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키프로스 구제금융 등 경제위기국 긴축 밀어붙이자 유럽 전역에 반감 확산
독일은 "돈 내는 건 우리뿐… 그런데도 마귀 취급하다니"
"독일은 다른 나라의 경제모델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작은 나라들도 금융 허브 등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룩셈부르크의 장 아셀보른 외무장관이 지난달 27일 언론 인터뷰에서 독일을 정면 비판했다. 유럽연합(EU)이 키프로스에 100억유로(14조원) 구제금융 제공을 대가로 10만유로(1억4000만원) 이상 예금자에게 손실을 최대 60% 부담시키는 안을 통과시킨 직후였다. 이 구제금융안은 독일이 주도해 관철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 경제정책에서 대부분 독일 입장을 지지해 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룩셈부르크가 독일이 금융 안정을 이유로 유럽 소국(小國)의 금융을 통제하려 한다며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공포증' 유럽 확산
그동안 그리스·스페인 등 구제금융을 받은 남유럽에선 긴축 재정을 강요하는 독일에 반감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최근 '독일 공포증(Germanophobia)'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독일의 전통적 우방국인 네덜란드에서도 경제 발전을 위해 독일 주도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이번 키프로스 구제금융은 독일의 '힘의 우위'를 주변국에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독일은 지난달 15일 열린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키프로스 예금자에게 손실을 부담시키는 안을 제안해 관철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가혹한 제안이었지만 이 안에 반대한 국가는 키프로스와 룩셈부르크 외에는 없었다. 키프로스의 이오니스 카솔리데스 외무장관은 "그리스가 협상장 뒤에서 키프로스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협상장에선 우리를 외면했다"며 "프랑스마저 단 한마디 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프랑스가 긴축에 반대하며 독일의 독주를 견제해 왔지만 이제는 두 나라 사이의 힘의 균형도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 "위기 때 우리만 돈 내"
독일은 그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비롯해 군사력을 앞세워 유럽 지배를 노렸다. 하지만 지금 독일의 패권은 돈에서 나온다. 독일이 유럽 재정 위기 이후 지금까지 구제금융 등으로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 등에 지원한 돈은 2200억유로(314조원)에 이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27일자 사설에서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단일한 특정 권력(독일)의 지배가 새롭게 탄생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국제 분야 칼럼니스트인 기든 래크먼도 독일 권력의 부상과 그에 따라 커지는 (다른 국가들의) 반감이 현재 유럽 정치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독일이 전 유럽 사회를 독일식으로 개조하려 한다는 의심도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근로자들은 독일이 공공부문 축소 등 경제개혁뿐 아니라 노동생산성 향상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느긋한 점심 시간마저 빼앗아 가려 한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하지만 독일은 주변국들이 경쟁력을 높여 신흥 시장을 공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경제 위기 때) 돈을 내는 것은 우리 독일인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를 마귀 취급한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파리=이성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