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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0]3로군의 출중한 지하공작자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5.13일 10:49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0)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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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 6군, 9군, 11군으로 무어진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의 력사기재에 따르면 3군 재봉대 10여명 녀전사들 거개가 조선족으로 무어졌다. 3군부대의 제1임 재봉대 대장이고 출중한 지하공작자인 공산당원 진정산(陈静山)도 에누리없는 조선족이다. 진정산의 고향, 가족관계, 래력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고있지만 진정산이 3군 재봉대 대장으로 있을 때의 활동상황에 대해 력사에 똑똑히 밝혀져있다.

1936년ㅡ1937년 그 시절 항일련군 3군 정치부 선전과 과장으로 활동한 우보합(于保合, 1914一1985)은 1936년의 진정산은 나이가 30여세이고 키가 1.60메터에 달하는 조선족녀성이며 일솜씨가 뛰여나고 재봉기를 익숙하게 다루었다고 회고했다. 우보합은 길림성 이통현(伊通县) 출신이고 만족으로서 1937년 7월에 6군 재봉대의 리재덕(李在德)과 결혼한 사람으로서 3군내 재봉대 녀전사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진정산의 회고자료를 남긴 다른 한사람은 흑룡강성 룡강부(龙江府, 오늘의 齐齐哈尔市)출신이고 당년 선후로 공청단대련시위서기, 공청단주하중심현위(珠河中心县委) 선전부장과 서기, 중공북만림시성위 청년부장으로 활동한 주신양(朱新阳, 1912ㅡ2003)이다. 진정산 관련자료를 보면 주신양은 진정산의 다른 이름은 녀진(女陈) 또는 진정지(陈静芝)라고도 불리였지만 본명은 진씨가 아닌 장정지(张静芝)라고 말하고있다. 주신양은 또 녀진이라고 널리 불리운것은 남편이 진씨였기때문이라면서 항일련군 2군에서 넘어온 녀전사라고 밝히였다. 두정넷(豆丁网,2013.1.21)에 오른 《학성(鹤城) 100년부녀운동사기념 100명건국(巾帼)공훈, 건국모범후선인 명단》에 의하면 진정산의 다른 이름은 리숙진(李淑珍)으로 나타난다. 아직까지 진정산의 남편 진씨를 알리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우보합과 주신양의 회고로부터 우리는 진정산의 출생이 1901ㅡ1906년사이이고 본명이 장정지이며 연변의 항일련군 제2군에서 3군으로 넘은 조선족녀전사임을 헤아려볼수가 있다. 진정산이 3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한것은 1936년 5월경의 일이니 재봉대는 통하현 청하 소고동골의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았다. 청하 소고동은 오늘의 할빈시 통하현 청하진 소고동촌(通河县清河镇小古洞村)을 말한다. 그 시절 3군 재봉대 녀전사인 김옥선(金玉善)은 1984년 8월 자기를 찾은 소봉란(苏凤兰)등과 자기는 1918년생 평안북도 출신이고 통하현 이도하자(二道河子)사람으로서 1936년 8월에 항일련군 3군에 가입하였다.

재봉대는 소고동골의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았다. 매우 음페적이여서 웬간한 사람은 찾을수가 없다. 재봉대실은 높은 산기슭에 판 귀틀집으로서 옹근 나무로 벽을 만들었다. 귀틀집 대부분은 땅에 묻히고 일부분만이 땅우에 드러났다. 지붕은 나무껍질과 나무가지로 덮히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아예 발견할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니 아주 비밀진 곳이였다. (통하문사자료 제5집. 내부발행. 1990년 4월 인쇄, 제117ㅡ118페지)

이 방문기에서 김옥선은 3군 재봉대의 위치와 밀영구조를 보는듯이 밝히여 보다 깊이 리해하도록 이끌어준다.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가 자리잡았던 탕리천밀영 표시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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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년간 인터넷을 덮는 3군 재봉대 관련자료를 보면 재봉대 시초의 녀전사는 진정산, 김백문(金伯文), 왕정평(王正平), 우연수(于燕秀), 우계진(于桂珍), 우수진(于秀珍), 강신옥(姜新玉) 등 7명(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시말. 新浪博客, 2012. 4.28)으로 나타나며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김옥선의 회고는 다르다. 김옥선은 재봉대의 최초 7명은 진정산, 장의숙(张义淑), 곽숙진(郭淑珍), 리종부(李钟孚), 김호련(金浩莲)과 자기,후근일을 맡아보는 고씨(顾氏)라는 분 등 7명이라고 회고한다.

3군 재봉대 관련자료를 보면 1936년 9월에 통하현에서 홍명숙, 김벽영, 장경숙, 김옥선, 장희숙, 박경숙(洪明淑、金碧荣、张景淑、金玉善、张熙淑、朴景淑) 등 녀전사들이 새로 재봉대로 오면서 3군 재봉대 녀전사들은 15명으로 늘어나며 이들 15명중 11명이 조선족이라고 지적하여 무척 주의를 끈다. 이들가운데서 큰언니로 불리우는 진정산은 녀전사들 모두를 친자매로, 한가족으로 사랑하며 받들었다.

재봉대에는 시초 일본제 낡은 재봉기 한대밖에 없었고 재봉기를 다룰줄 아는 사람도 진정산 한사람뿐이였다. 한데서 진정산은 낮과밤이 따로없이 재봉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재봉대를 몇개소조로 나누어 륜류로 작업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재봉대 녀전사 김백문(원명 김정순)의 회고에 따르면 후근을 맡아보는 남전사는 둘인데 그들은 워낙 3군 군부에서 수십리 떨어진 심산속 산막에서 살던 지방사람들이였다.

나이가 듬직한 사람은 염씨(闫氏)이고 그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는 30여세의 나그네였다. 그들은 인연이 미치지 못하는 심산밀림속에 뙈기밭을 일구어 옥수수나 호박, 감자 따위를 심거나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있었다. 3군 재봉대가 그들 심산속에 나타난후 통나무를 찍어 간편한 귀틀집을 하나 지으니 이 귀틀집이 재봉대실로 되였다. 사람들은 염씨를 염감독이라 부르고 그보다 어린 사람을 작은 감독이라고 불렀다. 진정산의 제의로 재봉대 후근을 맡아나선 염씨네 두 남자가 재봉대를 둘러싼 심산속 여기저기에 덫을 놓거나 굴을 파는 등 방법으로 노루나 곰, 산돼지 등을 잡아서는 재봉대를 망라한 3군 밀영의 육류나 기름 등 문제들을 해결하군 하였다.

그 시절 3군 재봉대 녀전사 류숙진(刘淑珍)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재봉기는 시초의 한대로부터 세대로 늘어났다. 한대는 손으로 돌리는 재봉기이고 두대는 발로 디디며 돌리는 재봉기였다. 재봉대의 녀전사들은 서로 분공하여 재단하기도 하고 군복과 군모를 만들기도 하고 탄띠를 만들거나 낡은 군복을 깁기도 하면서 서로 손을 맞추며 돌아갔다.

재봉대 녀전사들의 재봉작업은 모두가 수공작업이고 솜이나 천 등은 산림경찰대대거나 왜놈들 후근물자를 로획한 전리품들이였다. 천은 거의가 흰강목이여서 진정산은 산속에서 황경나무와 참나무 등 껍질을 벗겨다가 속껍질과 강목천을 함께 삶으며 누런 물이 들도록 하였다. 다음 이런 천들을 내다가 말리우면 제법 군복이나 다름 없었다. 진정산과 재봉대녀전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3군부대의 군복문제는 비교적 순조롭게 풀렸다. 재봉대는 또 부대내의 상병원들을 돌봐주어 후방병원의 역할까지 하였다.



오늘의 탕리천밀영 자리에는 북만림시성위 표시석도 서고있어 (자료사진)

진정산연구에서 밝히고 넘어야 할 문제는 3군 재봉대의 지점문제이다. 본문 김옥선회고에서도 밝혔지만 진정산이 재봉대 대장으로 있을 때의 3군 재봉대는 통하현 청하진 소고동골의 심산밀림에 있었다. 재봉대 녀전사였던 김옥선의 회고도 그러하고, 항일련군 제3군의 전신이였던 동북반일련합군 연구자료들에서도 이렇게 썼다. 동북반일련합군 시절 이들은 부대밀영을 통하현의 대고동과 소고동 심산속에 설치하였는데 소고동밀영은 1935년 11월에 조상지와 리연록이 소속부대를 이끌고 소고동골로 오면서 세워지고 대고동밀영은1936년 정월초에 세워졌다.

대고동밀영과 소고동밀영 두 밀영가운데서 소고동밀영이 비교적 큰데서 반일련합군의 재봉대와 무기수리소 등 후근기관들이 모두 소고동밀영에 자리잡았다. 재봉대의 제1임 대장 진정산은 당연히 소고동밀영의 재봉대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의 모든 연구자료들도 3군 재봉대의 지점은 통하현 소고동골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덮고있는 진정산 관련글이나 3군재봉대 관련글들은 통하현 청하진의 대고동과 소고동은 전혀 언급도 없이 재봉대는 1936년 8월, 소서림하(小西林河) 상류의 심산밀림속 로도묘골, 랑랑궁(老道庙沟娘娘宫) 일대에서 정식으로 조직된것으로 대서특서한다. 로도묘골과 랑랑궁은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에서 18킬로메터되는 홍성촌 동남산 북쪽비탈(西林区18公里红星村东南山北坡山脚处)에 위치하고있으며 탕리천(糖梨川) 항일련군 3군 재봉대라고도 불리운다. 3군의 후방류숙처는 진작 탕리천에 자리잡고있었는데 랑랑궁과의 거리는 산 하나를 사이두고 있을뿐이다.

로도묘골 랑랑굴설은 동북반일련합군으로부터 항일련군 3군에로 이르는 3군의 발전력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1935년 11월, 소속부대ㅡ동북반일련합군을 거느리고 통하현 청하지구에 이른 조상지는 《밀영이 있어야 토대가 있고 발을 붙일수 있다. 소흥안령 남쪽에 위치한 청하지구가 항일근거지 건설에서의 가장 리상적인 지대》라면서 대고동골, 소고동골을 중심으로 밀영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청하지구와 주변지구 20여곳에 3군의 밀영들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섰다. 이어 3군이 1936년 8월 1일, 항일련군 제3군으로 확대개편되고 소속 10개사가 통하, 탕원, 의란, 벌리, 보청 등 광활한 지대에서 활동함에 따라 소흥안령 심산지대를 중심으로 보다 많은 밀영들이 건설되였다.

탕리천(汤梨川) 3군 재봉대밀영(모아산밀영이라고도 한다)도 그 가운데의 주요한 하나로 알려진다. 1936년 여름 항일련군 3군에서는 겨울군복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의 이춘시 서림구(西林区)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 모아산에 탕리천밀영을 새로 일떠세우게 되였다. 5군에서 넘어온 조선족녀전사 김백문(金伯文)이 3군 재봉대 당지부서기로 활약한 것은 탕리천 밀영시절의 일이다.



흑룡강성 눌하시 일각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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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0월, 중공강소성위서기 양광화(杨光华)가 중공상해중앙집행국(中共上海中央执行局)의 파견으로 할빈에 가서 중공만주성위서기로 부임한후 중공상해중앙집행국 기관은 파괴를 당하고 중공만주성위와 중공중앙과의 련계가 끊어졌다. 1935년 4월, 중공만주성위서기 양광화와 성위 선전부장 담국복(谭国福)이 중공주재 국제공산당(共产国际) 대표 왕명(王明)과 강생(康生)에 의해 쏘련에 소환되여 심사를 받았다. 양광화 등은 동북을 떠나기전 4월 5일, 동북각지 당조직들에 독립자주적으로 사업할데 관한 통지를 내리면서 성위 상무위원이고 공청단만주성위 서기인 장문렬(张文烈,小骆이라고도 불리였다)이 중공만주성위 대표로 남도록 하였다.중국인 장문렬의 안해는 조선족혁명가 김순경녀사이고, 녀사의 오빠 김문철은 30년 중반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던 시절 한때 중공할빈시위서기를 맡은 조선족혁명가였다.

1936년 1월초에 국제공산당 주재 중공대표단은 한수괴(韩守魁,즉 金赤民)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중공만주성위를 철소할데 관한 지시, 4대 유격구를 중심으로 길동, 동만, 남만, 북만(吉东、东满、南满、北满) 4개 성위와 할빈특별위원회를 조직할데 관한 지시를 전달하였다. 6월에 장문렬은 성위대표의 명의로 동북각지 당조직에 중공만주성위를 정식으로 철소할데 관한 통지를 내였다. 3군 재봉대 대장 진정산은 처음 동북의 항일투쟁전반을 지도하는 중공만주성위의 이런 급속한 변화와 사태를 모르고있었다.그러다가 3군 군장 조상지(赵尚志)가 3군 사령부의 명의로 이해 여름 주하(珠河)중심현위에 긴급통지를 보내고 9월에 주하중심현위와 3군사령부가 공동으로 탕원(汤原)중심현위와 항일련군 6군에 련석회의를 제의하며 전문회의를 열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주하-탕원 중심현위와 3-6군 당위 성원들이 참가한 《주하탕원련석회의》(珠汤联席会议)는 1936년 9월 18일, 소흥안령의 심산속에 위치한 탕리천(모아산)의 3군 재봉대밀영에서 열리였다. 련석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되고 길동, 동만, 남만, 북만 4개 성위를 설립할데 관한 상급당의 지시와 당면한 정치군사정세, 조직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이 토의되면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조상지, 풍중운, 장수전, 장란생(赵尚志、冯仲云、张寿钱、张兰生) 등 15명이 림시성위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였는데 그중 북만 항일련군의 장령들인 조선사람 김책(金策)과 리복림(李福林), 허형식(许亨植) 등이 집행위원회 위원이였다.

주하탕원련석회의는 북만항일투쟁의 전도와 운명에 관계되는 한차례 중요한 회의로서 모래알처럼 흩어질번했던 북만항일련군부대들은 다시 자기들의 지도기관ㅡ북만림시성위가 있게 되였다.련석회의기간 진정산은 재봉대 녀전사들을 이끌어 회의참가자들의 주숙과 식사 등 후근일들을 전반적으로 맡아나서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북만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는 북만당 조직기구가 다시 조직된것으로 하여 기쁜 심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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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936년 겨울이 지나고 1937년 봄이 다가오자 3군 밀영의 먹는문제가 자못 큰 문제로 대두하였다. 적들의 련속되는 토벌과 엄밀한 봉쇄정책으로 항일련군과 지방군중들과의 련계가 끊어진데서 얼마안되는 식량은 인차 거덜이 났다. 감자로 식량을 해결하였지만 감자마저 떨어지니 고사리, 산배추, 버섯 등 산나물로 식량을 대체해야 했다. 그나마 산나물이나 산열매도 이어대기가 쉽지않은데 소금과 기름은 구경조차 할수 없어 산나물을 그저 뜨거운 물에 데워서 그대로 먹을수밖에 없었다.

당시 생활은 그토록 어렵고 간고하여도 항일련군 전사들은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휴식할 때면 진정산은 앞장에 서서 재봉대의 녀전사들과 함께 항일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혁명적 락관주의와 필승의 신념으로 차넘쳤다. 그속에서 한번 또 한번 굶주림과 모진 피로를 참고 이겨냈다.

진정산을 대장으로 하는 3군 재봉대녀전사들가운데서 조선족녀전사들은 중문을 몰랐으며 한족녀전사들은 일자무식의 문맹이였다. 그때 재봉대실에서 70ㅡ80리 떨어진 곳에 3군의 류숙처가 자리잡았고 4ㅡ5명의 동지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재봉대에서 상급부문과 련락을 가질 때면 모두 그곳을 거치게 되여있었다. 1937년 음력설이 금방 지나자 류숙처의 동지 한사람이 상급의 편지한통을 가지고 재봉대로 왔지만 누구하나 중문으로 된 편지를 읽을수가 없었다.

중문을 모르기는 진정산도 례외가 아니였다. 조선족녀전사들은 서로 돌아가며 보아도 저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족녀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별수없이 편지를 가지고 온 동지와 물으니 그도 일자무식이였다. 답답한 순간이 흐르다가 진정산이 편지를 곰곰히 뜯어보니 편지속에는 여러 이름들이 씌여있었다. 조선족동지들은 중문을 몰라도 자기이름자는 알고있었다. 진정산은 방법이 있다면서 편지속에 자기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류숙처에 다녀오자고 제의하였다.

중문을 모르는 대가로 편지에 언급된 녀전사들을 70ㅡ80리밖 3군류숙처로 다녀오게 하였다. 류숙처에 가서야 그들은 편지내용은 몇몇 녀전사를 남기는외 나머지 녀전사들을 여러 부대로 전근시키는 상급지도부문의 지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편지에 이름이 밝혀진 김백문은 철력의 후방으로 가서 그곳에 재봉대 하나를 새로 일떠세워야 하였다. 그번 편지사실을 두고 김백문은 자기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이 일은 나를 심심히 교육하였다. 나로하여금 어떻게 하나 전투의 여가를 타서 학습하면서 문맹의 모자를 벗어버리도록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

학습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야기와 결심이라 하겠다. 그러던 김백문, 우계진 등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떠났는데 3군 재봉대밀영은 특무의 밀고로 적들에게 드러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여갔다. 마침 재봉대 후근을 맡은 남전사ㅡ염감독(阎把头)이 이를 진정산대장에게 알린데서 진정산은 재봉대와 상병원들더러 즉시 탕리천(糖梨川)을 지나 북만성위 류수처가 자리잡은 모아산(帽儿山省委留守处)밀영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모아산밀영은 탕원현 이서 의란과 이춘사이(汤原县以西,依兰与伊春交界处) 심산속에 자리잡았다. 그날밤 한무리 일제놈들이 3군재봉대의 원 밀영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지만 재봉대는 무사하였다. 그러나 작은 감독(小把头)으로 불리우는 남전사가 동지들을 엄호하면서 적들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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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봄에 진정산은 3군 소년련 지도원으로 파견되였다. 3군 소년련은 1936년 봄이후 조직된 한갈래 항일무장조직으로서 거의 모두가 10대의 항일소년들로 무어졌다. 진정산은 3군 군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소년련을 이끌어 3군의 여러 부대들과 함께 허다한 전투들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였다.

1938년 일제놈들의 동기대토벌이 시작되자 항일련군 3군 6군, 9군, 11군은 12월말에 적들의 겹겹한 봉쇄선을 헤치면서 라북의 오동하 강반(萝北梧桐河畔)으로부터 해륜현 팔도하자, 백마석(海伦县八道林子、白马石) 등지로 전이하였다. 중공북만림시성위에서는 소흥안령 서부산구를 중심으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중공북만림성위 책임자 장수전(张寿钱, 즉 李兆麟)은 1939년 2월초에 항일련군 6군 참모장 풍치강(冯治纲)과 토의를 거쳐 눌하(讷河)를 중심으로하는 북만성위 특별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중공하강특위(下江特委) 조직부장 방빙옥(方冰玉, 본명 姜桂和) 등 세사람을 먼저 눌하현으로 파견하였다. 이해 6월에 북만림시성위에서는 또 6군 2사 정치부주임 윤자규(尹子奎)와 6군 12퇀 부퇀장 경전군(耿殿军), 련지도원 왕은영(王恩荣) 등을 파견하면서 먼저 하산한 방빙옥 등과 더불어 중공눌하현위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드디여 1939년 8월, 윤자규를 서기로 하고 방빙옥을 현위 선전부장으로, 구씨(欧x)를 조직부장으로 하는 중공눌하현위가 비밀리에 조직되였다. 윤자규는 방빙옥이 이미 꾸린 등과촌 임가분방툰(登科村任家粉坊屯) 잡화점을 경영하면서 현위 비밀거점으로 리용하였다. 눌하현위는 중공북만림시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눌하와 덕도, 극산, 눈강, 포서 (讷河、德都、克山、嫩江、布西) 등지의 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그해 1939년 11월 1일, 진정산이 북만성위 집행위원 고우민(高禹民)이 눌하현위에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눌하에 가서 윤자규를 찾았다. 고우민의 편지는 눌하현위의 어떤 동지들가운데 존재하는 소극적인 활동(活动消极)과 좌경관문주의(左倾关门主义) 두가지 경향을 지적하면서 눌하현위에서 당의 집체령도를 강화하면서 군중들에 의거하여 신속히 항일열조를 일으킬것을 요구하였다.

고우민은 편지에서 또 오유를 범한 진정산을 눌하현위에 파견하니 투쟁가운데서 오유를 시정하면서 당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진정산이 무슨 오유를 범하고 당적취소처분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눌하로 간 진정산은 현위서기 윤자규와 가짜부부(후에 당조직의 비준으로 정식부부로 된다)로 분장하면서 임가분방툰의 잡화점을 비밀거점으로 현위교통원으로 활동한다. 임가분방은 오늘의 눌하현 이극천향 부국촌 3툰(二克浅乡富国村三屯)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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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눌하현위 관련자료에 따르면 진정산은 윤자규 등 현위의 동지들을 도와 아래와 같은 8개면에서 크나큰 역할을 놀았다.

첫째는 삼마가(三马架), 왜도대(倭都台), 남양강(南阳岗), 란성해툰(栾成海屯), 천자19호(天字十九号), 눌남진(讷南镇), 마가요(马家窝) 등지에 항일구국회를 발전시키고 부녀구국회와 아동단조직을 건립하였다. 항일구국회 회원은 최초의 10여명으로부터 100여명으로 발전하였다.

둘째는 눌하인민항일선봉대를 조직하였다. 눌하인민항일선봉대는 원래의 청년구국군을 개편하여 3개지대, 5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항일련군 부대를 협조하여 관련전투에 뛰여들었다.

셋째는 비밀간첩제거대(除奸团)를 조직하여 한간과 특무를 소멸하면서 이자들에 의한 당조직 파괴활동을 미연에 막아냈다. 한해 사이에 이들이 처결한 한간과 특무는 11명에 이른다.

넷째는 비밀인쇄소를 차리여 항일삐라를 인쇄, 살포하였다. “북만동포들에게 드리는 글”과 “중국인민해방의 길” 등이 그러하다.

다섯번째는 소림(小林), 주명록(周明禄), 류순(刘纯)등 8명을 당조직에 받아들이고 극산현(克山县)에 극북사업위원회(克北工作委员会)를 조직하였다.

여섯번째는 눌하현성과 라하, 구정, 극산, 태안진(오늘의 依安현성), 포서, 조하(拉哈、九井,克山、泰安镇、布西,洮南) 등지에 비밀련락점 15곳을 두었다.

일곱째는 항일련군부대와 배합하여 무장투쟁을 벌리였다. 1940년 9월 25일, 항일련군 3지대와 9지대와 함께 극산현성을 공략한것이 그러하다.

여덟째는 항일구국회원과 부녀회원들을 조직하여 항일련군부대들에 식량을 조달하고 군복과 신을 만들며 보초와 련락을 맡아나섰다.

진정산과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0년초에 진정산은 중공눌하현위의 결의로 신임현위 부녀부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런 성과와 현위부녀부장으로의 출현은 진정산이 눌하에 간다음 인차 당적을 회복하였음을 알려준다.

1940년 9월, 항일련군부대는 눌하현성 공격을 앞두고 진정산과 윤자규가 관련정찰에 나서도록 하였다. 9월 18일, 진정산부부는 부대에서 파견한 동지에게 현성의 적군정황을 알리면서 손수 그린 진공로선도(进攻路线图)를 넘겨주었다. 따라서 부대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북대영 위만군 퇀부(北大营满军团部)를 진공하고 한갈래는 현성을 공격하도록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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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밤에 진정산 부부는 눌하인민항일선봉대를 이끌어 항일련군 6군 12퇀과 배합하여 눌하현성진공전투에 나섰다. 아군은 눌하 동문의 북쪽으로 현성을 들이쳤다. 현성의 위경찰서와 경찰훈련소(警察训练所) 경찰들은 전부가 무기를 바치며 투항하였다. 진정산은 또 부대와 더불어 현성감옥을 공격하여 경무과장과 간수들을 제압하고 300여명의 이른바 《범인》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 《범인》들은 진정산의 내심한 선전교육을 거쳐 대다수가 항일련군 제6군의 전사로 되였다.

진정산부부와 동지들의 발자취는 눌하현 북부지구를 중심으로 주변의 주요지구들인 포서(布西), 감남(甘南), 의안(依安), 극산, 눈강, 눌하 가까이 내몽구 파언기(巴彦旗) 등지에까지 널리 미치며 항일구국열조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눌하와 주변지구들에서의 지방투쟁은 걸음마다 목숨을 내거는 험악한 순간순간들이였다. 1940년 10월, 항일련군부대가 포서진을 공격할 때 항일련군과 지방당조직간 련락원을 맡아보았던 제3로군 9지대 비서 상련생(尚连生)이 적들의 마수에 걸려 귀순하면서 북안헌병대에 눌하현위의 활동을 불어댄데서 사태는 걷잡을수없이 번져갔다. 위치치하르헌병대와 북안헌병대, 눌하경찰대에서 눌하현위 인원들과 항일군중들에 대해 신속한 검거에 나섰다. 11월 11일, 중공눌하현위 청년사업부 부장 고수림(高水林)이 극산현 북흥진 조귀툰(北兴镇赵贵屯)에서 체포되여 귀순하니 눌하현위의 주요 책임자들과 현위기관, 련락점들이 허궁 들리였다.

11월 28일, 중공북만성위와 항일련군 제3로군의 지하공작자 진정산과 윤자규는 북안(北安) 일본헌병대놈들에 의해 불행히 체포되였다. 12월 8일에는 현위선전부장 방빙옥이 체포되여 또 귀순하고말았다. 눌하현위와 지하당원들, 항일구국회, 항일부녀회 회원 등 180명이 륙속 들통났다. 현위서기이고 진정산의 남편인 윤자규는 위치치하르 고등법원(伪齐齐哈尔高等法院)에 의해 사형에 언도되고 진정산 등 49명은 각기 적들의 판결언도를 받았다.

그후 진정산은 어떻게 되였을까? 항일련군 제3군 재봉대 관련자료들과 중공눌하현위 자료는 판결언도외 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3군 재봉대 녀전사였던 김옥선은 1984년 8월 소봉란의 취재를 받을 때 재봉대 제1임 대장 진정산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희생되였다고 밝히고있다. 뿐만아니라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장렬히 희생되였다면서 선후로 두 대장을 잃은 재봉대녀전사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추도가》를 불렀다고 회고하였다.

(2015년 4월 23일ㅡ24일 정리 )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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