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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無字碑)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7.23일 09:22
작성자: 김혁

  (흑룡강신문=하얼빈) 또 한편의 무측천의 일대기를 보여준 드라마 "무미랑 전기(武媚娘传奇)"가 브라운관을 달구며 안방극장을 찾았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女帝)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부임한 뒤 2000여년, 중국 역사에서 여성 황제는 단 한 명, 바로 무측천이였다.

  하지만 그녀만큼 중국 역사상 호훼포폄(护毁褒贬)의 대상이 된 인물도 드물다. "정권 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일삼고 자신의 딸과 아들마저 죽인 천륜을 저버린 철녀"라는 평가와 "거의 반세기 통치기간 중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으로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꾀한 성군"이라는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럼에도 무측천은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드러지게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정치에서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병용했고, 국제정세에 밝았고 인재를 등용했다. 그 결과 그의 집정기를 "당나라의 황금시대"로 평가받기도 한다.

  때문에 극적인 줄거리로 가득찬 그녀의 이야기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자주 오르는 "1순위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무측천은 당나라 초기 624년에 상인 무(武)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14살때 태종(太宗) 리스민(李世民)의 후궁으로 뽑혔다.

  리스민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며 끔찍하게 아꼈다. 그런데 태자 리치도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궁에서 벌어진 희한한 "삼각관계"였다.그러다 리스민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앓다가 붕어(崩御)하고 말았다.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머리를 깎고 장안 감업사(感业寺)의 비구니가 되었다.

  태종의 5주기에 고종(高宗)으로 등극한 리치가 그 절을 찾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무측천은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후궁이였던 여자가 다시 그 아들의 후궁이 된 것이다. 그때 무측천은 이미 서른한 살, 고종보다 네살이나 많았다.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금방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그녀는 기개와 권모로 천하의 대세를 바꾸었다.

  고종이 두통과 시력의 저하로 정무를 힘들어하자 무측천이 점차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타고난 정치적 수완으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나 인사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남편은 천황, 본인은 천후로서 실질적인 국정의 동반자가 되었다.

  황위를 찬탈한 사악한 요녀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뛰어난 정치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광초현재(广招贤才)"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재상 적인걸을 비롯하여 준재가 그의 주위에 즐비하였다. 그녀는 특히 적인걸을 신뢰하여 이름대신 "국로(国老)"라 부르고 늘 그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굽혔다.

  또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특별한 재능인을 뽑았고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황족이나 문벌귀족에게 그녀는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무측천은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려고 애썼다. 면류관을 쓰고서 직접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처리했다. 남성 황제들처럼 후궁도 두었는데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이 그녀를 천하의 음탕녀로 그렸다. 그녀의 통치에 대해선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폄하의 시각이였다.

  무측천이 문인들을 우대하면서 그 풍조가 정착되어 당대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광범위한 예술과 학술의 무대에서 활보 할 수 있었다. 2,200명의 당대 시인들이 지은 약 5만여편의 시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왕유(王維)․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리상은(李商隱)등 기라성 같은 뛰어난 시인들을 연줄로 배출한 것도 이러한 풍조가 시문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자치통감(資治通监)"은 "정사를 스스로 펴서 명찰, 선단하였기에 당시의 영현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섬기다"라고 그녀를 정평하였다.

  시안의 서쪽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건릉(乾陵)이 있다. 고종과 무측천이 함께 묻힌 묘역이다. 묘역의 목구멍이라 할 위치에 이르면 우측에 흰빛의 거대한 비가 서있다. 이름하여 무자비(无字碑)이다. 하얗게 비어 있어 백비(白碑)라고도 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 자리에 스스로 등극하여 중원을 호령해 온 그녀였지만 대신들에게 유언을 남겨 굳이 무자비를 세우게 했다. 그렇게 갈래 많은 전설을 누누히 남긴 여황제는 막상 죽어서 비석에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한 글자도 적지않은 무자비는 무측천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평가유보의 의미로 남겨 놓은 기념물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무자비는 한 덩이의 돌같아 보인다. 우리가 그에게서 역사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면 무자비는 아닌게 아니라 그저 오래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헤아려보면 그것은 그저 돌덩이가 아니며,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명리를 챙기고 현시하기 위해 거품많은 명함과 프로필을 흩뿌리고 다니기를 좋아하는게 요즘 현대인들의 풍경이다. 적지않은 이들은 품 들이고 돈 들여 속세의 돌을 화려하게 쫓아서 본인 이름 석자를 크게 새기길 원한다. 그러한 이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무자비이다.

  저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쉼없이 빼곡히 적어 내려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 평가를 저만치 넘어서는, 깨끗하게 여백이 있는 삶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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