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삼로인. (화룡시문화관 제공)
광범한 사랑을 받은 ‘조선족 삼로인’은 2007년 6월에 성급 무형문화재, 2008년 6월에 국가급 무형문화재명록에 입선됐다.
말을 위주로 노래하며 연기하는 삼로인의 대사에는 연변지역 사투리가 사용돼 지역특색이 돋보인다. 진보, 중간, 락후 세 류형의 로인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론쟁을 통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진보적인 인물과 신생사물을 고양하고 그릇된 사상과 락후한 현상에 대해 비판했다.
연변 조선족 민간곡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삼로인은 이주 초기 생산건설 과정에 출현한 대중오락의 잉태기, 항일전쟁이 끝난 뒤의 성숙기와 새 중국이 창립돼서부터 지금까지 굴곡적인 발전기를 겪어왔다.
1945년 항일전쟁이 결속됨에 따라 경축하는 의미에서 열린 문예공연이 성행했고 문예공연 종목 가운데서도 특히 곡예류 종목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 조선족 재담, 만담, 얼광대와 막간극 등 여러 형식이 어우러진 삼로인은 초보적인 특징을 갖추게 됐다.
1950년 최수봉, 원주삼, 허창석을 비롯한 연변문공단 곡예배우들은 삼로인의 풍격을 확립했으며 형식 면에서 보다 규범화하고 많은 우수한 극본들이 용솟음쳐나왔다.
1961년 화룡현문공단에서는 삼로인의 창작과 연출에 힘을 기울여 화룡지역 특유의 곡예 표현 형식으로 거듭났으며 이때 삼로인은 첫 발전고봉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러나 곧 문화대혁명시기에 들어서면서 삼로인은 연출금지를 당했다.
1980년대 중기 조선족 소품의 궐기에 토대를 닦은 삼로인은 소품의 충격을 받아 점차 무대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2003년 화룡시정부에서 삼로인에 대한 발굴작업에 착수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초보적인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 삼로인 작품은 도합 163편에 달하며 195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백년대계’가 있고 1960년대에는 ‘품질보장’, 1970 및 1980년대에는 ‘로인축구대’를 꼽을 수 있으며 2000년대에는 ‘인터넷 풍파’와 ‘하마터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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