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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8]분사식 비행기-손중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8.27일 10:40
연변팀 전국우승 50돌기념 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8)

-득점왕으로 유명한 손중천


1950년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리광수가 길림성팀의 《중형땅크》라는 별호는 가졋다면 손중천은 《분사식 비행기》라는 별호를 달고 드넓은 중국의 축구무대에서 길림성팀과 중국국가팀 선수로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한 축구영웅이다.

손중천선생은 1933년 9월 14일 룡정시 덕신향 소재지에서 약 30리 떨어져 있는 금곡에서 태여났다. 금곡(金谷)이란 이름만 들어서는 무척 아름답고 부요한 고장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궁벽한 산간촌이다. 금곡촌은 항일 간부와 투사들이 많이 나온 고장일뿐만아니라 항일투쟁사에서 잊지 못할 연변의 항일유격대에 공급한 《연길작탄》이 처음으로 제조된 곳이여서 금곡이라는 그 이름과 더불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구 쏘련 모스크바경기에서 손중천선생(왼쪽 두번째).

손중천은 철이 들기전에 부모를 따라 개산툰으로 이사하였다. 어려서부터 뽈차기에 흥취를 갖게 된 손중천은 같은 또래들과 함께 천쪼각을 뭉뚱그려 공을 만들어서 뽈차기를 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혹 돼지를 잡으면 돼지오줌깨(방광)에 바람을 불어넣은 공을 차기가 일수였다. 몇명씩 편을 나누어 차면 대부분 꼴을 그가 넣다싶이 하였고 뽈차기에 흥취가 있다보니 늘 어두워서야 집에 들어가군 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손중천은 학교선수로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뽑냈다. 1951년초에 손중천은 개산툰 정동중학교(광개중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기 바쁘게 조선전쟁에 나갔다. 지원군에 입대한 손중천은 중국인민지원군 고사포 61사 2퇀의 전령병으로 있었다.

항미원조에 나간 그는 축구에 타고난 재질이 있어서 20세에 중국인민지원군 축구단의 일원으로 되여 중국인민행방군 건군 25주년을 맞으면서 경기대회 참가하였다.



구쏘련 모스크바광장에서의 손중천선생.

1954년 8월 15일, 조선 평양 모란봉경기장에서 조선인민군 《2.8》축구팀과 중국인민지원군 축구팀간에 경기가 있었다. 그번 경기장에 조선의 군대와 군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운동장을 꽉 메웠다. 그날 경기에서 비록 2대1로 패하기는 하였지만 손중천은 중국인민지원군팀의 유일한 득점수로 되여 많은 관중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손중천은 부대에서 제대된후 리광수와 함께 연변팀과 길림성팀의 공격선에서 중견선수로 득점왕으로 되였으며 전국의 축구계와 축구팬들의 인기인물로 되였다. 손중천선수는 중국의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뽈을 찼는데 중국 갑급팀에서 제일 많이 뛰여다닌 선수이기도 하였다.



6대0으로 상대팀을 격파시킨 길림성팀의 손중천선생(왼쪽 첫번째).

중앙공격수인 리광수는 상대편의 방어진에 들어가 방어수들을 끼고 돌아다니다가 눈치가 빠르고 폭발력이 뛰여난 손중천과 지청룡에게 공을 넘겨주군 하였다. 중국의 축구계에서는 그중의 리광수를 《중형땅크》라고 불렀고 손중천과 지청룡을 그의 좌측에서 쏱살같이 날아다니는 《분사식 비행기》라고 불렀다.(중국 조선민족문화사대계 체육사 참조).

손중천명장은 유전인지는 몰라도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세계올림픽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손씨가문 족보는 룡정시중의원에서 퇴직한 금곡출신 손영석의사한테 있다. 한국의 많은 손씨들이 손선생을 찾아와 족보를 베껴가군 한다)



구쏘련 모스트바에서의 길림성팀(뒤줄 오른쪽 세뻔재 손중천).

길림성팀에서 리광수, 손중천, 지청룡 등 선수들의 삼각련락작전은 1950년 길림성팀의 전술풍격으로 되여 많은 축구계와 축구팬들의 절찬을 받았다. 60대중기에는 지운봉, 허경수, 동경춘을 핵심으로 한 제2대 선수들의 속도와 기술이 결부된 새로운 전술특점이 형성되여 전국축구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체육사)

손중천선수는 1950년초반부터 1962년초까지 장장 수년을 길림성팀과 중국국가팀에 크게 공헌한 명장이였다. 1962년말에 길림성축구팀에서 은퇴한 손중천은 길림성체육학원 운동계에서 3년간 학습하고 돌아온 뒤 연변체육학교에서 부교도주임 사업을 하였다.

손중천선생은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1969년 농촌에 내려가 3년간 로동개조를 받고 1971년 연변주체육운동위원회로 돌아왔고 1971년부터 1979년까지는 연변체육학교 부교장 직무도 담임했었다.



1956년 제1회 동계훈련에서의 길림성팀(첫줄 오른쪽 네번째 손중천).

1979년 손중천선생은 서부독일 축구감독전문가 교육반에서 얼마간 학습한후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연변주체육운동위원회 체육공작대 부주임 겸 부서기로 사업하다가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줄곧 연변체육운동위원회 축구협회 전직부주석으로 있었다. 그간 손중천선생은 우리 민족 후대들의 축구 사업과 발전을 위하여 저술도 발표하였는데 중점독물인 《축구》와 《소년아동 과외축구훈련》등 저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1986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손중천선생한테 《새중국 체육개척자》라는 영예증서와 《체육명수》라는 건장칭호를 수여하였다.

길림성축구팀과 국가팀을 위하여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한 축구영웅 손중천은 병으로 1994년 11월 14일 60세로 세상을 떴다. 손중천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축구업적은 우리 민족 축구사의 한페지에 영원히 남아 있을것이다.

김원범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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