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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60년]추억속 화룡농촌영화방영대 사람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6.14일 13:13
기획-기억속의 60년

다시 떠올려보는 화룡현농촌영화방영대 이야기

《기억속의 60년》을 추억하는것은 아리숭하면서도 재미있고 잊어버릴것 같으면서도 흥미롭고 아름다운 일인것 같다.

어린 개구쟁이 시절부터 영화관람을 유별나게 좋아했고 농촌영화방영대원들이 화식을 전담했던 시골집에서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 들었던 사연, 1960년대에 화룡현 로과향 리수완전소학교에서 현 제1영화방영대 조선말 해설원 최영복씨(몇해전 사망)를 초청해 서장에 다녀온 《청취보고모임회》에서 들었던 감명깊은 이야기, 그리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영화필림도자록음해설기(影片涂磁录音解说机)를 사용해 전국 소수민족중에서 인기가 높았던 일… 지난간 기억을 떠올릴수록 그리워지는 농촌영화방영대였다.

기억을 찾아 필자는 선후로 최호선(80세, 원 화룡현영화계통 원로, 기사), 김종하(75세, 원 화룡현영극원 경리, 해설원), 황장길(61세, 원 화룡현농촌방영대, 현영극원에서 근무했음), 양정강(화룡시문화신문출판 및 체육국 과장)등 해당 인원들을 모시거나 찾아다니면서 화룡현제1영화방영대에 대해 알아보았다.

화룡현영화방영계통의 최호선, 김종하 등 원로들을 찾아 취재하고있는 필자(왼쪽).

화룡현제1영화방영대는 1954년 2월에 설립되였다. 초창기 4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언제 한번 집에서 푹 쉬여볼 겨를이 없이 일년사철 전심전력으로 농촌군중을 위해 복무하였다. 소수레에 영사기와 이불집을 꿍져싣고 화룡시가지와 멀리 떨어져있는 용화향, 덕화향, 로과향, 숭선향 등 4개 변강구역내 50여개 마을의 영화방영과업을 맡았다. 보다 많은 마을과 보다 많은 사원들의 영화관람수요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험산준령을 넘고 울퉁불퉁한 수레길과 올망졸망한 발구길을 거닐면서 편벽한 산간마을에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1957년 4월, 아직도 밖에는 한기가 가실줄 몰랐다. 화룡현 백리촌에서 청산촌을 목적지로 떠났다는데 글쎄 60리되는 산길을 이튿날 아침 6시에 도착했다니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최호선로인에 따르면 당시 현사(현공소합작사)에 낡은 쏘련제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차를 빌려서 백리촌에서 영사기를 싣고 아침 8시경에 청산촌을 향해 떠났다. 차가 청산령에 이르렀을 때 자동차가 너무 헐망해 힘이 약하고 올리막이 강하여 쩍하면 헛바퀴질하고 툭하면 길옆에 빠졌는데 생나무를 찍어서 자동차바퀴에 깔면서 10리되는 령꼭대기까지 올라서니 이미 이튿날 새벽이더란다.

내리막길에 들어서서는 자동차가 헤드라이트가 없으니 영화발전기를 작동하여 그 전기불을 자동차 앞길에 비추면서 천천히 내려오는데 운전수는 물론 방영대 일군들마저도 손에 땀을 쥐고 내려왔단다. 고생하며 내려오던 도중 행운스럽게 백리촌에서 벌방마을 어느 촌에 시집을 왔다가 본가집에 엿(이전에 시집와서 첫걸음으로 본가로 갈 때 정성들여 만든 례물)을 한임 해가지고 가는 새각시를 만나서 그가 고맙게 넘겨주는 엿을 깨여먹으면서 계속 내려왔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용케도 촉한을 견뎌냈다는 생각에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난다고했다.

1950년대 영사기를 메고지고 험산준령을 넘나들던 화룡현영화방영대 사람들.

1960년대 소수레에 영사기를 싣고 눈길을 헤쳐 농촌마을을 찾아가군 했다.

용화향의 광덕령과 수레목령, 상화의 차돌배기령, 험악하고 아츨한 가막바위의 화산암 자연층계길, 가파롭고 아슬아슬한 덕화향의 파암령길, 독수리바위기슭의 내리꼰질듯한 도문강역 오솔길, 로과향의 호곡령 갈지자(之)길, 숭선향 시만 골짜기에서 옥석골로 통하는 나무밭 좁은 길, 여름철이면 시만에서 석인으로 통하는 등에 성화에 참기 어려웠던 길고도 높은 령길, 좁은 길과 승냥이가 출몰해 오싹했던 회재의 산꼭대기길 등 험로를 도보거나 톺아오르기까지 무릇 인가가 있는 곳이면 그 어떤 험난한 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영화를 돌려 광범한 사원들의 물질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독특한 조선말 해설로 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영화방영대에서는 영화상영하러 농촌에 내려갈 때 당지에서 전형적인 인물과 본보기가 될수 있는 사건(사실)을 심입 료해한후 환등의 그림과 해설사를 작성하고 광범한 사원들에게 선전하여 좋은 효과를 보기도 했다.

지난세기 1965년 7월 화룡현 로과향 리수 3대 원종학은 소사양 모범인물이였다. 원종학을 취재선전해야 하겠는데 그는 마을에서 5리 너머되는 곳으로 소꼴 베러 가고 없었다. 원종학은 말없이 소사양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 소를 잘 길렀기에 사원들의 호평을 받았다. 원종학의 선진사적을 당날저녁 환등으로 방영하기 위하여 그들은 원종학사원을 찾아떠났다. 초행길이여서 가는 길 힘들어도 끝내 그를 찾아가 취재를 마친 뒤여야 땀방울을 흘리며 돌아왔다.

《묵묵히 일 잘하는 소사양원 원종학》. 그날 저녁 영화상영에 앞서 환등에서는 이런 제목을 달고 자막과 함께 원종학사원이 소구유에 소먹이를 주는 장면과 소가 그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 및 선진사적을 생동하고 감칠맛나게 선전했다.

《그 사람에 그 황소요!》 저녁에 환등을 관람하던 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너무도 생생하게 그린 환등화면에 나온 사람과 소를 쳐다보며 오래동안 찬탄을 금치 못했다.

1966년 초여름 화룡현영화발행소에서는 영화필림도자록음해설기(影片涂磁解说机, 아래에 해설기로 략칭함)를 만들어낼 의향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조선족과 한족 두 민족간에 해설문제때문에 인기되는 모순을 해결해주는 대사였다. 이때문에 그들은 즉시 상해, 북경, 복건 등 영화제작촬영소를 돌아다니며 각종 기자재를 구입한후 고심참담한 노력과 끈질긴 사업열정으로 끝내 해설기 시험제작에 성공했다.

이때로부터 화룡현제1방영대는 처음으로 조, 한 두개 민족이 동시에 한개 장소에서 서로 자기 민족의 말로 영화를 관람할수 있게 했다. 1966년에 방영대의 최영복과 리흥석동지는 해설기를 가지고 동북3성 농촌영화선전회에 출석하여 회의참가자들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연후에는 또 심양, 장춘, 할빈 등지에서 3개월 남짓이 순회방영전람을 진행하였다. 상급 해당 일군들도 이에 대해 중시를 돌렸는데 당년 중앙문화부에서는 이들을 요청하여 직접 해설기를 작동하는것을 보았고 동시에 제1방영대의 최영복, 리흥석동지는 국가문화부 부장 륙정일 등 해당 지도동지들의 접견까지 받았다.

1960년 화룡현영화방영대의 리흥석대장은 모주석 등 국가지도자들과 기념사진도 남겼다.

특히 경하해야 할것은 서장에 가서 해설기를 보여주고 해설기법과 요령을 전수하고 그들에게 허다한 경험을 소개해주어 그들의 영화해설사업이 보다빨리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고 그곳 소수민족속에서 영화해설사업이 보급되게끔 한것이다. 추호의 사심도 없는 그들은 따뜻한 동지애, 두터운 일터애로 동료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였기에 동업종은 물론 광범한 변강인민들의 존경과 애대를 한몸에 지녔다. 후에는 광서남녕시에서 열렸던 전국 영화필림도자록음해설회(全国影片涂磁录音解说会)에 출석하였고 선후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민족언어방영선진집단》으로 명명되고 전국 문교계통 군영회에도 출석하는 영예까지 받아안았다.

1996년까지 40여년간 존재했던 화룡현제1영화방영대는 혁신적이고 선행적인 우리 말 해설 및 제일 처음으로 영화필림도자록음해설기 시험제조에 성공한것으로 하여 서장, 광서 소수민족자치구에까지 초청돼서 해설을 지도하고 경험소개를 했으니 그들은 정녕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민족을 홍보한 자랑찬 우리의 영화발행대였다.

비록 화룡현제1영화방영대는 시대의 발전과 력사의 흐름에 따라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지만 그 시대의 화룡현농촌영화방영대의 일군들과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허다한 화룡인민군중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영화필림과 더불어 그들을 기억하고있을것이다.

/백운심(필자는 화룡시국가세무국에서 근무)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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