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선 칼럼
금년들어 나라에서 농촌지역학교에 대대적인 지원으로 신형의 멀티미디어와 그에 따르는 흑판들을 새롭게 맞추어 보내줌으로써 우리의 교수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참으로 감회가 새로울 뿐만 아니라 효과도 좋았다. 헌데 그런 신형의 멀티미디어와 그에 맞춘 흑판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멀티미디어에 따르는 컴퓨터와 음향설비들을 교탁처럼 만들어 파손되지 않게 하였는데 거기까지는 참 빈틈없이 잘 설계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컴퓨터를 넣는 교탁과 흑판에 무려 다섯곳이나 설치해놓은 자물쇠를 보고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관상자를 든든하게 만드는 건 보관상 편리하기 위해서나 파손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어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저기 열릴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자물쇠를 설치해 잠그게 만들어 놓은 건 아무리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 우리의 학생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귀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는 신생사물이여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보편화되고 있어 아이들은 마치 필통에 들어있는 학용품을 대하는 것과 같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미 사용에 들어갔지만 어느 학생도 컴퓨터를 열어놓고 장난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열려있는 보관상자의 문을 닫아놓고 관리를 더 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생활하면서 자물쇠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어떻게 어디에 이용하고있든 자물쇠를 이용하는 건 그 안에 든 것이 중요한 것도 있지만 더욱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안에 든 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절대로 자물쇠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헌데 반대로 아무리 평범한 것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자물쇠를 이용하게 되면 자연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으며 원래는 관심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가지게 할 수도 있는바 그러다 결국 자물쇠를 망치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생활에서 보이는 자물쇠가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자물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과의 교제를 싫어하고 혼자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 하며 마음의 빗장을 열라고 한다. 그 말의 뜻인즉 마음의 대문에 자물쇠를 설치했다는 것인데 자물쇠를 없애면 서로의 소통이 잘될 것이고 그로부터 믿음이 생기게 될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마음에 자물쇠를 설치한 사람들 거의가 주위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보이는 자물쇠든 보이지 않는 자물쇠든 총체적으로 자기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면 구태여 자물쇠를 설치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헌데 믿음이란 말로만 해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믿어 줄 때만이 진정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미래의 주인공을 육성하는 신성한 일터이다. 그들에게 믿음이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떻게 믿음에 보답해야 하는가 하는 걸 배워주고 깨우치게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이제 다가오는 미래사회를 더욱 조화롭고 더욱 돈독하게 꾸려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열릴 수 있는 곳마다 다 자물쇠를 설치해놓은 물건들을 내놓는다면 그들도 필경은 믿음보다는 의심에 대하여 더많이 생각하게 될 것인즉 앞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자물쇠를 많이 설치하려고 할것인 바 그러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 사이에는 믿음이 점점 메말라 갈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학생들을 믿어보자. 믿어보면 그들도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게 될것이며 그것은 무언의 가르침이 되어 그들도 타인을 믿어줄 것인바 그런대로 발전해나간다면 이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가 서로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정말 말그대로의 조화로운 인간관계가 구축될 것이 아니겠는가.
믿음은 믿어주어야 진정한 믿음임을 학생들이 실제로 깨치게 하는 것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인성교육의 임무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