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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학, 정강산 홍군에 있었던 조선인 대대장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4.25일 11:07
(흑룡강신문=하얼빈) 정강산(井岡山)의 이름은 강서성 서남부의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시초에는 마을 주변에 산이 둘린 지세가 우물을 방불케 하고 또 마을에 강이 흐른다고 해서 우물과 강을 합쳐 '정강산촌(井江山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현지인들의 발음에서 물 이름 '강(江)'이 언덕 '강(岡)'과 비슷하다고 해서 나중에 이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국 첫 농촌혁명근거지의 대명사로 된 것은 모택동(毛澤東)이 작성한 보고서에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1928년 11월,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서 《정강산의 투쟁》을 회부하면서 처음으로 '정강산'이라는 이 명칭을 사용했다.



모택동과 추수기의. (자료그림)

  이 무렵 당대표 모택동은 군단장 주덕(朱德)과 더불어 홍군(紅軍) 제4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약칭 홍4군(紅四軍) 즉 중국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은 1928년 4월 모택동이 인솔한 추수(秋收)기의의 부대와 주덕(朱德)이 영도한 남창(南昌)기의의 부대가 정강산에서 합류한 후 통합, 편성된 군부대의 번호(番號)이다. 정강산의 이 합류는 중국 혁명의 불씨를 확보했으며 미구에 들판의 큰 불길을 만들었다. 홍군은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등 이름으로 불리다가 종국적으로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다.

  훗날 홍4군의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사단과 군단급 간부로 성장한 경우가 적지 않다. 홍4군 초기에 대대장으로 있던 임표(林彪)는 나중에 공화국의 원수로 등극했다.

  정강산 시기의 이 홍군 대오에는 진용학(陳龍鶴)이라고 하는 조선인 대대장이 있었다. 그 역시 임표처럼 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였고 북벌(北伐)전쟁에 참가했으며 또 임표가 남창기의에 참가하듯 추수기의에 참가했다고 전하는 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진용학은 그때 그 시절의 난세에 혜성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두 부대 합류 기념비, 모택동과 주덕이 굳게 손을 잡았다.

  황포군관학교에 두 번 입학한 사람

  "진용학은 선배 학자들이 벌써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추적한 인물이지요." 사학자 최봉춘은 이렇게 진용학에 대한 학계의 연구를 일축하고 있었다.

  최봉춘은 관내 조선인의 연구에서 전문가로 꼽히는 조선족 사학자이다. 그는 진용학에 대한 사학계의 연구가 대부분은 부득불 제3자의 구술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도 기연미연(其然未然) 하고 있는데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뒷이야기이지만, 중국 최대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 백과에 진용학에 대한 소개는 겨우 300여자에 불과했다. 실제로 진용학은 출생일이나 고향이 미지수로 있는 등 세간에 남긴 흔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때부터 몇 년 후 남방의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하기까지의 짧은 경력이 그의 전부로 되고 있으니 말이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창시자 손중산(孫中山)이 1924년 5월 광동성 광주시 황포구의 장흥도에 세운 정치군사학교이다.

  이 무렵 조선인 무장독립단체 의열단(義烈團, 1919)은 중산대학(中山大學), 황포군관학교 등의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은 1924년 시작된 제3기부터 1949년 졸업한 제22기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나타난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0월 임표 등과 함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북벌에 투신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 동학록(同學彔)》의 제4기 졸업생 명부에는 진용학의 이름이 출현하지 않는다. "진용학이라는 인물이 애초부터 황포군관학교 4기생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최봉춘은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있었다.

  1926년, 국민정부가 진행한 통일전쟁인 북벌(北伐)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즉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었다. 진용학은 바로 이 무한분교 포병학과의 5기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최봉춘이 밝히고 있다. 임표처럼 이미 4기를 졸업했다고 하면 무한분교에 다시 재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악(留鄂)한국혁명청년회'의 장정(章程)에 회원 진용학은 포병과라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봉춘은 《조선일보》의 1927년 3월 16일자 기사 내용을 이렇게 소상하게 설명했다. 유악한국혁명청년회는 1927년 초 호북성에서 결성된 조선인 진보단체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무한분교는 이 청년회에 학생 모집을 위탁하고 그들이 모집한 조선인청년을 입교시키고 있었다.

  무한분교에는 역사상 5기 포병과와 6기 정치과가 있었을 뿐이다. 포병과는 광주에서 전학해온 황포군관학교 본교 5기생들이 북벌전쟁에 투신하여 무한에 도착한 후 곧 무한분교에 재편성된 것이다.



홍4군 위원들의 단체사진.

  정강산에 오른 조선인 군관

  1927년 무렵, 무한분교 포병과에는 조선인 2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국혁명청년회가 전한다. 그러나 나중에 검색되는 조선인 졸업생은 6명뿐이며 진용학은 여기에 망라되지 않는다. 진용학의 고향과 출신, 나이 등도 이에 따라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다.

  솔직히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의 구체적인 신상은 물론 정확한 수효도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인들은 입교할 때 조선과 중국의 이중 국적을 소지했고 또 만주지역 등으로 출신지역을 위장했으며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 정보망의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27년 7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 무렵 또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한 한국혁명청년회에 의해 제6기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 무한분교의 일부 학생은 엽정(葉挺), 하룡(賀龍)의 부대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 학생은 장발규(張發奎)부대의 교도(敎導)연대에 편입되었다. 이에 앞서 6월, 중국공산당은 장발규부대를 협조하여 총 지휘부 경위연대를 편성하는데, 진용학이 당의 위임, 파견을 받아 이 연대의 일원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훗날 엽정, 하룡의 부대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대개 남창기의에 참가하며 교도여단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거개 광주기의에 참가, 진용학이 소속된 경위연대는 추수기의에 참가한다. 추수기의는 남창기의와 광주기의와 더불어 1927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3대 기의이다. 공화국의 창시자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에는 조선인(족)의 피가 스며있다고 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진용학은 1927년 9월 9일 추수기의에 참가하며 이어 기의부대와 함께 정강산에 오른다. 그는 선후로 정강산에서 벌어진 오두강(五斗江), 용원구(龍源口) 전투와 영신(永新)의 3차 공격 등 유명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8년 8월, 모택동은 제31연대 주력을 인솔하여 이웃한 호남에 홍군 대오를 접응하러 갔다. 예하의 1대대는 정강산에 남아 수비를 담당했다. 이틈을 타서 국민당 군대 4개 연대의 병력이 정강산을 진공했다. 소대장 진용학은 다른 부대와 배합하여 국민당 군대의 여러 차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황양계(黃洋界) 보위전의 승리를 거뒀다. 황양계는 정강산의 북쪽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이 시기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제3자의 자세한 회억이나 증언, 기록이 없으며 따라서 영구한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그러나 진용학이 1929년 제31사단 31연대 1대대 3중대 중대장으로 (진급되어) 있었다고 하는 짧은 기술에 따르더라도 진용학의 뛰어난 전투능력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법한다.

  사실상 임표도 화려한 전투경력을 쌓으면서 북벌 시기의 소대장으로부터 남창기의 후에는 중대장, 홍4군 초기에는 대대장의 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아쉽게도 얼마 후 마침부호를 찍었다.



홍군의 유적을 따라 답사하는 사람들.

  조선인 중대장의 미스터리의 사망

  《정강산홍군인물지(人物志)》(2010, 강서인민출판사)는 정강산의 홍군열사를 소개한 권위적인 문헌이다. 이 책은 진용학이 희생된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9년 1월 (진용학은) 홍4군 주력을 따라 정강산을 떠났으며 공남(贛南, 강서성 남부), 민서(闽西, 복건성 서부)로 갔다. 1932년 4월, 홍12군은 복건성의 남부 중요한 도시 장주(漳州)를 공략하는 전역에 참가했다. 격전에서 진용학은 불행히 희생되었다."

  실제로 1929년 1월 14일, 정강산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 군대의 제3차 '포위토벌'을 타개하고 부대의 급양문제를 해결하고자 모택동과 주덕은 홍4군의 주력을 인솔하여 강서성 남부에 진군하며 공남혁명근거지를 설립한다. 1930년 봄, 공남과 민서에서 각기 공농(工農) 민주정부를 설립하며 두 지역의 지방무장은 각기 홍3군과 홍12군으로 편성되었다. 미구에 공남과 민서 두 지역은 한데로 이어지며 강서성의 서금(瑞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를 형성하였다.

  잠깐, 에피소드가 있다. 장주전역에서 홍군은 국민당 군대의 비행기 한 대를 노획하는 것. 이때 노획한 비행기를 홍군부대의 조선인이 조종했다고 공화국의 원수 섭영진(聶榮臻)이 그의 회억록에 기재하고 있다.

  "이 조종사가 운남항공학교를 다녔던 의열단 단원 장지일(張志日)로 추정됩니다." 최봉춘의 말이다.

  중앙혁명근거지의 홍군 부대에는 또 양림(楊林) 교관 등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이 여럿이나 출현하고 있었다. 이런 조선인의 대부분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고 최봉춘이 밝힌다.



모택동의 글, 한점의 불꽃도 들판의 불길로 타오른다.

  이 무렵 희생되었거나 실종된 조선인은 진용학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황포군관학교 학생이었다고 하는 최정무(崔鼎武)는 어느 한 전투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로로 되면서 홍군 대오를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진용학은 이에 앞서 이미 희생되었다고 하는 다른 기록이 있다. 해방군출판사가 1990년 출판한 《장종손(張宗遜)회억록》의 기술에 따르면 1929년 8월경 홍4군 주력은 제3종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장평(漳平)으로 진군, 첫날 소속 제7지대가 적 3,4백 명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비록 적을 격퇴했지만 이 전투에서 진용학 대대장이 중상을 입고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31연대는 서금 부근의 장정(長汀)에서 제3종대로 개편되었고 진용학은 제7지대 2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상기 회억록을 저술한 장종손은 북벌전쟁, 추수기의 등에 참가했으며 선후로 홍군 군단장, 홍군대학 교장으로 있었고 공화국 창건 후 상장 군함(軍銜)을 받은 인물이다. 장종손의 초기의 경력에는 진용학의 인생궤적과 중첩되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으며, 진용학에 대한 그의 서술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진용학의 사망 일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홍군 대대장 진용학이 장주전역에서 희생되었다는 설은 재론이 필요하다는 것.

  사실상 장종손의 기술도 그렇지만 장평과 장주는 인접하며 또 그때 그 시절 홍군은 복건성 서부와 남부에서 빈번하게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많은 전투를 벌였다. 1929년의 장평전투와 1932년의 장주전역이 혼돈되었을 가능성이 십분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12군은 진용학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장주전역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최봉춘은 진용학의 희생 시일과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 대체로 국민당 군대가 진행한 다섯 차례의 '포위토벌' 시기 즉 1930~1934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아무튼 이처럼 홍군 시절에 희생되고 실종된 장병은 수만 명으로 헤아리고 있다. 진용학은 황포군관 학생이고 북벌군이며 홍군 대대장이고 또 외국인이라는 이 특이한 다종 신분 때문에 기억의 편린이나마 만들 수 있지 않았을지 한다.

  그러나 진용학 역시 기타의 많은 무명의 홍군 장병처럼 세상에 무덤 한기는 물론이요 비석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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