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와룡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중학시절 나의 꿈은 바이올린니스트였다. 지지리도 못나게 하필이면 바이올린쟁이가 꿈이였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다른 애들이 교수나 박사가 될 야무진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할 때 나는 바이올린꿈에 부풀어 사주팔자에도 없는 음악을 하겠다고 밤이 이슥토록 바이올린과 씨름하였다.
음악세포도 별로 없으면서 행방없이 설치는 꼴이 보기 민망스러워서였는지 대동란의 회오리바람이 나를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몰았다. 그때 그 꼴로 예술학교시험을 봤더라면 미역국을 마셨을것은 뻔하다. 어쩌면 문화대혁명은 나의 바이올린꿈을 무산시키기 위하여 터졌는지도 모른다.
수십년전 일인데도 기억에 생생한것은 한여름 온 동네가 꿈나라에 골아떨어진 고즈넉한 밤에도 바이올린을 켜는 나를 동무해주던 송아지 친구들이다. 그러던 친구들이 내가 산넘어 타현 시골학교에 취직이 되자 끝내 바이올린꿈을 이뤄냈다고 제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사실은 바이올린과는 하등 관계없는 물리과교원으로 채용됐지만 말이다.
70년대초, 생산대마다 청년들이 넘쳐났고 상해지식청년들까지 덮씌운 경쟁의 소용돌이에서 어쩌다가 대대선전대에 뽑혀 농촌무대에서 바이올린으로 무슨 상인지를 받았던 나는 숱한 청년들이 호미 메고 김매러 갈 때 교편을 잡고 교단에 오르게 된것을 행운으로 생각했다.
다른 교원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생산대에 내려가 일할 때 나는 문예대를 꾸린답시고 교정에 남아 시골애들의 음악세포를 들깨워주기도 했던것 같다. 때론 《북경대학은 떼논 당상이였는데 동란때문에 못갔다》며 신세타령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참 딱하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꿈이 동란때문에 깨진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것이 있다.
귀향초기 나는 물에 빠진 놈 지프래기라도 잡는 격으로 바이올린꿈에 무던히고 몸부림 쳤다. 그러다가 나한테서 악보를 배우고 바이올린을 익힌 동네의 한참 동생벌 되는 후배가 나를 제치고 어느 예술단으로 취직해가자 나는 바이올린꿈을 슬며시 접고말았다.
바이올린열에 들뜨던 내가 시들해지자 절대로 신심을 잃지 말라는 이웃 생산대의 나의 계몽선생님께서는 내가 자기보다도 악보를 퍽 능숙하게 본다는 단 한가지 리유만으로 똑마치 내게 그 무슨 바이올린을 빨리 습득할수 있는 천부적자질이라도 있기나 한것처럼 용기를 내라고 재삼 권고했다. 하지만 까따롭기 그지없는 바이올린은 농촌에서 막일로 뼈마디가 굳어진 내손에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지 못하였다.
청운의 꿈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하지만 아무리 황홀한 꿈일지라도 어쩔수 없이 접어야 할때가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꿈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은 분발심을 유발하여 이루고자 하는 꿈은 열대림처럼 무성하지만 이뤄낸 꿈은 그 수림속의 한그루 나무는커녕 그 나무밑에서 가냘프게 자라는 한포기 풀에 불과하여 마음이 공허해지면서 괜한 스트레스를 받기가 일쑤다.
가령 조물주가 지구촌에 인간을 만들때 누구 꿈이나 다 이뤄지게 만들었다고 하자. 모두 대통령, 교수, 박사가 되고 재물도 기막히게 많은 부자가 된다면 이 땅의 쌀벌레 먹거리를 누가 해결할가? 인간의 꿈은 욕망으로 넘치지만 조물주는 그 욕망을 무시한채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운명의 좌표를 딱딱 정해주기때문에 나름의 운명에 돛을 올리고 망망한 대해를 표류하는것이 인간이 아닌가싶다.
사업에 쫓기고 자질구레한 일상에 쫓기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등산같은 운동으로 건강을 도모하기가 일쑤다. 하지만 나는 음부가 수풀처럼 들어선 악보가 얹혀있는 보면대를 마주하고 바이올린험한봉을 톺는다. 남에겐 한참 미련하게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톺는 바이올린험한봉은 너무도 아츨한것이여서 몇달 지어는 몇년만에야 털끝만한 진보가 나타날법한데 그런 성취감 하나만으로도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를 홀가분하게 풀기엔 너무나도 충분한것이여서 나에게는 바이올린험한봉톺기가 최고의 즐거움이다.
언젠가 바이올린이 전문인 후배가 느닷없이 나랑 바이올린이중주를 요청해 왔다. 바이올린험한봉을 그만큼 톺았으면 인젠 자기와의 이중주가 완전히 가능하여 자기랑 사회에 진출하면 량패없거니와 어쩌면 바이올린험한봉톺기를 온전히 할수 있는 지름길을 터득할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것이였다.
《병신개구리 고니 품에 안길 생각이 없음!》 단마디로 거절했더니 도련님이 부르실때 아니가고 뻗치다가 추풍락엽 쓸쓸할 때 가슴치며 뉘우친들 무슨 소용 있겠냐며 소화하기 바쁜 부분은 전문고수인 자기가 뽑고 존경하는 아마추어 선배님께서는 그저 옆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리듬이나 치면서 슬슬 따라가기만 해도 아름답게 울리는 멜로디의 당당한 주인으로 될수 있다는것이였다.
누가 뭐라든 나는 바이올린험한봉톺기에서 홀로를 고집한다. 한것은 누구에게도 얽매우지 않고 누구의 구속과 제한도 없이 제멋에 겨운 바이올린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누군가와 합주를 할라치면 기교가 굼뜬 나때문에 절주가 뒤틀려 전반 악대를 흐리울뿐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수 없다. 홀로 한다는 그 자체는 누구에게도 의뢰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반쪽이 아니라 정체로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당당하게 존재하여 그 어디에도 물들여지지 않고 어설프면 어설픈대로 온전한 자신을 보존할수 있어서 떳떳해질수 있다. 수준미달인 주제파악도 없이 아마추어라고 악대에서 특별한 례우로 보살핌을 받는다면 오히려 허영심이 유발되여 자신이 과연 고수들과 나란히 합주할수 있는 능력에 도달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뿐이여서 남에게 얹혀 허장성세하는것은 불의지재를 챙긴것처럼 께름직함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출세의 길이기에 나는 기어코 홀로를 고집한다.
바이올린험한봉톺기를 수십년 거듭하면서 바이올린은 컴퓨터의 첨단기술로 만든 공업품보다 사람의 손작업으로 만든 수공업품의 값어치가 훨씬 높다는 학문을 철없이 로년기에야 터득하였다. 인쇄기로 찍어낸 유화보다 붓으로 그려낸 유화값어치가 훨씬 높듯이 손작업으로 만들어진 바이올린 몸값이 엄청 높다고들 하는 그 리유를 인제야 조금 알것 같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