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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9)—동만 토비숙청 상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9.28일 10:53
1945년말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은 신속한 행동으로 동북 대부분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였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새로운 전투에 뛰여들도록 동북의 광범한 여러 민족인민을 단합시켰다. 항일련군속의 조선인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신속히 남만, 북만, 동만에 진출해 조선인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조선인 군민을 이끌고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민주정권을 세우는 성스러운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은 자유와 해방을 찾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공산당의 두리에 뭉치게 했으며 전반 동북의 민주정권건설과 토비숙청 그리고 동북에서 국민당과의 대결전을 진행할수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은 장개석은 평화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무력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부유한 동북을 독점하고 자기의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는 수천만 동북인민을 계속 수탈하려 시도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국민당 정예군은 산해관을 넘어 금주를 강점하고 심양을 접수하면서 동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전쟁의 불길은 동북에서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1945년 11월, 발해연안의 진황도에 상륙한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산해관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철수하는 동북인민자치군을 추격해 수중(绥中)에 이르렀다. 국민당군의 공격소식을 접한 동북인민자치군의 총사령인 림표는 급급히 남하하여 흥성(兴城)에 도착했지만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 조선의용군 각 부대가 동북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각 곳에 분산되여있었기때문에 수중에 방어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림표는 할수 없이 금주부근 수백킬로메터 공간을 내주면서 적의 주력을 분산시킨후 병력을 집중해 각각 타격할 작전을 구상하였다.

게다가 이때 쏘련정부가 태도를 바꿈으로 하여 공산당의 립지는 더욱 어렵게 되였다. 쓰딸린은 동북각지에 널린 10여만 공산당부대로는 장비가 우수한 국민당 수십만 정예군을 막아낼수 없다고 생각했고 쏘련정부가 계속 공산당을 지지하다가는 동북에서 아무런 리득을 챙기지 못할뿐더러 미국과 영국 정부의 더 큰 정치압력을 받게 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잠시 중지하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에 행정권을 넘길것을 동북에 주둔하고있는 쏘련군사령부에 지시했다.

11월 26일, 쏘련군은 심양에 있던 중국공산당 동북국을 축출했고 동북 대중도시에서 공산당을 축출했으며 국민당관원을 보호하고 그들을 도와 정부체계를 수립하였다. 쏘련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동북의 상황은 더욱 혼잡해졌다. 숨어있던 국민당특무와 괴뢰만주국 관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수시로 공산당간부를 습격하고 암살했으며 각지 보안대, 치안대에도 전향하는 자가 많아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모택동과 당중앙에서는 동북문제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12월 28일, 모택동은 동북국에 보내는 중공중앙의 지시문을 작성했다. 바로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립하자》는 그 유명한 보고였다. 글은 광범한 동북 농촌과 인민에 의지해 공고한 근거지를 다져나감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것을 동북국에 지시했다.

이때 쏘련군의 지지를 받은 장개석은 심양과 장춘에 부대와 군수품을 공중수송하는 한편 국민당이 동북을 완전 장악할 때까지 철군기일을 연장할것을 쏘련정부에 요구했다. 그러지 않아도 동북에서 더욱 많은 리익을 챙기려 하고있던 쏘련은 이 요구에 응해 철군기일을 1946년 1월후로 미룰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비위에 거슬렸다. 미국은 쏘련군이 계속 중국에 남아있으면 자기리익에 손상주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평화담판을 적극 주장해나섰다. 미국 륙군참모총장이였던 마셀(马歇儿)장군이 직접 나서서 국공량당의 평화담판을 촉성하여 잠시적인 휴전상태가 나타났다. 하지만 국민당은 동북의 일본군포로와 괴뢰만주국 군인과 경찰 심지어 마적떼까지 사촉해 계속 공산당과 대항하게 하였다.

옹문도(1912-1997) 한족 1945년 11월- 1946년 2월 길림성 연길지방위원회 서기,

길림군구 연길군분구 정치위원을 담임. 해방후 국가림업부 부장, 서기 등 직을 련임.


1945년말 연안에서 파견한 공산당간부인 옹문도가 연변에 도착해 연변의 당정사무를 책임지게 되였다. 동북내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되여있는 연변지역은 항일전쟁때부터 반일조직과 공산당조직이 있었기때문에 혁명토대가 비교적 좋았다. 그리하여 연변에 도착한 옹문도는 비교적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할수 있었다.

옹문도의 회고록을 보면 항일련군의 간부 강신태와 연변의 민주대동맹의 역할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있다.


《강신태를 비롯한 동지들이 연변에 도착한후 민주대동맹을 이끌고 조선족과 한족을 포함한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을 회원으로 받아 민주대동맹을 연변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군중조직으로 만들었다. 이 조직은 신속히 전반 연변에 분포되였다. 각 현에 민주대동맹 본부를 두고 구와 촌에 지부와 소조를 설립했다. 1946년의 통계를 보면 전맹의 인수는 15만 5000명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이 13만 7000여명이나 되였다. 민주대동맹은 군건설과 정권건설, 군중동원, 토비숙청, 일제잔여세력 청산, 토지개혁, 참군, 전선지원 등 면에서 큰 역할을 발휘했다. 후에 정세의 발전에 따라 이 조직은 자체로 해체되였지만 민주대동맹의 력사적 공적은 간과할수 없다.》


공산당조직이 더욱 확건되고 정권건설이 확고해짐에 따라 조선인 민주대동맹은 자체의 의무를 훌륭히 완수한후 해체되였다. 조선인 민주대동맹은 연변에서 공산당조직이 발을 붙이고 군중을 충분히 발동할수 있는데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다. 연변의 진보적인 조선족은 민주대동맹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피력했으며 공산당을 지지하고 토비를 숙청하며 민주정권을 건립하는데서 적극적인 기여를 했던것이다.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에는 귀국하지 않은 일본군 병사와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지주무장이 있었고 도처에 마적떼가 살벌했다. 미처 동북에 세력을 뻗치지 못한 국민당은 이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국군을 편성했으며 무기를 주어 공산당과 팔로군에 대항하게 했다.

당시 동북대지에는 근 10만에 달하는 크고작은 토비무리가 있었다. 토비들은 도처에서 미친듯이 략탈했으며 국민당의 민족리간정책에 따라 조선족마을을 더욱 극심하게 괴롭혔다. 토비들은 겉보기에는 그냥 일반 농민과 비슷하였지만 일단 기회만 되면 감추어둔 무기를 들고 마을을 략탈하거나 공산당간부를 습격하였다.

옹문도를 비롯한 연안간부들이 연변에 도착한후 1945년 12월말쯤해서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돈화를 거쳐 연변에 도착했다. 조선의용군은 박락권이 조직해놓은 연변경비부대와 합병해 15퇀, 16퇀, 17퇀, 포병퇀으로 재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의 조선족 경비부대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주력이 합쳐 만 천여명 병력으로 본격적인 토비숙청을 시작했다.

연변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면 화룡, 돈화, 왕청등지에 약 만 5000명 토비가 있었다. 화룡에는 곽영춘(霍迎春), 안도에는 선씨(单氏) 3형제, 돈화에는 류화일(刘化一), 기작대(纪大作), 당옥(唐玉), 왕청에는 전보흥(钱辅兴), 마희산(马喜山), 리무경(李茂庆), 안진유(安振有)를 두목으로 하는 토비무리가 있었다


초기 조직된 공산당부대는 총을 든 일반 농민들로 조직되였기때문에 전투경험이 부족했고 쏘련식 훈련을 받은 항일련군 지휘원들의 작전도 중국실정에 잘 맞지 않아 토비숙청에서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연변에서 경비부대를 조직한 강신태는 우선 화룡으로부터 토비숙청을 진행했다. 화룡시에서 5리 남짓이 떨어진 송하평(松下坪)탄광에는 당시 곽영춘을 두목으로 한 200여명 토비가 있었다. 괴뢰만주국 경찰로 있던 곽영춘은 국민당군이 산해관을 넘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공연히 공산당을 반대해나섰다.

1945년 12월 25일에 화룡 6퇀은 퇀장 박근식과 부퇀장 김동우의 인솔하에 송하평탄광의 곽영춘 토비무리를 공격했다. 아군은 술판을 벌리고있는 적을 불의에 습격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자 곽영춘은 급급히 저항하다가 사태가 상서롭지 못하자 안도쪽으로 도주해버렸다. 전투에서 아군은 토비 40여명을 격살하고 48명을 포로하였지만 쏘련군 병사 두명이 숨지고 여러 사람이 부상당하는 대가도 치렀다. 안도를 거쳐 화전쪽으로 도주한 곽영춘은 해방후 인민법정의 재판을 받고 총살되였다.

항일련군 간부들이 길림성에서 편성한 길합군구 편성표(연변경비 1,2,3퇀 조선족부대).

길림성 연변의 삼도만일대에는 당시 전보흥이 거느린 100여명 토비가 있었다. 괴뢰만주국 기병부대 장교로 있었던 전보흥은 연변경비부대에 편입되였다가 비밀리에 대석두(大石头)에 있는 국민당 지하선견군(地下先遣军) 리옥보(李玉保)와 결탁하여 국민당으로부터 영장 위임장을 받았다. 전보흥의 전향을 막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연변경비 3퇀 2영 영장인 손장상(孙长祥)과 교도원 김일준(金一俊)은 눈길을 무릅쓰고 삼도만에 갔다. 하지만 완고한 전보흥은 이들을 감금했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가 설득하려는 팔도구민주대동맹의 최성학(崔成学)을 비롯한 공산당 지방간부마저도 억류했다.

삼도만과 평강(平岗)의 전보흥 토비무리를 소멸하고 억류된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비 3퇀 퇀장인 남창수(南昌洙)가 20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평강을 공격했지만 량태준을 비롯한 40여명 전사가 희생되는 손실을 보고 첫 공격은 실패하고말았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따라 연변에 나온 김응삼로인은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16퇀 6련 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1946년 1월에 조선의용군 16퇀 6련 지도원으로 갔는데 그때 겨우 18살이라 뭘 아나요? 그때 박일우가 정치위원이고 부사령원이고 나는 무전대에 있었습니다. 무전대는 리홍광지대도 없고 북만에도 없고 딱 박일우에게만 있었지요. 공산당에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였습니다. 연변에 도착한후 그분의 지시에 따라 16퇀 6련 지도원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조양천에서 조직되였는데 간부들은 연안이나 태항산에서 나온 사람이였습니다.

그래 훈련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퇀장은 박락권이고 그는 항일련군 출신입니다. 그리고 지도원 황영희라는 사람, 지도원은 많이 아는데 신동훈이라는 사람, 북경에서 상업중학교를 다니다가 태항산으로 간 사람 남순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정치부 주임이 최동광, 해방후 연변의 정협 부주석으로 있었던분일겁니다. 참모장이 리방남이고 부퇀장에 고생호, 정치부 부주임이 최림일겁니다. 삼도만 토비숙청에 들어갔는데 아주 추웠습니다. 마을부근 전체 다 산이였고 눈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교련용 땅크를 앞세우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땅크가 나무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지요. 토비들이 달려들어 기관총 사수 하나 운전수 부사수 등이 희생되였습니다.》


1946년 1월 27일, 박락권과 남창수가 각기 조선의용군 16퇀과 경비 3퇀을 거느리고 재차 삼도만을 공격했다. 그들은 일제가 남긴 소형땅크 한대까지 동원했지만 땅크를 잘 운전하지 못했기때문에 공격에 실패했다.

연길보안퇀에 참가했다가 조선의용군과 합병한 조선의용군 제16퇀에 편입된 장덕만로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1945년 10월 11일에 연길 대성에서 연길경비대가 조직되였는데 그것이 박락권부대입니다. 처음 입대할 때 대성에서 림지룡이랑 함께 참군했습니다. 두달후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이 도착해 팔도에서 우리와 합쳐 16퇀이 편성되였습니다. 삼도만 토비숙청은 12월 20일쯤일겁니다. 마을을 포위한후 일본군이 버려둔 장갑차 땅크가 있었습니다. 서쪽대문으로 들어가다 토비들이 큰 목재를 가져다 놓았는데 거기에 걸려 무한궤도가 땅에 닿지 못하고 들리게 되였습니다. 그래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할 때 땅크에 불을 던지면서 공격했는데 운전수를 비롯해 셋이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손실이 커지자 아군은 병력을 재정비함과 동시에 결사대를 무어 드센 공격을 가할 계획을 세우고 우세한 병력으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아군이 병력을 정비하여 재차 공격을 발동하자 토비들은 삼도만을 버리고 평강쪽으로 도주하였다. 도주하면서 전보흥은 오품엽자촌 강냉이밭에서 감금했던 간부들을 날창으로 찔러 무참해 살해했다. 영장 손장상, 교도원 김일준, 팔도구민주대동맹의 최성학, 팔도구공안분국 삼도만 사업일군 김만석(金万石), 민주대동맹 삼도만지부장 김승찬(金承灿), 지부간부 오제근(吴济根), 마천진(马天振), 소명월구 통신원 박기형(朴基亨), 군중 박봉천(朴风天) 등 9명 모두가 비참하게 살해되였는데 대부분 조선족간부였다.


연길에 계시는 82세 고령인 김병욱로인은 당시 조선의용군 16퇀 3영 7련의 전사로서 삼도만 토비숙청을 직접 겪었던분이다. 답사팀을 안내해 삼도만을 둘러보던 김병욱로인은 눈 덮힌 강냉이밭에 서서 오래도록 사색에 잠기더니 눈시울이 뜨거워나는것이였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전사들과 함께 삼도만을 점령한후 토비를 추격하다가 이 강냉이밭에 이르렀을 때 날창으로 찔러죽인 공산당간부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몸서리 칠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였다. 그들은 얼어붙은 전사들의 시신을 수습해 눈속에 묻어놓았다 한다.

토비들이 처참하게 살해한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곳을 가르키는 김병욱로인.


삼도만에서 실패하자 전보흥의 졸개들은 각기 흩어져버렸고 전보흥은 장춘에 도망쳤다가 이듬해 봄에 장춘을 탈취한 아군에게 체포되여 총살되였다.


왕청의 삼도만토비숙청에서 동상을 입은 조선의용군 16퇀 6련 지도원인 김응삼은 연길에 있던 륙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동상이 완쾌되여 부대에 복귀하려 할 때 그는 같은 병실에서 치료를 받던 4련 련장 전룡화의 초청을 받았다.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냥 부대로 가면 집에서 섭섭해 한다며 함께 왕청 배초구에 있는 자기 집에 가자는것이다.

《전룡화련장과 함께 월청구 월청촌에 갔지요. 동네사람들 모여드는데 큰 아들이 왔다고 부모님들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저녁에 마을사람들과 술을 마셨는데 난 얼마 못 마시고 그랬습니다. 전룡화련장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만주의 200만 동포를 위해 투쟁해왔고 앞으로도 이를 위해 모든것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 군가를 부르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학교에 모여 학생들에게 혁명도리를 설명해주면서 조선독립과 가난한 다수 사람들이 잘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했습니다. 전룡화련장은 참 씩씩한 사나이였습니다.》


밤은 깊어지지만 뜨거운 격정은 이 작은 조선족가옥을 한없이 울려주고있다. 이튿날 전룡화련장은 자기 녀동생과 안해까지 데리고 부대를 찾아가 모두 참군시켰다. 그후 6련 김응삼지도원과 4련 전룡화련장은 자기 부대로 돌아가 돈화, 액목에서 토비숙청을 하다가 곧 장춘으로 떠나게 되였다.

새로운 더욱 큰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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