 이야기를 하는 정관채로인.

연변의 로전사 정관채로인은 태원해방에 관련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상에 우리 아득히 먼 태원 있잖습니까? 거기까지 가서 싸웠습니다. 관내에 들어가 태원을 해방했는데 태원사령원이 염석산인지 그랬습니다. 한참 싸워 태원을 점령하지 못하자 제4야전군 특종병퇀을 요청했습니다. 특종병퇀의 포아구리가 이렇게 큽니다. 그놈들 포 터지는걸 보더니 안되겠구나 생각하고 염석산은 급급히 비행기를 타고 도주했습니다. 그래 얼마 안되여 우리 4야전군 포병의 지원을 받아 태원이 해방되였습니다. 그때 특종병퇀에 조선족이 많았는데 한 3분의 1이 될겁니다. 내가 아는 허태봉이라구 있습니다. 그는 부대 반장했던 사람인데 제대하고 연변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도 몇년전에 돌아갔습니다.》

제4야전군 43군 156사 467퇀 2영 6련 전사였던 정관채로인은 비록 직접 태원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해방후 포병부대에 참가했던 전우들에게서 당시의 상황을 료해할수 있었던것이다.

태원해방전투는 1야전군과 2야전군이 주로 참가한 전투지만 4야전군의 막강한 포병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처럼 쉽게 승리할수없었을것이다. 특히 4야전군 포병부대에 1000여명 우리 민족 장병들이 있었다는것은 큰 자랑이 아닐수 없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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