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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 북한인 → 한국인 → 중국인 … 내 조국은

[기타] | 발행시간: 2013.04.29일 01:33

[스토리텔링 리포트] 탈북자 2만5000명 시대 … 나종현씨의 잃어버린 53년

탈북자(새터민) 2만5000명 시대. 연간 1000~2000명이 북한을 탈출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탈북자의 고통과 애환을 외면합니다. 나종현(53·가명)씨의 사연은 탈북자 의 실상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단초를 제시합니다. 이 기사는 취재를 토대로 1인칭 소설 형식으로 작성한 스토리텔링 리포트(Storytelling Report)입니다. 나씨 인터뷰는 지난달 17일 중국 선양(瀋陽) 에서 진행됐습니다.

뒤돌아봐도 앞을 봐도 치미는 슬픔

지난달 17일 밤 중국 선양의 서탑 거리를 걷고 있는 탈북자 나종현씨의 뒷모습. 왼편으로 북한 식당인 '평양관'과 인공기 간판이 보인다. 나씨는 “인공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라고 했다. [선양=정강현 기자]

 내 조국은 어디일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버스는 길 잃은 고양이처럼 허둥대며 도시를 빠져나왔다. 나는 중국 선양(瀋陽)의 어수선한 밤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도시의 허랑한 밤공기는 종종 나를 질식 직전의 상태로 몰고가곤 했다. 버스는 선양을 벗어나 단둥(丹東)으로 달리고 있었다. 2012년 11월의 어느 늦은 밤, 겨울을 재촉하는 찬바람이 몰려들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내 이름은 라재봉이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중국에선 아무렇게나 발설돼선 안 될 것이었다. 나는 탈북자니까. 공안에 발각되는 순간 즉시 북송될 테니까.

 이름이라면 내겐 또 하나가 있다. 나종현. 덧붙여 이런 번호까지도. 600320-105XXXX.

 내 한국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나는 2007년 탈북한 뒤 한국에 입국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한국 생활은 3년도 채 채우질 못했다. 2010년 말 한국 국적을 잃어버리면서 나는 중국에 갇힌 신세가 됐다. 한국에서 지낼 때 이런저런 희망으로 부풀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벅찬 추억들을 영영 되찾을 순 없는 걸까. 단둥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삼켜내고 있었다.

중국 살다 열다섯에 '약속의 땅' 북으로

나씨의 북한 공민증. [선양=정강현 기자]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평안북도 피현군에서 살았다. 1975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한국 전쟁통에 중국 랴오닝(遼寧)성 안산(鞍山)시에 정착했던 가족들을 북한으로 이주시켰다. 이중 국적이었던 우리는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북한 국적을 택했다. '북조선은 약속의 땅'이라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림의 땅으로 판명 났다. 결혼을 하고 외아들까지 낳았지만 살길은 자꾸만 막막해져 갔다. 90년대 중반이었나? 나는 피현군의 한 공장에서 베어링을 만들며 겨우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김정일 정권이 '고난의 행군'이란 말로 배고픔을 강요하던 때였다. 옥수수 하나로 세 식구가 하루를 버티는 날들이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 TV를 몰래 보면서 남한의 풍요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우리 세 식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국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쿵쿵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안이었다. 이웃에서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날로 나는 단련대로 보내졌다. 남한 방송을 보다가 적발되면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배라도 한번 불러보고 죽자. 먼저 한국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빼와야겠다.'

 단련대에서 나는 탈북을 결심했다. 관리원 동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산중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001년 겨울, 해가 느릿느릿 저물고 있었다. 10시간쯤 걸었을까. 조그만 섬마을이 나타났다. 평북 영주군 가사도였다. 그곳에서 나는 2년간 막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가기 위한 '탈북 자금'이었다.

굶주림 견디다 못해 남으로 탈출

 나는 2003년 11월이 돼서야 중국으로 건너갔다. 내게 일감을 주던 선장을 따라 중국 둥강(東港)에 들어갔다가 몰래 달아났다. 논바닥 볏집에서 잠을 청하고, 빈집에서 밥을 훔쳐 먹으며 9일을 꼬박 걸어 안산에 도착했다. 30여 년 전 우리 가족이 살았던 마을이었다. 다행히 어릴 적 알고 지내던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할 테니 한국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지내게 해주시오.”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농사일부터 보모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탈북자들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는 풍문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조마조마한 시간들이 무심한 척 흘러갔다.

 그렇게 4년쯤 지났을까. 어렵사리 탈북 브로커를 만날 수 있었다. 중국 돈 1만 위안(약 180만원)을 내고 나는 중국 국적을 불법 취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여권이 나왔고, 2007년 12월 27일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몇 달 뒤 나는 서울 수서경찰서를 찾아가 탈북 사실을 자진 신고했다. 국가정보원 조사를 받고, 하나원 118기로 탈북자 교육을 수료했다. 북한인 '라재봉'이 한국인 '나종현'으로 거듭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선 지게차 운전을 하며 밥을 벌었다. 한국은 일한 만큼 대가를 주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굶주림이 없는 곳이었다. 쌀밥을 삼킬 때마다 피어오르는 슬픔으로, 나는 쩔쩔맸다.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이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족들을 탈북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가족 탈북시키려다 되레 중국서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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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중국 다롄(大連) 공항은 한기(寒氣)로 팽팽했다. 나는 다롄에서 가족을 탈북시킬 브로커를 만날 요량이었다. 대한민국 여권을 내밀고 입국장을 들어설 때였다. 중국 공안이 나를 불러세웠다.

 “당신, 북한 사람 아니오?”

누군가 나의 탈북 행적을 아는 이가 중국 공안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한국 영사관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공안은 막무가내였다. 여권과 휴대전화부터 빼앗았다. 공안은 나의 탈북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문득 몇 년 전 불법 취득했던 중국 국적이 떠올랐다. 혹 중국 국적이 전산에 남아 있다면 풀려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중국 국적 번호를 댔다.

 “뭐야, 중국 국적자잖아?”

 돈을 주고 샀던 중국 국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공안으로선 달리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꾸며냈다.

 “한국 여권은 돈을 주고 산 가짜입니다. 그게 들통 날까봐 중국 국적을 숨겼습니다.”

 나는 벌금 3000위안(약 5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내 한국 여권은 영사관 측으로 넘어갔다. 영사관에선 돈을 주고 샀더라도 중국 국적이 남아 있는 한 한국 국적을 유지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주민등록도 말소된다고 했다. 조만간 한국 정부가 나를 추방 조치할 거란 얘기도 있었다. 중국 국적을 보유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탈북자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갈 곳을 잃었다. 가족을 탈북시키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도리어 내가 중국에 갇혀버린 꼴이었다.

 나는 중국 안산시로 돌아갔다. 다시 남의 집에서 밥을 빌어먹는 일상이 시작됐다. 북한 당국은 탈북자 색출을 하겠다며 중국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공안의 탈북자 명부에 내 이름도 이미 올라 있을 터였다.

 이듬해 4월 나는 태국행을 결심했다. 태국에만 들어가면 곧장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 선양에서 탈북자 11명과 함께 태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때때로 걸어서 산을 넘거나 헤엄을 쳐 강을 건너기도 했다. 선양에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 치앙라이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다.

 태국 이민국에서 몇 가지 조사를 받았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한국 영사관으로 인계됐다. 나는? 불법 입국자로 분류돼 유치장에 갇혔다. 나는 한때 탈북에 성공한 한국 국민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나는 한때 북한에 살았던 공민이었지만, 이제는 탈북 낙인이 찍힌 배신자였다. 나는 태국 감옥에서 1년6개월간 복역한 뒤에야 겨우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2012년 10월, 중국의 가을은 잔혹했다. 내가 당장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나는 다급했다. 한 달 만에 탈북 브로커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나는 괜찮으니 우리 가족들부터 탈북시켜 주시오.”

용철아~ 10년 만에 압록강서 만난 아들

 내 조국은 어디일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지난 10여 년간 중국과 한국·태국을 떠돌았던 내 참혹한 운명을 떠올리는 사이 버스는 단둥 터미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단둥 인근 압록강 유역에서 외아들과 누나·조카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태 전 내가 중국에 갇히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탈북이 이뤄질 참이었다.

 어둑새벽의 압록강은 어떤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멀리서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들이었다. 10년 만에 만나는 내 새끼, 우리 용철이었다. 용철이는 너덜너덜해진 외투를 감싼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용철아, 이놈아….” 쉰둘 아비가 스물여덟 아들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오래 침묵했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세월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고요한 울음 소리가 압록강 둘레를 떠돌고 있었다.

가족은 한국 품에 … 난 중국서 떠돌이 신세

 용철이와 누나·조카들은 이후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지금 하나원에서 탈북자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중국에 은신 중이지만 가족들이라도 탈북에 성공한 것에 감사하며 지낼 따름이다. 내 조국은 어디일까. 나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이 중국 상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이 물음의 구름떼가 한반도로 무사히 건너가기를, 나는 기도했다.

선양=정강현 기자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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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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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언젠가는 가족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답글 (0)
참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언젠가는 가족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답글 (0)
정말 이런일이 있는건가? 매일 텔레비에서 선진국이라고 자칭하면서 대한민국이라고 부르짓는 한국이 제 국민하나 제대로 건사못해서 중국에서 떠돌게하는가? 대한민국,,,,,大韩民国没戏了 이렇게 밖에 얘기 안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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