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겨레홍군23]남녘땅 양림 발자취 찾아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8.29일 11:33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23)

■ 리 함

1
2006년 9월 새학기부터 절강월수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 덕에 이듬해 2007년 5월 18일 남녘땅 광주에 이르러 광주봉기렬사릉원, 로신기념관, 광주농민운동강습소, 월수공원과 중산기념비 등을 답사하고 이튿날 5월 19일 아침 일찍 서둘러 광주시 중심에서 퍼그나 멀리 떨어진 동쪽 변두리의 황포구 장주도(长洲岛)를 찾을수가 있었다. 주강(珠江)하류의 큰 섬을 이룬 장주도에는 황포군관학교옛터기념관이 자리하는데 이 기념관으로 가자면 어주부두(鱼珠码头)에서 섬으로 드나드는 륜선을 타고 장주부두(长洲码头)로 가야 하였다.



광주 장주도 황포군관학교 옛터 입구 /2007.5.19 현지촬영

주강을 넘어 장주도 황포군관학교 옛터로 가니 오전 9시 반이다. 황포군관학교로 들어가는 정문에는 “륙군군관학교”라고 쓴 검은 글 간판이 걸리여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황포군관학교 옛터 구내는 사진삼로(四进三路)의 2층건물들로 이루어졌다. 사진삼로란 네줄로 배렬된 2층 건물들이 3개의 회랑(回廊)으로 이어지며 일체화를 이루었음을 일컫는다.

기념관내에서 선참 맞아주는 인상적인 사진은 동행한 부인 송경령이 지켜보는 속에 황포군관학교 창립식에서 연설하는 손중산선생과 부인 사진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진은 북벌전쟁시기 남창공격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인 김준섭렬사 추도식 사진. 사진설명에는 “황포군관학교를 꾸린 기간 윁남, 조선, 싱가포르 등 나라의 혁명청년들이 와서 학습하고 부대를 따라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사진은 북벌군이 남창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적 황포군관학교 학생을 위해 장례를 치르고있는 장면이다.”고 씌여있었다.

또 하나의 사진은 1925년 11월 광동 조경(肇庆)에서 조직된 국민혁명군 제4군독립퇀 옛터—열강루(阅江楼) 사진이다. 제4군독립퇀이 세워질 때 양림이 참가했고 이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활동했으니 발목을 잡을만도 하다. 조경을 찾지 못하니 더욱 그러하다. 혹시라도 양림의 흔적을 흘릴라 매 하나의 사진이나 설명에 세세히 눈을 박았다.

다른 사진 하나는 “북벌전쟁중의 황포인” 제1전시관에 모셔진 주사제(周士第)의 사진. 사진설명에는 주사제가 1924년에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들어와 그해말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대원수부 철갑차대 부대장, 대장,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영장을 맡았다고 소개되여있었다. 필자가 주사제를 중시하고 존경할 때는 주사제가 양림의 전우로서 관건적인 양림 회고와 소개글을 가장 많이 남긴분인데서 기인된다고 할수 있다.

2
기념관내 “북벌전쟁중의 황포인” 제1전시관에서 끝끝내 양림의 이름을 찾아냈다. 양림의 이름은 양녕(杨宁)이라는 이름으로 “엽정독립퇀 성원중 황포군관학교에서 온 명단”(叶挺独立团成员中来自黄埔军校的名单)에 세번째 사람으로 적혀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주요성원으로 나선 제4군독립퇀에 양림이 나타나지 않을수가 있을가. 양림은 양녕, 제3영 영장, 제3기 교관, 후에 황포로 전근 등으로 밝혀졌다.

1925년 11월, 광동성 조경에서 중공광동구위가 지도하는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즉 엽정독립퇀)이 건립되였다. 주은래는 양림을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파견하였다. 그때 주은래의 지시로 퇀에 중공지부가 있고 영에 소조가 있었는데 양림이 당소조장을 겸하였다. 그는 손중산선생이 령도하는 광주혁명투쟁 당시 손색없는 조선인의 우수한 대표인물이였다.

제3영에는 3개 중대에 500여명 장병이 있었다. 낡은 군대의 물을 먹은 군관들중에는 탐오하거나 전사들을 때리고 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만큼 독립퇀 사병들 대부분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고 부대 기본이라 해도 이런저런 인원들로 조직되여 성분이 복잡한데서 갓 조직된 독립퇀은 기률이 산만하고 군벌작풍이 두드러졌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양림은 소속 제3영에서 반탐오, 반군벌 작풍 투쟁을 벌리고 정치사상사업을 억세게 틀어쥐여 부대의 그릇된 기풍을 근본적으로 돌려세우고 부대의 전투력을 크게 높였다.



황포군관학교 기념관내 엽정독립퇀 명단에 양림이 양녕(세번째 이름)으로 나온다 /2007.5.19 현지촬영

양림을 잘 모르던 시절, 필자는 여느 군관들과 달리 조선인 양림이 눈이 뜨이게 잘했다고만 보았다. 지금 보면 양림 혼자만의 성과물은 아니였다. 그때 중공광동구위와 주은래는 신생한 독립퇀에 전문 “네가지 지시”를 내렸었다. 그중 제3조가 “부대정치교육을 강화하며 사람을 때리고 욕함을 엄금한다”이고 제4조가 “탐오를 엄금하며 련의 관병들은 같은 식사를 해야 한다”이다. 이러고보면 양림은 주은래의 지시를 모범적으로 충실히 집행했을따름이다.

그 시기 고요현의 반동지주들은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수천명 지주무장을 끌어모았다. 이자들은 도처에서 농민협회를 파괴하거나 농민들을 죽이고 가옥을 불살랐으며 농민의 소와 재물을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양림은 퇀부의 지시에 좇아 3영을 거느리고 령촌과 오촌 등지에 가서 농민들을 도와 반동지주를 진압하고 지주무장을 짓부셨다. 당지 농민들은 양림이 조선사람이란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양영장은 조선사람인데 우리를 도와 반동지주와 제국주의를 쳐부십니다. 우리는 혁명을 더욱더 견지해야겠습니다.”고 하면서 농민운동에 보다 발벗고 나섰다.

필자는 기념관내 이모저모를 돌아보고 제1전시관- “북벌전쟁중의 황포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엽정독립퇀 성원중 황포군관학교에서 온 명단”이 그리도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광주 장주도 황포군관학교기념관에서 국민혁명군 제4군독립퇀 제3영 영장 양림은 하나의 빛나는 형상으로 눈부시고있었다.

3
이 나라 남녘땅 해남성 해구에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재상들이고 명현들인 리덕유(李德裕), 리강(李刚), 조정(赵鼎), 호전(胡铨), 리광(李光) 등을 기리는 “오공사”(五公祠)가 있다. 2012년 1월 24일 오전, 해남 해구와 삼아, 경해 등지에 대한 가족유람을 마치고 해구 출발을 앞둔 필자는 아들애와 함께 훈정로(勋亭路) 남쪽, 홍성호(红城湖) 부근에 자리잡은 오공사를 찾았다.



해남 해구의 오공사 입구 /2012.1.24 현지촬영

생각과 판이하게 달랐다. 상상속의 오공사는 2008년 9월 처음 나라의 최남단 해남땅을 밟았을 때 답사한 명나라 해서(海瑞)의 묘처럼 력사상 현명한 선배를 모신 일정규모의 알맞춤하고 소박한 사당(祠堂)에 지나지 않으려니 여겼는데 그게 아니다. 1월의 찬 비 내리는 오공사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련이은 여러 남녘 호수들에는 떨기떨기 연분홍 련꽃들이 화알짝 피여나 한여름이 지나면 련꽃들이 사그러지는 강남의 절강과는 전혀 다른 열대와 아열대 기후를 풍기고있었다.



오공사내 “해남력사100현전” 주체건물 /2012.1.24 현지촬영

오공사 왼쪽가는 길다랗게 뻗으며 옛스럼을 토하는 오공사와 소동파를 기리는 소공사(苏公祠), 해남력사 100현을 기리는 전시관(海南历史百贤展)들이 차례로 나타나 장중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있었다. 오공사의 오공님들 석상을 모신 구내를 지나니 해남력사 100현 전시관이 이어서는데 중국인민해방군의 한 장군의 사진과 프로필 아래 이르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군의 존함은 보고 또 보아도 분명 “주사제”(周士第) 세 글자. 주사제면 양림장군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장정도중의 홍색간부퇀 시절, 황하도하작전 시절의 전우이고 “동갑내기”인 주사제를 말하지 않는가. 주사제 프로필에는 이렇게 밝혀져있었다.

주사제 (1900—1979)

중국인민해방군 고급군사장령, 상장, 력행(力行), 주평(周平)이라고도 함. 해남 경해 구곡강 사람. 1924년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가입, 륙해군 대원수부 철갑차대 부대장, 대장 력임. 후에 북벌전쟁, 남창봉기에 참가하여 봉기군 제25사 사장을 맡고 부대를 이끌어 용감히 싸워 수차 전공을 세우며 “철군”으로 불리움. 후에 2만 5천리 장정 참가. 항일전쟁시기 선후로 팔로군 제120사 참모장, 진서북군구 참모장, 진수(晋绥)군구참모장 등 직을 력임, “모범참모장”으로 불리움. 새 중국이 창건된후 진북(晋北)야전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서남군구 부사령원, 인민해방군 방공부대 사령원 등 직을 력임, 1955년에 상장군함, 1급 8.1훈장, 1급 해방훈장을 수여받음, 1979년에 병사, 향년 79세.



해구 오공사내 “해남력사100현전”의 주사제장군 사진과 프로필 /2012.1.24 현지촬영

사실 해구의 오공사 100현 전시관을 찾기전까지만도 필자는 주사제장군이 양림을 회고한 몇편의 글을 쓰고 평가를 내린분으로 알았지 해남 경해 사람이라는것까지는 모르고있었다. 바로 어제 2012년 1월 23일, 일부러 시간을 내여 해구서 102키로메터 떨어진 경해로 가서 “홍색랑자군” 발자취를 전문 답사하여보았지만 홍색랑자군의 고향 경해가 주사제장군의 고향임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경해를 현지답사하면서도 감감이였으니 무지의 후회만이 가슴을 긁어내린다. 그래도 완전 늦지만은 않다고 주사제장군이 해남력사 100현 전시관에 나타나 필자를 사로잡지 않는가.

4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아들애는 어인 영문인지 모르고있지만 필자는 흥분으로 가슴을 달구었다. 이제 정식 집필을 시작할 《양림평전》의 서두를 이곳 해구 오공사의 “해남력사 100현 전시관” 주사제상장으로부터 시작하는것, 주사제장군으로부터 양림과의 관계를 밝히면서 양림장군에 대한 최고평가를 끌어내는것이다. 그러니 양림평전 집필을 다 끝낸것처럼 가슴이 후련하다.

주사제장군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나 되는 48년전에 벌써 관련 방문자를 통해 양림방문기록을 남긴 장군으로 필자의 마음에 자리잡고있는분이다. 그날이 1964년 6월 23일이니 그날의 방문기록에서 주사제장군은 양림 즉 “필사제렬사는 조선인이고 1925년에 25세이다. 내가 기억하건대 그는 나와 동갑이였다. 그는 일찍 조선에서 중국에 와서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중조인민의 공동해방의 신념을 안고 중국의 혁명사업에서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고 시작하면서 자기와 필사제는 3개 시기를 걸치면서 같이 뛰고 전투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3개 시기를 말하는 첫 시기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양림의 독립퇀 시절이다. 1925년 11월에 중국공산당은 광동 고요현에서 당이 직접 지도하는 혁명군대—엽정을 퇀장으로 하는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을 조직하였는데 조선인 양림이 독립퇀 제3영 영장 겸 당소조장을 맡았었다.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인 주사제가 독립퇀 제1영 영장이여서 주사제와 양림은 서로 잘 알고있었고 친밀한 전우였다.

둘째 시기는 홍군장정길의 홍색간부퇀 즉 중앙군위 간부퇀 시절이다. 이 시절 간부퇀 참모장은 양림이고 간부퇀 상간대(上干队) 대장이 주사제였다.

셋째 시기는 홍군장정을 마친 뒤 동정항일시기인 홍15군단 시절로서 이 시절 주사제는 홍15군단 참모장이고 양림은 홍15군단 75사 참모장이였다. 이같이 주사제와 양림은 홍군대오속의 전우이기도 하고 서로 상하급관계이기도 하여 서로를 익히 알고있었다. 1936년 2월, 양림이 황하를 건넌 동정항일에서 쓰러졌을 때 만나주고 서로 나눈 최후의 대화를 나눈이도 주사제였으니 그날의 홍15군단 황하도하사령원이였던 주사제장군은 황하도하작전과 자기의 조선전우—양림을 이렇게 평가하였었다.

-이는 중국공산당과 모주석이 령도하는 중국혁명인들이 창조한, 력사에서 있어본적 없는 기적이다. 국제주의, 공산주의의 삐스키동지는 이런 기적을 창조한 중요한 일원중의 한 사람이다. 삐스키동지의 정신은 죽지 않고 영원히 중조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이는 주사제장군 한분의 평가가 아니다. 이는 중국혁명에 쓰러진 한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민의 평가이며 중국공산당의 평가이다. 조선인 양림장군은 이런 평가를 받을만한분이였다. 하기에 지난해 2011년 여름 필자가 중국작가협회 중점작품지지(부축으로 되였음) 보고로 《양림평전》 보고를 올렸을 때 《양림평전》이 연변작가협회서 만장일치 추천통과를 받았고, 2011년 12월 7일에는 중국작가협회 전문가 론증과 서기처 심사비준으로 전국중점작품부축 98개 항목의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지니기도 하였다.

이는 필자를 지대히 고무해주었는데 해남 해구의 오공사를 찾으니 주사제장군이 또 힘있는 지지를 준다. 이런 고무와 지지속에 《양림평전》이 해남 해구의 오공사 주사제장군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오공사의 주체건물에 오르니 오공사 뜰에 흰 매화가 활짝 피여 반겨준다. 대학 교편을 잡은 절강의 강남땅에서는 아직도 한달쯤이 지나야 피여날 흰 매화가 우리 부자앞에서 하늘하늘거린다.

2016년 8월 12일 재정리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89%
10대 0%
20대 6%
30대 39%
40대 28%
50대 11%
60대 6%
70대 0%
여성 11%
10대 0%
20대 11%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트로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김호중'이 최근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그의 소속사 대표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니저에 김호중을 대신해 경찰에 출석하라고 지시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호중은 지난 9일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사실은 유부남, 자녀도 2명" 손태진, '불타는 트롯맨' 의혹에 솔직 고백

"사실은 유부남, 자녀도 2명" 손태진, '불타는 트롯맨' 의혹에 솔직 고백

사진=나남뉴스 '불타는 트롯맨' 우승자 손태진이 소문으로 떠돌던 유부남 의혹에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오는 17일 방송하는 MBN '전현무계획'에서는 전라도 로컬 맛집 검증에 나선 전현무, 곽튜브, 손태진이 등장한다. 손맛으로 유명한 전라도 제철 맛집은 광주, 나

"시부모님 백화점 오너" 김정은, '♥연봉 10억 남편' 직업 공개 깜짝

"시부모님 백화점 오너" 김정은, '♥연봉 10억 남편' 직업 공개 깜짝

사진=나남뉴스 배우 김정은이 연봉 10억원을 받는 자산가 남편의 직업을 밝혀 이목을 끌었다. 지난 15일 이경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르크크 이경규'에는 배우 김정은이 게스트로 출연해 토크 시간을 가졌다. 평소 홍콩에 머무른다고 알려진 김정은에게 이경규는 "

"돈 필요 없어요" 김호중 팬카페, 뺑소니 논란 속 기부했다 '퇴짜 당해'

"돈 필요 없어요" 김호중 팬카페, 뺑소니 논란 속 기부했다 '퇴짜 당해'

사진=나남뉴스 가수 김호중이 뺑소니, 운전자 바꿔치기, 음주운전 의혹 등 각종 논란에 휘말린 가운데 팬클럽의 기부금이 전액 반환된 사실이 알려졌다. 이날 16일 김호중의 팬클럽 '아리스'는 학대 피해를 당한 아동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비영리단체 희망조약돌에 기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