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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물었다, 부끄럽지 않냐고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3.17일 08:57
작성자: 최세만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 주말 영화 '동주'를 보러 갔었다. 영화의 엔딩자막이 다 올라가고 영화관에 불이 환히 켜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선 관객은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까지 이어진 짧았지만 길었던 정적은 실로 낯선 것이었다. 일어나며 주변을 돌아봤다. 나만큼이나 망연한 표정으로 여전히 스크린을 응시하며 일어날 줄 모르는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가 내게 어떤 기특한 생각이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다만 먹먹하고, 울컥했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며 오열하는 동주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선 청년시인 윤동주가 내게 걸어온 말, '부끄러움'이란 단어가 나를 꽉 채웠다. 이 말을 덜어내지 않으면 다른 얘기로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꽉 잡힌 탓에 원래 쓰려고 취재했던 다른 주제를 미뤄놓고 지금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쓴다.

  '이런 시대'. 나라의 주권을 잃고, 말과 글을 잃고, 이름마저 잃어버렸던 시대.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을 들이대며 무고한 시인을 생체실험의 마루타로 던져 넣고 목숨을 요구했던 미치광이 같은 일제치하가 그의 시대였다. 말과 글은 광기 어린 명분의 도구로 타락하고 순결한 언어는 탄압받던 시대를 살았던 원통한 시인은 그 비천해진 언어를 붙들고 원한과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윤동주 시인이 우리 주권과 언어와 이름을 누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았다면 부끄러움이 아닌 아름다움을 맘껏 노래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이에 미쳤을 때 비로소 내게도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윤동주의 눈으로 보니 우리 시대의 언어는 외부 세력의 탄압이 없음에도 스스로 천해지고, 오염되고, 사나워져 있어서였다.

  저녁을 준비하며 두부를 꺼내 들었을 때 나는 순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혹한 죽음을 떠올렸다. 거의 자동으로 말이다. 요즘 떠오르는 한 신예스타를 '일베'로 몰아붙이는 과정에 등장한 언어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언어를 오염시킨 탓이었다. 그가 SNS에 썼다는 '두부 심부름'이 '두부 외상'으로 사인이 기록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주장. 천박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분열적인 말놀음이지만, 한 번 던져진 미친 언어는 폭력처럼 내 정신세계에 외상을 입히고 우리 말을 넌덜머리 나는 것으로 만들었다.

  일부 무절제한 군중들의 말만 사납고 천한 것은 아니다.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과 그 주변의 소위 사회지도층들이 쏟아내는 말들도 부박하고 염치없기 짝이 없다. 선거로 민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이제 수사로만 남았을 뿐이다. 국민의 뜻과 의지에 대한 사색과 탐구는 사라지고, 여당 후보들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경쟁하는 언어들로 자신을 치장하고 대부분의 후보들은 자신에 대한 유불리에 따른 이전투구와 파벌의 언어를 남발한다. 살생부·음모곰팡이·자작극·공천막장극…. 총선 시국의 말들은 사납기 그지없고, 시대의 언어를 실어 나르는 언론 매체들은 매일 이들이 배설해낸 부끄러운 언어들로 어지럽다.

  영화 '동주'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대에 가라"며 "글 써봐야 기자밖에 더 하겠느냐"고 다그친다. 그가 앞서 산 덕에 지금 이 시대에 기자가 되지 않았다는 데에 안도한다. 부끄러운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 부끄러움이라는 말조차 잊은 시대에 욕된 기자로 살기에 그의 언어 세계는 너무나 염결하다.

  누가 윤동주만큼 비통한 삶을 살았는가. 그럼에도 그에겐 원한 사무친 독한 말이 없다. 다만 언어를 대함에 있어 치열하게 사색하면서도 부끄러워했을 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 건 부끄러움을 아는 언어의 위대함 때문일 거다. 지독하게 사납고 염치없는 언어가 지배한 오늘, 영화로라도 윤동주가 돌아온 건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물으려는 그의 순결한 충정이 발현된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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