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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반에 띄우는 추모의 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4.04.25일 14:50
흑룡강성 조선족의 이름 있는 음악가 심상문선생의 작고소식을 듣고

  상지 강효삼

  참으로 뜻밖이였다. 한달전 설명절을 맞아 인사를 올렸을 때도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여 장수를 축복하였는데 불과 한달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가 물었더니 간암이란다. 인생은 태여나서 때가 되면 질병으로 혹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죽음을 맞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제 70의 마지막고개를 오르는 분인만큼(1935년생)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허지만 어찌 이리도 아쉽고 애석한가!

  흑룡강성은 물론 전국의 조선족 음악인 가운데도 명망 있는 심상문선생은7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 파는 간고한 생활에도 노래를 즐기고 음악감상을 즐겼다. 그리하여 한번은 낯도 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축음기를 들고 가는것을 보고 따라가서 태연하게 음악감상을 하다가 쫓겨났지만 집에 오지 않고 그 집 창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 깊도록 귀 기울이였는데 마침 밖에 나왔던 청년이 보고 너무나 감동되여 그를 데리고 들어가 축음기를 듣게 였다고 한다.그때 3일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음악을 감상하였다고 한다. 9세때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오상에 자리잡았는데 소학교에 입학한후 발풍금에 관심을 가졌으나 마음대로 치지 못하여 안타깝던 나머지 어두컴컴한 저녁이면 음악실의 공기창문을 열고 들어가 풍금을 치다가 한번은 숙직 서는 선생님께 발각되여 전교 사생들앞에서 잘못을 반성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선생님을 찾아가 청을 들어 마침내 괴외시간에 련습할것을 비준받고 부지런히 련습하여 학생들에게 노래 보급도 할수 있는 수준에 도달, 4학년때는 발풍금치는 수준이 음악선생님보다 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부모님이 ‘풍각쟁이’가 되는것을 반대했으나 음악에 대한 푸른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얼마나 음악에 심취했으면 중학교 시험 치는 전날에도 공기창을 열고 들어가 밤새도록 피아노를 쳤겠는가! 다행히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공부를 하면서는 부모님이 보낸 많지 않은 돈을 절약하여 축음기를 사서 다른 동학들의 학습에 지장줄가봐 이불밑에서 감상했고 솜옷을 사입으라고 보낸 돈으로는 기타를 사서 련습하면서 화성학, 곡식학, 대위법 등 음악리론을 전공하였다.

  1951년 박우(유명한 조선족 악대지휘)가 로신예술학원에서 대합창 ‘용감한 조선인민은 일어났다’ 를 련습할 때 그의 부탁을 받고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하였다. 1952년 7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할빈사범전과학교 예술학부에 입학, 학교에서 배우는 경극 비례가 너무 많아 조선민족 전통음악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 목단강조선족사범학교로 전학해갔다. 졸업후 동녕조선족중학교에서 음악교원을 하면서 현 괴외문공단에서 악대지휘, 음악창작, 문예프로지도, 반주를 도맡아 하였다. 17살때부터 가요를 창작, ‘새별아 희망아’를 1958년 ‘목단강조선문보’에 발표한 뒤를 이어 오상조선족중학교에 전근된후 ‘새봄이 왔네’ 등 가요를 창작하여 발표, 1965년 ‘할빈의 여름’ 음악회때는 흑룡강성대표대의 조선족 프로를 책임지고 지도, 20여년동안 괴외문에활동을 지도하면서 ‘처녀의 심사란다’ 등 150여수의 무용곡과 가곡을 창작하고 ‘콩쥐팥쥐’, ‘금강산처녀’ 등 가곡도 창작, 1965년도에 그가 창작하고 지도하여 무대에 올린 가무 ‘풍년벼 북경에로’ 는 ‘우수프로상’을 수여받았으며 장춘영화활영소에서 기록영화까지 찍었다.

  1978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음악편집으로 전근하여서는 드넓은 북방의 대지에서 민족음악대오를 키우는데 노력을 기울여 오상, 상지, 계서, 밀산, 녕안 목릉 등지에 음악창작학습반을 조직하고 창작일군 배양에 힘썼는데 당시 내가 근무하는 하동문화소에도 오시여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노래 창작을 지도하여 그 결실로 ‘하동벌의 메아리’란 노래집도 한권 묶어낼수 있었다.

  음악편집을 하면서 그의 손을 거쳐 ‘룡강의 노래’ 3권, ‘세계명곡집’, ‘세계아동명곡집’,‘음악통론’, ‘한국노래집’, ‘최삼명작품집’, ‘석천수작춤집’, ‘팔도민요집’, ‘즐겨부르는노래수첩’ 등 20여종의 음악서적이 출판되였는데 특히 7인 노래집 ‘북방의 선률’은 흑룡강성조선족 원로음악인과 중년음악인들중에서 장시간 창작에 종사하면서 성과를 낸 지문영, 리주일, 리득송, 김량준, 리정수, 심상문, 리정일 등 7인의 작품을 모은것으로 완전히 흑룡강조선족풍격을 살려낸 흑룡강조선족음악의 기념비적인 가곡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심상문선생의 타계를 더 슬퍼하는것은 비록 한고장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분과는 오랜 세월 예술적으로 인간적으로 인연을 맺어왔기때문이다. 내가 심선생을 처음 알게 된것은 흑룡강조선말방송국에서 조직한 음악창작모임에서였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70년대 말부터 조선말방송국이 먼저 나서서 흑룡강조선족음악창작의 스타트를 떼였는데 당시 오상고급중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계시는 심선생께서도 참가하시여 낯을 익히게 되였다. 너부죽한 얼굴에 알릴듯말듯한 미소가 늘 차고 넘치는것이 첫 인상에도 매우 친절해보였다. 하긴 가사를 쓰는 사람과 작곡을 하는 사람을 일러 “음악으로 맺어진 부부”라고도 하니 자연 가까와지기 마련이지만 내가 심선생과 더 가까웠던것은 사람도 좋지만 그가 창작하는 음악선률이 매우 개성적이고 독특하며 내 마음에 들기때문이다. 해서 나는 그분과 많은 노래들을 합작하였는데 흑룡강성 조선족 음악작품가운데 비교적 좋다고 인정받은 ‘내고향의 민들레’, ‘봄바람은 좋아요’, ‘산너머 정든집’, ‘고향으로 가는 길’ 등 여러 편이 된다. 작곡을 할 때 그분은 늘 독단하지 않고 작사자들의 의견과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에 더욱 배합이 잘 되였던것이다.

  특히 내가 더 고마웠던것은 심선생님과 합작하여 나의 모교인 상지조선족중학교의 교가를 민든것이다.

  상지조선족중학교는 해방후 흑룡강성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조선족중학교인데 건교 초기 교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부르지 않아 실은 없는 셈이였다. 해서 건교 쉰돐을 맞이하면서 교가를 새로 만들기로 하였는데 가사는 내가 썼으나 작곡을 할 마땅한 분을 찾지 못하다가 문득 떠올린것이 심상문선생님이신데 청탁을 하였더니 두말없이 수락하여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의 입에 잘 오르면서도 박력있는 교가를 지어줌으로써 몇십년 학교에 교가가 없던 공백을 메꾸어 주셨다.그래서 건교 쉰돐 행사에 모셨으나 워낙 조용하고 겸손한 분이여서 자신의 로동보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그저 구경군처럼 조용히 사람들 뒤에서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감상하셨다. 그때 돌아가실 때 아무 보수도 드리지 못한것이 그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하던지? 지금도 가끔 행사때면 학교에서 교가를 부른다고 하는데 학생들은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있을가? 작곡자 심상문선생님의 이름을!

  어릴 때부터 음악에 푸른 꿈을 지니고 중학교 음악교원으로부터 전문 음악편집에 이르기까지 평생 음악에 종사하면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음악인재로 배양했고 출판사에 오셔서는 사회의 음악인재를 양성하여 드넓은 북방의 대지에 민족음악의 씨를 뿌려 키우고 꽃피워 열매 맺게 한 많지 않은 조선족 음악인들중의 한 분이시다. 평범하나 결코 평범치 않은 심선생님 같으신 음악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흑룡강 조선족음악도 한때의 황금기를 맞이할수 있었던것은 아닐가. 때문에 흑룡강 조선족음악력사는 정초자의 한분이신 그분의 이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심상문선생님이시여, 여기 상지땅에서 산너머 목단강반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늦어진 추모의 글이나마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부디 저 세상에 가셨어도 음악을 놓지 마시고 이승에서 못다한 즐거움을 음악으로 한껏 향수합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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