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오늘의 “잊을 수 없는 역사”프로에서는 일본 학자 요시미 요시아키와 히야시 히로후미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래 동안 '위안부 문제'는 피해국과 일본 우익 정치요원들이 논쟁하는 이슈였습니다.
이번 논쟁에서 요시미 요시아키와 히야시 히로후미라는 두 일본 학자가 앞장섰습니다.
20여 년간 이들은 대양을 넘어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고 서적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일본 우익 정치요원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일본 우익 정치요원들의 눈에 가시가 된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얼마 전 이 두 일본 학자는 상하이와 난징에서 연설을 발표하고 위안소 옛터를 돌아봤습니다. CCTV기자가 그들을 만나봤습니다.
6월 초, 상하이사범대학에서 '위안부'문제 관련 연설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중일 양국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들이 여러 명의 중국인 피해 여성의 비참한 경력을 소개했습니다.
난징 탕산의 레이구이잉 노인은 1942년 여름 일본 병사가 칼자루로 머리를 세게 내리친 후 강제로 옷을 벗겨 큰 군용 침상 위에 들어 던지더니 강간했다며 그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저항하는 중에 노인은 온 몸 곳곳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하이난의 이족 노인 천야볜 씨는 14살 때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징집됐습니다.
그후 2년간 온갖 수모와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죽음을 위장해서야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안부로 살았던 비참한 경력 탓에 천야볜 노인은 자궁이 심하게 변형돼 8번이나 죽은 태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인 푸구이잉 노인은 일본 군 위안소에서 위안부가 도망치면 그 가족도 학살한다는 규정을 내왔다고 말했습니다.
위안부는 하루에 50, 60명의 일본 군 병사를 맞아야 했고 최고로 70명을 접대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중국, 한국 등 나라를 여러 차례 찾아 수십 명의 위안부 피해자를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일본 군이 폭력이나 강박과 유괴, 사기 그리고 인신매매 등 수단으로 징집해 왔고 그중 다수는 미성년 소녀였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와 히야시 히로후미 교수 모두 연설 중에서 고노 담화 정신을 지킬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했으며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1993년 당시 일본 내각 관방장관이었던 고노 요헤이는 수많은 위안소와 위안부가 확실히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일본군이 위안소 개설과 관리 그리고 위안부 운송을 책임졌으며 이같은 행위가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에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와 히야시 히로후미 교수는 일본 우익정부가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고 이에 분개한다고 말했습니다.
2년간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징집을 부인한 하시모트 도루 오오사카 시장을 도쿄 제3법원에 기소했습니다. 아울러 일본 정부가 사죄의 뜻을 전하고 배상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오는 12월 최종 판결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히야시 히로후미는 일본 우익세력의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좌담회가 열리고 있는데 우익세력이 현장으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고 협박 전화나 메일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같은 방해와 위협을 받았다고 해서 결국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요시미 요시아키와 히야시 히로후미는 일본 군의 위안부 제도를 조직성 있는 범죄행위로 규정 지었습니다.
이런 제도가 일본 국내의 형법을 위반한 것은 물론이고 일본이 체결한 여러 개의 국제 조약도 어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서 일본 정부가 성실한 마음으로 역사를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죄하고 배상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역사 진실을 교과서에 기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