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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를 회억하면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2.29일 11:06
항미원조 참전용사 강근자할머니의 전쟁년대 회억담


중국공산당은 오늘 위대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수많는 희생과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영용히 싸워 왔습니다 .

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를 회억해보면 저 역시 포화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저는 적과 맞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당시 직책범위에서 보고 듣고 겪은 과거 60년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1946년 3월, 조선의용군 교도대에 입대하여 후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개칭되였습니다. 내가 처음 성장의 길에서 “혁명”이란 두굴자를 머리에 깊히 새기고 처음 들은 노래는 “동지들아 굳게굳게 단결해라”였습니다.

저는 항상 우리 당의 견정하고 정확한 정치방향과 간고소박한 사업작풍을 주도사상으로 항상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견정불굴의 정신으로 혁명을 내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할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전쟁년대에는 화식이 더말할수없이 먹기 힘든걸로 마련되였습니다. 그러나 일체는 조직의 규률에 복종하여야 함으로 먹어야 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지금 호화로운 집에서 살고 호화로운 학교에서 공부하고있지만 그때 군정대학의 조건은 매우 간고하였습니다 .

저마다 입고 간 옷이 군복이고 책상은 무릎이였고 문도없는 강당에서 얼어드는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혁명의 도리를 배워갔습니다. 1946년 장개석이 내전으로 국민당이 길림을 점하고 교하까지 쳐들어오자 학교는 왕청현 라자구로 토비를 숙청하면서 후퇴하였습니다. 그해9월 정세가 호전되자 룡정영국더기로 이동하여 그해 10월부터 개학했습니다. 당시 교장은 주보중장군이였습니다. 주보증은 소수민족으로 동북항일련군 제5군 군장 제2로군 총지휘였으며 뛰여난 전략전술로 림해설원에서 일체 침략자를 몰아냈습니다 .

1949년 모택동주석께서는 주보중장군을 “당신은 동북에서 14년 눈물겨운 시련을 엮었습니다.” 라고 높히 평가하셨습니다 .

1947년 5월5일 제1기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졸업식을 처음으로 4기까지 4800명이란 고급군사 인재들을 배양하였습니다.

군정대학교에서 육성한 학우들중 불후의 공훈을 세운 영웅사단장 장교덕, 송덕만 두사람은 영용히 희생되였으며 첫 비행사 유명주, 김례중장군도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 중앙군위 원 총후근부 부장이였던 조남기, 연변주인대상무위원회 주임이였던 조룡호 동지도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조선족으로 20여명 장군이 있었으며 사령급 이상이 300여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영광입니다. 저는 1947년 5월에 군정대학을 졸업한후 길림군구 사령부 무전훈련반을 졸업하고 전선부대 제10중대 사령부에 배치되였습니다.

당시 사령부는 반석에 있엇습니다. 추기공세가 끝나고 동기공세가 시작되자 나는 제1선 부대인 제30사전대로 조동되였습니다. 여기는 전선이였습니다. 도착하자 적의 폭격을 피할수있는곳으로 작업실 안테나를 가설하였으며 전쟁터에서는 제일 앞장서나가야 하였고 후퇴할때는 제일 마지막에 철거해야 했습니다. 동기전투에서 개원을 해방하고 이어 천진, 북평이 해방된후 1949년7월 두만강건너 조선인민군 제5사단 군사재판소에 편입되였습니다. 심양에 있는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인민군제6사로 되였습니다 .

1950년 6월25일 조선전쟁이 폭발되자3.8선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남진길에 올랐습니다. 동해안길은 무기 나르는 차만 다닐수있는 아주 위험한 길이였습니다. 바다에는 적군함이 계속 떠있고 하늘에는 적들의 폭격기가 떠있었습니다. 일체는 밤에 행군하고 운수를 하였습니다. 남진길 그 싸움은 매우 치렬하였습니다. 그 처절한 상황을 조선의 우명한 시인인 조기천은 “세계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 태양도 피같이 타는 조선 폭격에 참새마저 없어진 조선”이라고 썼습니다 .

그때까지 우리측에는 비행사가 없었습니다 적들의 공중폭격에 전사는 희생되면서 <우리는 왜 비행기가 없습니까?>하고 소리쳤습니다. 바다로는 함포사격은 60여리까지 날아왔고 하루에 20여만발의 폭탄이 쏟아졌습니다. 비행기는 그 좁은 조선땅에 하늘을 가리우고 뜨면서 도시와 촌은 재더미로 만들었고 연소탄, 시한탄으로 불바다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나도 은페호가 무너져 흙에 깔렸으며 겨우 목슴을 유지하였습니다. 남진의 싸움은 점점 치렬하였습니다. 1950년 9월15일 미제는 영국, 프랑스 등 15개 나라의 군대를 조직하여 유엔기발을 들고 인천으로 상륙하게 되여 전선은 두동강으로 났고 전쟁국면은 급격히 악화되였습니다.

남진하던 부대는 적구에 남았는데 9월16일 락동강전선에서 미군과 리승만군대 도합 10개 사단의 진공에 조선인민군은 수많은 희생을 내였습니다. 이리하여 우리 부대는 9월23일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령부는 두개 지대로 나누고 우리는 2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틀밤 하루낮을 거쳐 목적지로 갔으나 벌써 적점령구로 되여 더 전진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사령부와는 련계가 끊어지고 산중에서 어두움을 기다려 북을 향하는 길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이 산중에는 담가에 실린 중상병들이 몇십명이나 있었습니다 계속 전진하게 되자 령도에서는 중상병들에게 동무들은 부대가 재진격해올때까지 견지하고 기다려 달라고 말을 남기고 우리 부대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적구로부터 후퇴는 100일이 걸려서야 자강도에 이르렀습니다. 후퇴는 끝이 나고 지원군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전투는 평양수복전이였습니다. 전투가 결속되였지만 거리는 여기저기에서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숙영지에 도착한후에야 산중에 남기고 떠난 부상입은 중상병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였을까?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물론 후속부대들에 의하여 잘 안치되였으리고 믿고싶지만 생각할수록 두고온 중상병들이 걸려 지금도 마음이 미여지는듯 같습니다 우리가 그 산중을 떠날때가 바로 8월 추석날이였습니다. 매년 추석날 저녁에 둥근달 쳐다보는 저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으며 눈시울이 젖어납니다. “아직도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한것입니다 .

전투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하지만 매 차례의 승리로 기쁨도 맞이하였습니다 서로 만나서 인사란 “살았구나”하는것이였고 당시 가장 반가운 인사였습니다 .

그 당시 나는 평양 사령부로 출장갈때가 많았습니다. 그날따라 련락원이 없어서 혼자 갔습니다. 일이 끝이나서 이튿날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오늘중으로 돌아오라는 급전이 왔습니다. 시간은 오후시간이였는데 백리길을 혼자서 가야 했고 큰산을 넘어야 하였습니다. 임무는 긴박하고 로정은 길지 명령에 복종하여 임무를 완성하여야지 그 무엇도 생각할 여지없이 출발했습니다. 마침 도로에서 차단소동무들의 도움으로 포탄차에 앉아 50여리가량 달려오고 달도 없는 야밤에 녀자 혼자몸으로 령을 넘어야 하였습니다. 령마루에 올라서서는 내리막길에 일체를 헤아리지 않고 쏜쌀같이 내리 달렸습니다. 여름밤이 짧다보니 동이 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초소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 정신도 나지 않았으며 권총을 쥔 손에서는 땀이 물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동무들은 그 먼길에서 혼자 이렇게 임무를 완성하고 돌아온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경지시인은 우리 연변을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연변에는 520개나 되는 렬사비가 있습니다. 모아산아래 유신촌에서부터 룡문교까지 짧은 구간에만해도 4개의 렬사비가 세워져있습니다. 연변렬사릉원에는 1만6300명의 렬사가 모셔져 있습니다. 선렬들이 흘린 피와 생명은 더 말할수 없는 수자입니다. 우리나라 위대한 령수 모택동주석의 아들 모안영도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습니다 .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아끼지않고 영용히 싸웠습니다 .

나는 한창 꽃피는 젊은 시절에 준엄한 시련과 고험을 겪었습니다. 적들과의 판가리 싸움, 치렬한 육박전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립니다. 1211고지, 치렬한 락동강전투, 엇갈리는 탐조등아래 철조망을 덮은 전우의 등을 밟으며 적들의 또치까에 날아든 병사 수류탄 한아름 안고 적들의 중형탕크 무한궤도 밑으로 육박해갔으며 우리 병사들은 꿈많은 청춘을 가슴으로 적의 화구를 막았습니다.

이 전선에는 20대 꽃나이 녀용사들도 있었습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연탄우속에서 강하가 뒤번져지고 바위마저 타번지는 고지를 점령하고 고지를 지키면서 운명을 같이한 백의전사들도 있었습니다 .

나는 선렬들의 피와 생명으로 지켜온 우리 당, 우리 조국을 끝까지 지켜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후세대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은 조국의 미래는 동무들의 것이라는것입니다.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동무들의 임무입니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나라가 부강하고 가정마다 부유해지고있을때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기고 인간은 됨됨이가 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동무들, 제가 80세 고령에 왜서 휴식도 마다하고 동무들과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말하는것이겠습니까? 난 동무들이 꼭 우리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발전시키고 또 굳게 지키나가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강근자 구술 리성복대필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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