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불멸의 발자취(29)—해륙풍에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5일 09:13
장개석과 왕정위가 선후로 혁명을 배반한후 중국혁명은 저조기에 들어갔다. 중국공산당은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일으켜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진정한 혁명자들은 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들은 농촌에서 광범한 농민대중에 의지해 토지혁명을 전개하고 농촌혁명근거지를 창설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도시폭동으로 혁명정권을 탈취한다는 투쟁전략이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해방하고 전국의 승리를 이룩한다는 전략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드넓은 농촌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대지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땅 없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광범한 농민들을 각성시키고 농민들을 무장시켜 적과 싸웠다.

중국 최초의 농민정권은 광동성 해륙풍에서 수립되였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농민운동가 팽배(澎拜)는 대혁명시기 광동의 해풍현과 륙풍현에서 활발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농회를 조직하고 농민자위군(自卫军)과 교양소를 세워 많은 군사간부들을 양성하였다. 1927년까지 해풍현에만 하여도 4,000여명 공산당당원이 있었고 300여개 촌에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1927년 4월 15일, 광주에서 반혁명정변이 일어나자 해륙풍에서 로농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수천명 로동자,농민들이 치렬한 격전을 벌여 해풍성을 공략하고 인민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강대한 적이 포위해오자 봉기군은 농촌으로 퇴각하였다.

1927년 9월 해륙풍 인민은 제2차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해풍, 륙풍, 혜양(惠阳), 자금(紫金) 부근에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다. 그후 남창봉기에 참가했던 1000여명 부대가 도착하여 홍군 제2사를 편성하였다. 여기에는 조선혁명가 김철강, 홍범기 등이 있었다. 홍군 제2사와 해륙풍 로농혁명군은 10월 30일 세번째로 봉기를 일으켜 륙풍과 해풍 현성을 공략하고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쏘베트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의 첫 쏘베트 정권이였다.

중국공산당 조기 농민운동가 팽배.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12월 19일, 봉기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교도퇀도 해륙풍에 도착하였다. 이가운데는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를 비롯한 십여명의 조선혁명자들도 포함되여있었다.

(권립 교수) : 《1927년 12월 13일, 광주봉기의 1,200여명은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김산, 오성륜, 양달부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화현에 도착하여 중국로농홍군 제4사로 개편되였습니다. 19일에는 해륙풍 쏘베트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화현(花县)에서 교도퇀 엽용을 사장으로 하고 조선인 오성륜을 창모장으로 하는 홍군 제4사를 건립하였다. 해륙풍 쏘베트지역은 조선혁명가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부근 농민들은 새로운 쏘베트사회를 구경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네 마을에 돌아가서 무장투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이곳의 모든것에 관심을 가졌다.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

해륙풍인민은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피흘려 싸운 조선혁명가들에게 경탄을 표했다. 해륙풍에 도착한 이튿날 해륙풍인민은 대규모의 《조선인동지 환영회(朝鲜人同志欢迎会)》를 열고 조선혁명자들을 환영하였다.

쏘베트정부에서 오성륜은 군 사령부 참모부의 일원으로 농민자위군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풍부한 투쟁경험과 군사기술로 농민들에게 군사지식을 배워주었다. 김산도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는 로동운동사와 꼼뮨력사를 강의하면서 선전공작을 지도하였다. 강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사상과 군사기술을 겸비한 훌륭한 간부로 양성되였다.

기타 조선혁명가들은 홍군부대에 편입되여 전투훈련을 하였다.

고헌장일기에 기록된 동강당학교 간부명단(김병현,함성,장북성,리빈 등 조선인이 포함).

1928년에 들어서서 광동의 적이 해륙풍 쏘베트근거지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리복림, 여한모(余汉谋), 리제심의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해륙풍을 포위하고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모두 자기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누구든 앞장서서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해륙풍에는 엽용이 거느린 홍군 제4사의 2,000여명, 홍군 제2사의 1,000여명 그리고 로농혁명군과 농민적위대를 비롯해 만여명 무장대오가 있었다.

(권립 교수) : 《1927년말에 2000여명 적이 적석촌을 공격해왔습니다. 홍군 제4사는 피어린 반격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은 해륙풍에서 첫 전투를 맞이하였다. 2,000여명 적이 서부로부터 적석촌(赤石村)을 공격하였다. 촌의 농민자위군과 농민들이 총칼을 들고 적과 싸웠다. 녀성과 어린이까지도 산에 올라가 붉은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농민군이 두려움 없이 적과 용감히 싸우고있을 때 교도퇀의 300여명 전사들이 도착하였다.

교도퇀의 조선혁명자들은 기타 홍군전사들과 함께 산등성이에서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적의 허점이 나타나자 300명 전사들은 맹호처럼 공격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적들은 500여명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홍군은 세명이 전사했다.

적석촌에서 참패를 본 적들은 새로운 전술을 썼다. 여한모는 3,000여명 병력을 동원해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면 공격해왔다. 교활한 적은 우세한 병력으로 공평촌(公平村)을 습격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부근의 농민적위대가 모여왔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공평촌 군중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적의 습격을 받았다. 김산은 산으로 퇴각한후 기타 농민군과 함께 적을 반격하였다. 그러나 간단한 장총과 칼을 든 농민군은 적의 기관총소사에 많은 희생을 내였다.

공평촌전투에서 수많은 희생을 낸 농민군은 매롱(梅陇)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권립 교수): 《그러나 2월부터 정세는 달라졌습니다. 홍군과 쏘베트지역 농민들은 련속 악전고투했지만 해륙풍 대부분 지역을 잃어버렸고 4월말부터 5월초까지 오봉령일대에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 3월, 적은 전반 해륙풍지역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매롱에서 봉기군은 재차 정비를 거친후 해풍과 륙풍 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적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수비하였다. 홍군은 수많은 희생을 내고 또다시 퇴각하였다. 현성과 주요한 마을들이 적에게 강점되자 홍군부대는 식량난까지 겪게 되연다. 그리하여 홍군은 부분적인 부상자들을 농민가정에 피신시키고 주력은 계속 퇴각하였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이때 퇴각하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도망쳐간 산은 대단히 가파르고 위험해서 평소에는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곳이였다. 오성륜과 손(孙)이라는 두명의 조선인 친구가 나와 함께 갔는데 나는 일행의 맨앞에서 올라갔다. 당시 나는 건장했다. 하지만 오성륜은 몸이 뚱뚱했고 더우기 기후에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불쌍하리만치 많은 땀을 흘렸다. ....그날 밤에는 산 맞은편에 있는 폐사(废寺)에서 쉬였다. 일행은 10명이였는데 모두가 먹을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여 쌀을 숨겨둔 장소를 찾아내려는 희망을 품고 돌마다 들춰보았다.

오성륜과 나는 전래의 농부가를 부르면서 서로 교대로 돌을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마침내 구멍 파인 돌밑에서 조그마한 쌀독을 찾아내였다. 겨우 밥을 할 낡고 깨진 쇠솥을 하나 찾아냈지만 물이 새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쌀로 가루를 내여 솥에 넣고 쪄서 떡을 만들었다. 우리는 떡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릴수가 없어서 반쯤 익자 꺼내어 동료들을 불렀다.

숨을 곳을 마련하거나 떠나야 한다는것을 알고있었으므로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모두 빨리 떡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밤새도록 우리는 쌀을 찧어 떡을 만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먹을것 찾는데는 귀신인 오성륜이 운 나쁜 개 한마리를 발견하고 쏘아잡았다. 광동인들이 즐겨먹는 검붉은 개였다. 이 진미를 어떻게 료리해야 좋을까? 오랜 토론 끝에 땅에 구뎅이를 파고 개를 그속에 집어넣은 다음 그위로 불을 때기로 하였다.


우리는 불옆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주었다. 조선의 민요 아리랑,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 울었다. 중국사람들은 이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코 잊을수 없을것이라고 말했다.》

김산(본명 장지락)

김산과 오성륜, 그리고 손꼬마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숲속에서 잠들었다. 잠들기전 손꼬마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낮은 소리로 동요를 불렀다.

이튿날 죽음을 각오한 이들은 각자 주소와 가족에게 줄 서한을 교환하였다. 김산은 가족에게 보내는 서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조선땅이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며칠후 그들은 백사(白沙)에 도착하였다. 홍군 제4사의 엽용은 희생되였고 부대는 400명밖에 남지 않았다.

5월 3일, 홍군은 해풍현을 공격하는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로 하였다. 홍군전사는 400명이였고 기타 수백명의 유격대원들이 조직 되였다. 부대는 두길로 나누어 오복령(五福岭)과 현성을 공격하였다. 오성륜과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은 부대를 따라 현성의 학교를 기습하였다. 오성륜이 8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감쪽같이 적의 보초를 제거하고 100여명 적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무기와 탄약을 로획하고 감옥의 200여명 혁명자들을 구출해 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오복령 공격부대는 전투를 시작하지 못하고있었다. 오성륜은 할수 없이 현성을 나와 적의 주력이 도사리고있는 오복령으로 갔다. 두부대가 합쳐 적을 공격하였다.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지만 적들은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날 밝을 때까지 사수하였다. 날이 밝자 적은 공격부대가 얼마 되지 않는것을 발견하고 반격을 가했다. 우세한 적이 포위공격해오자 홍군부대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흩어졌다.

(권립 교수): 《오성륜이 거느린 부대에는 손씨라는 꼬마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봉령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학질에 걸려 한발자국도 옮기기 힘들었던 김산과 오성륜은 꼬마전사를 업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마을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었습니다. 꼬마전사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 결전에서 오성륜의 조카도 희생되고 김철강과 홍범기도 희생되였습니다.》

남창봉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조선혁명자 김철강과 홍범기도 오복령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오성륜과 함께 있던 손꼬마도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다. 오성륜과 김산은 손꼬마를 끌고 서로 부축하면서 철수하였다. 그들은 검유령(剑游岭)에 있는 비밀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병원으로 사용되던 초가집은 조금 전에 적에게 발각되여 모두 불태워져있었다. 안에 있던 30명 부상자도 산채로 불에 타 죽었다. 그가운데는 오성륜의 조카도 있었다. 손꼬마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희생되였다.

(권립 교수):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전사들은 200여리를 달려 매양에 모였다가 분산탈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김산과 오성륜 등은 두달동안 상상하기 어려운 난관을 무찌르며 이산에서 저산으로, 싸우며 행군하고 행군하며 싸우며 끝내 당조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당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투쟁에 뛰여들었습니다.》

적을 피해 잠복하던중 김산과 오성륜도 흩어졌다. 김산은 조그마한 나무배를 타고 산두에 갔다. 산두에서 그는 향항으로 가는 일본화물선을 타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향항에서 인삼장수의 도움을 받은 김산은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에 도착하였다. 당시 김규광도 상해에 있었다. 얼마후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도 상해에서 이들과 재회하였다. 굴할줄 모르는 조선혁명가들은 상해에서 당조직을 찾았고 계속 혁명을 견지하였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100%
10대 0%
20대 0%
30대 10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사진=나남뉴스 레전드 시트콤 '세 친구'의 주역이었던 윤다훈이 이동건과 만나 기러기 아빠 근황을 공개했다. 최근 방송한 SBS '미우새'에서는 윤다훈이 오랜만에 출연해 오랜 인연 이동건과 만남을 가졌다. 윤다훈은 "7년째 기러기 아빠, 할아버지로 지내고 있다. 큰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왜 피해자 행세하냐" 최병길PD, 전처 서유리 저격 '억울하다' 고백

"왜 피해자 행세하냐" 최병길PD, 전처 서유리 저격 '억울하다' 고백

사진=나남뉴스 방송인 서유리와 이혼 소식을 알리면서 충격을 주었던 최병길 PD가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19일 최병길 PD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참고만 있으려니 내 앞길을 계속 가로막는다"라며 "싸우고 싶진 않지만 내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최소한 방

"술 마셔도 무죄" 김호중, '이창명 음주 사건' 혐의 입증 어렵다 왜?

"술 마셔도 무죄" 김호중, '이창명 음주 사건' 혐의 입증 어렵다 왜?

사진=나남뉴스 뺑소니 혐의를 받고 있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국과수에서 음주 소견을 받았음에도 무죄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현재까지 김호중이 접촉사고를 일으키기 전 술을 마신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계속해서 포착되고 있다. 먼저 지난 17

미니영화 《결혼등기》...황혼재혼에 대한 사색의 여운

미니영화 《결혼등기》...황혼재혼에 대한 사색의 여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올들어 네번째 작품으로 내놓은 미니영화 《결혼등기》가 5월16일 오전 연길한성호텔에서 시영식을 가졌다. 연변영화드라마협회 부회장 김기운이 감독을 맡고 전영실이 극본을 쓴 미니영화 《결혼등기》는 리혼한 부모의 재혼을 둘러싸고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