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3년 10월25일자 3면
[이완기 칼럼] 비판기능 사라진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 퇴보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이 관권에 의한 총체적 부정선거의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NLL대화록, 검찰총장 찍어내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원세훈 일병 구하기에 나섰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정원과 군이 수만 건에 이르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고 치졸한 내용의 댓글공작을 펼친데 이어, 국정원 직원과 새누리당 산하 공식 기구인 '십알단'이 같은 글을 공동으로 퍼날랐다는 사실이 지난 21일 서울고검의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지난 24일에는 국정원이 박근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와 캠프의 보도자료까지 퍼날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정원과 박근혜 선대본부 및 캠프의 연결고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서울고검 국정감사에서는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국정원 댓글 관련 수사상황을 보고하는 윤석열 수사팀장에게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 내가 사표를 쓰거든 수사하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영곤 지검장의 이 말은 정치권의 이해에 따라 검찰수사의 향방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며, 박근혜 정권에 부담이 되는 댓글수사를 중단하라는 정치검찰의 노골적인 의사표시이다. 이는 검찰독립의 포기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범죄사실 은폐와 마찬가지로 직권을 남용해 수사를 저지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총체적 부정선거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의 대응방식이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 문재인 의원의 기자회견에 대해 '선거불복이냐'고 윽박지르면서 '의심의 독사과', '불신의 돗버섯' 등 황당하고도 살벌한 독설과 폭언을 쏟아 부었다. 황우여 대표는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선거사범을 문제 삼아 대선불복의 길을 걸은 일이 없다"고 했고, 최경환 원내대표는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지 않은 우리 국민들이 참으로 현명했다"고 빈정댔으며, 김태흠 원내대변인은 "국민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갖다 붙인다고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의 이러한 언사는 국민을 무지랭이 취급하는 국민 무시요 국민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지난 9월 3자회담에서 "제가 댓글 때문에 대통령 됐냐"며 야당 대표에게 따지듯 물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사건을 사전에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르쇠로 버티는 대통령의 태도는 댓글사건으로 촉발된 정국혼란을 해결하는데 전혀 답이 될 수 없다.
대통령 선거는 후보 홀로 치루는 것이 아니다. 후보와 캠프와 소속 정당이 결속하여 치루는 복합체의 정치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여당 후보의 공식 선거운동기구와 연계하여 선거에 개입한 것은 명백히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이며 그것을 박 대통령 자신이 몰랐다고 해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박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검찰 윗선의 수사방해는 그 동안의 정황으로 볼 때 박 대통령의 사과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대선불복이냐'고 윽박지르는 새누리당 당직자들의 인식체계는 그들이 민주사회의 공당을 운영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이런 언어도단의 이상한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이러한 총체적 부정선거를 그냥 덮으라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의 진정한 뜻인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며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특정 정치권을 편드는 부정선거의 범행을 저지른 것을 없었던 일로 하라는 것인가? 국정원의 범행을 은폐했던 경찰의 범죄를 모른 척하라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집권한 정통성 없는 정권을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라는 것인가? 이 잘못들을 바로잡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현실을 그냥 방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야당과 국민을 무시하고 덮고 갔을 때 박 대통령이 향후 남은 4년 남짓한 임기를 제대로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새누리당이 이처럼 적반하장의 뻔뻔함을 보이는 배경에는 언론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조선일보를 비롯한 족벌신문과 방송은 정부여당에 부정적인 사안이 터질 때마다 물타기, 본질흐리기 등으로 여론을 왜곡해 왔다. 이들 언론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야당의 비판을 '정쟁'으로, 정권차원의 수사방해를 '검찰내분'으로 몰아갔다. 때로는 '정국의 판을 바꿔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국면전환을 훈수하기도 한다. 특히 KBS, MBC 등 공영방송은 노조의 무력화로 제작 자율성을 잃었고, 검열과 보도통제로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실종되었으며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외면하는 등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러한 언론의 현실은 박근혜 정권에 두고두고 독이 될 것이다. 정권은 언론의 비판 기능을 빼았고 비판기능이 사라진 언론은 권력을 오만과 독선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악순환의 행진이 계속될 것이다.
이완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