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 조양천제1중학교 김정관교원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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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성적을 쳐다보면서 27년을 달려왔습니다. 사업터가 바뀌고 학생들이 수없이 바뀌였지만 이것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훤칠한 키에 두리두리한 두눈은 항상 웃는듯하고 커다란 코와 두터운 입술이 인상적인 김정관교원은 연길시 조양천제1중학교의 교도주임이다.
대학입시에서 락방하자 째지게 가난한 가정형편때문에 재수를 포기하고 룡정시 삼합진 북흥중학교에 교원으로 취직한것이 1985년, 지금으로부터 27년전의 일이였다. 그 시기 그는 로교원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물리교원의 자질제고에 힘썼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연변대학 물리학부(함수)에 입학한다. 5년간의 학습기간 그의 일터도 바뀌였는데 북흥중학교가 삼합진중학교에 합병된것이다.
《참으로 애들이 불쌍하였습니다.》그는 이렇게 변강의 시골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를 회상한다. 교원이 모자라 물리, 지리, 생물과를 혼자서 가르쳐야 했지만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더욱 잘 가르치게 되더란다. 애들이 자라서 시골을 벗어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간단하지만 깊은 도리를 자기의 체험으로 가르쳤다. 그의 학생들의 고중입시성적은 룡정시에서 줄곧 중상류에 속했고 따라서 시내학교에 전근할 기회도 생겼지만 자기를 쳐다보는 불쌍한 시골애들을 떠날수 없었다고 한다.
과임으로 5년, 담임으로 6년, 교도주임으로 4년 있으면서 불타는 청춘을 변강의 시골중학교에 고스란히 바쳐온 김정관교원은 2000년 여름에 룡정시교육국의 배치로 조양천1중에 전근한다.
《삼합에 있을 때에 비하면 천당이였지요.》 그때의 감상을 이렇게 말하는 김정관교원은 그로부터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였다고 이야기한다. 교원이 20여명도 안되는 시골중학교에서 경험이 풍부한 로교원들이 100여명 운집한 조양천1중에 온 그는 꾸준한 노력과 끈질긴 탐구로 재충전을 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1200여명의 학생에 120여명의 교원이 있었지요.》 2000년 9월에 초중 2학년 물리과임을 맡고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줄곧 초중 3학년 고중입시지도를 해온 김정관교원은 학생의 성적이 곧바로 교원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말한다.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교사의 교육리념과 교수예술은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마련이다.
2004년, 김정관교원은 학교지도부와 교원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고 교도주임이라는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 교도주임사업을 하면서도 김정관교원은 졸업학년 입시지도를 계속하였는데 많을 때는 5개 학급, 주 28교시를 소화해야 했다. 교도주임은 학교의 교육, 교수연구로부터 담임, 과임 배치 지어는 과당배치에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일들을 주관하여야 하는데 거기에 매일 교수안까지 작성해야 하니 한밤중까지 일할 때가 기수부지였다.
교육사업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숭고한 책임감으로 김정관은 학교지도부와 교원 그리고 광범한 학생들과 학부모, 사회와 상급부문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선후로 《룡정시교수질활동교수선진개인》, 《연길시모범공산당원》, 《연변주우수교원》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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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문제풀이를 지도하고있는 김정관교원
2009년부터 조양천진이 연길시에 귀속되고 조양천1중도 연길시의 학교로 되였다. 현재 이 학교는 학생 200여명, 교원 60명 규모로 줄었지만 현재까지 줄곧 변하지 않는 수자로 연변내에서 이름이 높다. 그것은 바로 연변1중 입학생수자이다. 2005년 21명, 2006년 23명, 2007년 21명, 2008년 23명, 2009년 30명, 2010년 28명, 2011년 21명. 수자는 비슷하지만 입학률은 10%대에서 30%대로 제고되였다는 말이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연변주 리과장원을 한 진미용(陈美蓉)학생이 바로 우리 조양천1중 졸업생입니다.》 김정관교원은 조양천1중이 최근년간 거둔 괄목할만한 성적들은 모든 조양천1중 교원들이 힘써 노력하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라고 말하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