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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마을 새마을]국경에 벽을 세운 고려마을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8.22일 07:15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맨 처음 헤이룽장(黑龙江)성 밀산(密山)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인들은 남쪽의 조선에서 국경을 건너왔다. 웬 일인지 그들은 땅 좋고 물이 좋은 흥개호(興凱湖)를 그냥 지나쳐서 동쪽의 러시아 연해주로 가버렸다고 한다. 뒤미처 조선인 3가구가 흥개호 기슭에 나타나 이삿짐을 내려놓았다.

  그게 광서(光緖) 15년(1889)의 일이라고 밀산시 전 부시장 맹고군(孟高軍)씨가 밝혔다. "흥개호에 정착한 조선인들도 (마침) 연해주에서 온 이민들이라고 하는데요."

일망무제한 호수 흥개호.

  흥개호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 위의 호수이다. 당나라 때는 미타호(湄沱湖)로 불렀으며 미타의 붕어로 소문이 났다. 흥개는 만족말로 이 호수에 살고 있는 '물쥐'를 뜻한다. 적어도 만족 사람들에게는 붕어보다 물쥐가 더 인기가 있은 것 같다.

  아무튼 흥개호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어렵이나 수렵에 흥미를 가진 게 아니었다. 그들은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나중에 흥개호 기슭의 여기저기에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밀산시는 일찍 함풍(咸豊) 11년(1861)에 봉금(封禁)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청군(淸軍)이 장성을 넘은 후 청나라 정부는 1644년부터 동북을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간주, 대부분 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내렸다. 광서 6년(1880), 청나라 정부가 이주민으로 변경을 충실히 만드는 '이민실변(移民實邊)'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간민(墾民)들이 밀산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그 무렵 밀산에는 야생벌이 무성한 삼림에 무리를 이뤘으며 꿀이 돌 틈서리로 물처럼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꿀이 많다는 의미의 봉밀산(蜂蜜山)으로 불렸는데, 훗날 밀산부의 이름을 지어 올릴 때 인감에 꿀 밀(蜜)을 빽빽할 밀(密)자로 고쳤다고 전한다.

한흥동 기념물을 만들고 있는 현장을 찾은 맹고군 전 부시장.

  꿀벌의 동네에 찾아온 간민들도 급기야 굴뚝을 빽빽한 수림으로 이루고 있었다. 광서 25년(1899), 흥개호 일대에는 1천여 가구의 간민이 살았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간민이 300여 가구였으며 와중에 조선인은 50여 가구나 되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룬다." 밀산에 처음 나타난 조선인들은 드디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조선인들은 어디로 가든지 벼농사에 귀의(歸依)하고 있는 듯하다. 1917년, 권씨 성의 사람이 도랑을 파고 흥개호에 흘러드는 강을 에워 논에 끌어들였다. 이때부터 가가호호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입소문이 돌자 극동지역과 연변에서 살던 많은 조선인들이 끼리끼리 이 고장에 모여들었다.

  "그때 권씨가 많이 살고 힘(세력)도 커서 그들이 사는 동네를 '권씨네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밀산시 첫 조선족 마을에는 씨족의 동네가 출현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맹고군 씨는 한때 또 밀산시의 민정국 부국장, 정부 조사연구원을 담임하면서 '밀산 조선족 백년사'의 편찬에 참여하는 등 밀산의 역사에 유달리 해박했다. 밀산의 답사에 그가 직접 안내원으로 나서준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랐다. 맹고군 씨의 말에 따르면 흥개호 기슭에는 권씨 마을을 망라,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세 개 되었다. 당벽진(當壁鎭)의 토박이었던 김씨 등 성씨의 노인은 예전에 상촌(권씨 마을), 중촌(당벽진), 하촌(변경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회억했다는 것. 당벽진 현지를 찾았던 이씨 노인은 중촌에 아직도 농장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상촌과 하촌 마을의 유적지는 모두 밭으로 되어있더라고 말하더란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의 밀산 통상구.


  아무래도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당벽진(當壁鎭)은 중국말 그대로 국경의 벽이 된 마을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북경조약'(1860)이 체결된 후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의 당벽진 부근의 백릉하(白稜河) 기슭에 동쪽변계를 구별하기 위한 담판장소를 설치한다. 그때 당벽진은 만족말로 호수(흥개호)의 파도가 휩쓸려 드는 작은 강(백릉강)의 골짜기라는 뜻의 규툰필립(奎屯畢立)이라고 불렸다. 그 후 중국글로 음역하면서 쾌당별(快當別)로 불렸고 1913년 당벽진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인구가 육속 천입하며 상업 추형이 나타났다. 초기 러시아에 대한 중국 민간무역의 통로는 바로 이 당벽진이었다. 당벽진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길목이었으니 말 그대로 국경을 가름하는 벽의 마을이라고 하겠다.

  국경의 벽의 뒤에는 간민의 마을뿐만 아닌 무장투쟁의 기지가 출현하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해외 반일무장투쟁의 첫 기지로 된다고 맹고군 씨가 설명했다. 그는 일찍 20년 전 이 기지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일부러 당벽진에 다녀갔다고 한다.

  맹고군은 일행에게 임호촌(臨湖村) 동쪽의 옥수수 밭을 손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옛날의 촌락 유적을 간혹 찾아볼 수 있지요."

당벽진 기념물, 이 석비의 앞쪽 에 옛 조선인마을이 있었다.

  이른 봄이면 임호촌의 밭에는 색깔이 남다른 땅이 나타난다. 밭갈이를 할 때면 또 질그릇이나 구들돌 등 유물이 발견된다고 한다. 옛 마을 '한흥동(韓興洞)'은 땅속에서 흙을 밀고나와 기어이 그 존재를 하늘 아래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09년, 한국 반일독립지사 이승희(李承熙, 1847~1916)가 이상설(李相卨,1870~1917 ) 등 반일독립지도자들의 위탁을 받고 봉밀산 부근에 와서 고찰한 후 땅 45방(方, 약 2,250무)를 구입했다. 그해 중국과 러시아의 연해주에 분산된 조선인 100여 가구를 집단이주, 새 마을 '한흥동'을 세웠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반일독립지사들이 봉밀산 기슭에 그들의 기지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 이민촌락이 이미 규모를 갖췄고 또 개간이 가능한 옥토가 널려 있었다. 더구나 조선반도의 일본군 위협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유사시에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이동, 후퇴할 수 있었다.

  한흥동은 마을과 함께 학교를 세웠는데 역시 한국이라는 국명을 빌려 한민(韓民)학교라고 이름을 지었다. 1913년, 한흥동에는 또 무관학교를 설립, 유명한 의병장령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직접 교관을 담임하고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한흥동은 당벽진의 백포자(白泡子) 일대에서 제일 먼저 생긴 동네였으며 또 '고려영'이라고 불렸다.

  실제 "청나라 말기, 백포자에는 사람들이 거주, 일부 한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조선인들이었다."고 백포자의 향지(鄕志)가 기록하고 있다. 향지는 이 조선인의 마을은 현재의 임호 3조(組)이며 옛 이름은 고려영으로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기관들이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부언한다.

  한흥동이 세워진 후 조선 평안도와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대량의 조선인이 이주하여 흥개호 연안과 십리와(十里洼), 밀산부(密山府) 일대에 들어와서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였다. 1922년 3월,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밀산 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298가구, 1,192명에 이르고 있었다. 불과 10여년 후인 강덕(康德, 괴뢰 만주국 연호) 3년(1936), 조선인은 2,650가구의 11,730명에 달했다. 와중에 봉밀산 아래의 흥개호 기슭은 조선인 집거지로 되고 있었으며 나아가 밀산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의 제1기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흥동은 후속적인 지원의 결핍 등으로 불과 4년을 유지했다고 한다. 홍범도 등 장령이 부대를 인솔하여 전략적 전이를 하면서 기지는 사명을 마치고 결속되었다. 고려영의 조선인들은 차츰 이사를 갔으며 1930년 후에는 한족 마을로 되었다. 벼를 심던 논은 언제인가부터 다시 밭으로 되어버렸다.

  맹고군 씨는 한흥동이 한국의 근대 민족독립운동사에서 첫 시도였다고 마을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었다. "'한흥동'의 의미는 이뿐만 아니지요, 또 그 후의 우리 동북의 항일투쟁에 혁명의 씨앗을 심어주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밀산 지역에서 조선인들은 신속히 행동을 개시했다. 맹고군 씨의 말에 따르면 밀산의 첫 번째 항일총회 회장과 제1진의 항일총회 회원은 도합 38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서 90%는 조선인이었다. 첫 항일부녀구국회(抗日婦女救國會) 주임과 회원은 도합 200명이었는데, 이 전체가 모두 조선인이었다. 1934년에 창설된 밀산 항일유격대의 대원은 3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서 33명은 조선인이었다. 밀산의 조선인 마을은 모두 항일투쟁에서 후방의 근거지로 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적극 항일부대에 참군하고 식량과 군수물자를 운송했어요. 또 항일부대에 정보를 제공하고 부상자들을 간호했습니다."

  한흥동은 그 이름처럼 곳곳에 항일투쟁으로 부흥했지만, 정작 그 이름은 옛 마을처럼 땅 밑에 묻히고 있었다. 일행이 잠깐 들렸던 임호촌의 가게 주인은 원체 한족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고집하듯 말하고 있었다. "여긴 옛날부터 임호촌이라고 불렀지요. 흥개호의 호수와 이웃한다고 해서 불리는 마을인데요."

  임호촌은 가게 주인의 조상 때 내지에서 이주하여 생긴 동네라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실은 최초에는 조선인 마을이었다는 말에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다. 마을 복판에 곧 기념물로 일어서게 되는 '한흥동'은 그들의 선조의 옛 기억에만 일부 잔존하고 있는 듯 했다.

  1933년 일본군이 동북 변강을 점령하면서 점차 변계를 봉쇄했다. 1941년 6월, 일본군은 '변계 정화(淨化)'를 실시, 당벽진의 주택 전부를 소각했다. 국경 주민의 내왕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마을이 흩어지고 변경무역은 중지되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상촌에는 7,9가구, 중촌에는 10가구, 하촌에는 15~20가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 마을은 고려영을 포함하여 당벽진에 1940년대 초까지 존속했다. 현재로선 당벽진에 조선족이 한 가구도 없다고 하니, 누구라도 옛 마을과 조선족(인)을 연결시킬 수 없는 게 당연지사일지 모른다.

  당벽진의 옛 기억은 대부분 민국 시기의 서류와 만주국의 '밀산사정(事情)', 밀산 현지(縣志), 향지(鄕志)의 기재와 구술 자료에 의거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일부 옛 흔적은 여전히 현지에 다다소소 남아있는 듯하다. 1980년대 초반, 최씨 성의 노인이 옛 마을을 찾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었을 때 당벽진 부근 벌판의 수풀에서 옛날 농사를 짓던 논두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 옛 마을은 옛 지명으로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한때 밀산 경내에 거주하던 조선인(족) 촌락은 무려 45개나 되었지만 공화국의 창립 직후 32개로 줄어들었고 그 후 소실, 합병되면서 2천년에는 17개의 행정촌으로 줄어들었다.

  "아직까지 우리 이곳에 소실된 마을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에는 인제 거의 다 노인들만 살고 있지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 젊은 세대는 물론 기성세대도 대개 농사를 포기하고 땅을 폐답으로 방치하거나 남에게 임대하고 있다. 맹고군 씨는 마을의 현 주소에 참담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정작 마을의 주인인 '촌민'은 호적 등록부에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언제인가부터 마을의 논은 밭으로, 논주인은 밭주인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땅을 관리하지 않으면 그 소유자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로 되어버린다면 그 마을 그 사람들은 '국경의 벽'인 그 땅의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마을과 그 사람들의 옛 이야기는 어디에서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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