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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31)—사평공격전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25일 14:58
1947년 5월, 동북에서 전략적반격에 나선 동북민주련군은 의외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해방구에서 국민당군 유생력량을 소멸하면서 크고작은 도시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였다. 아군의 드센 반격에 밀린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실패를 보면서 남은 병력을 주변의 대도시와 전략적요새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림강보위전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3종대와 4종대는 사평서남부로 진격해 심양의 적을 견제하는 한편 서남부로부터 사평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동북민주련군 1종대와 2종대는 장춘, 길림을 에돌아 분산된 국민당군을 추격하면서 북부로부터 사평을 포위했다.


한편 로야령부근에서 적을 견제해 싸우던 동만 각 부대와 동북민주련군 6종대는 장춘과 길림의 적을 꼼짝못하게 다잡아두고 동부로부터 사평으로 공격할 여력을 가지게 되였다. 충족한 기동력량을 확보하지 못한 국민당군은 아군의 반격에 대항할수 없었고 단지 대도시와 중요한 전략적요새만을 사수하게 되였던것이다.

동북의 한가운데 위치한 사평, 사평은 심양과 장춘, 남만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항일전쟁승리후 동북민주련군은 신속히 사평을 점령한후 1946년 봄에 국민당군의 막강한 공격에 맞서 치렬한 혈전을 치렀던 사평이다. 8000여명의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할수 없이 사평에서 철수한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군에게 밀려 송화강 이북, 이동으로 철수할수밖에 없었으며 줄곧 어려운 전투를 진행해왔던것이다. 하지만 1년후의 오늘, 상황은 뒤바뀌여졌다. 동북민주련군은 강대한 병력을 집중해 또다시 사평을 포위하게 되였던것이다. 쌍방은 재차 사평을 두고 자웅을 겨룰 태세였다.


하기공세에 나선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전투를 완수하고 사평부근에서 회합했다. 이제 사평만 점령하면 심양과 장춘사이의 련계를 차단하려는 총사령부의 전략의도를 원만히 실현하게 된다. 하지만 사평에서 아군은 뜻하지 않는 적의 완강한 수비에 부딪쳤다.

병석에서도 아군의 동태를 면밀히 주시하고있던 국민당군 총사령인 두률명은 동북민주련군의 다음 목표가 사평임을 판단하고 미리부터 사평수비를 강화할것을 진명인에게 지시했다. 동북의 중요한 교통중추인 사평은 괴뢰만주국시기부터 축조한 훌륭한 방어시설이 갖추어져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워 군공을 세운 진명인은 작전과 전술에 모두 뛰여난 직업군인이였다. 사평과 생사를 같이할 결의를 다진 진명인은 방어시설을 더욱 보강한외에 《죽음으로 사평을 지켜야 한다》고 부대를 엄히 단속해놓았다.


치렬한 쟁탈전은 사평외곽으로부터 진행되였다. 동만 각 부대는 주력부대에 협조해 사평비행장을 공격했다. 화룡보안퇀 조선족전사들은 치렬한 접전을 거쳐 적수비군을 소멸하고 사평비행장을 점령했다. 조선족전사 신경용(申琼熔)은 적 비행기 한대를 까부시고 기관총으로 50여명을 격살해 대공 3차를 세우기도 했다.

1947년 6월 20일부터 동북민주련군 주력인 1종대와 6종대 17사, 7종대가 사평공격전을 진행했다. 전투는 처음부터 백열화되였다. 적아 쌍방은 거리 하나, 건물 하나를 두고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하면서 서로 수많은 희생을 내였다.


서란에 있는 원 동북민주련군 1종대 3사 7퇀 3영 9련 2패 5반의 폭파수였던 고광동로인은 83세 고령임에도 몸은 아주 건강하였다. 그는 당시 폭파임무를 맡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1947년 사평전투때, 그때는 어쩌다 보니까 원래 죽을건데 일곱이 나가서 나 혼자 살았어요. 나는 왜 살았냐 하면 번호를 뽑는데 내가 일곱번째인데 폭약 500근을 다 가져다놓고 심지를 뽑아 내가 당겨야 했어요. 제일 무서운게 그래요. 빨리 불을 달고 나와야 되지요.


그래서 일곱이 나간후 내가 가서 당기고 냅다뛰는데 구뎅이에 빠져 살았습니다…500근 되여야 폭파할수 있어요. 작약을 실험안해 봤지만 나무를 폭파해봤는데 훈련할 때 한근이면 됩니다. 터치워보면 아는데 한근이지요. 전투하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총 쏘고 실제 해보면 힘들어요. 네 죽고 내가 죽고하는데 전사들은 턱턱 넘어지고…죽고살고 생각할사이 없어요.》

고광동로인의 제대군인증

고광동로인의 제대군인증


치렬한 시가전은 말그대로 육신으로 싸우는것이였다. 중형무기를 사용할수 없기때문에 몸으로 폭탄꾸러미를 들고 가서 터쳐야 했다. 폭파임무를 맡은 1종대 3사 7퇀의 조선족전사 고광동은 일곱번째 폭파수로 뽑혔다. 앞에 폭파수들이 폭약을 하나하나 적 방어시설에 가져다 쌓은후 그가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도화선을 당겨야 했던것이다. 도화선을 당기자 하늘땅을 진감하는 굉음과 함께 적보루가 사라져버렸다.

당시 곁에 깊은 구뎅이가 있어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면서 고광동로인은 전투영웅답게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구사일생으로 폭파임무를 완수한 사적을 호탕하게 웃음며 이야기하는 고광동로인.


사평혈전은 십여일 진행되였지만 아군은 끝내 사평을 점령하지 못하고 철수하고말았다. 사평에서의 혈전이 지속되고있을 때 심양과 장춘으로부터 적의 정예부대가 대거 협공해왔던것이다. 피동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더욱 유리한 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동북민주련군은 사평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제3차 사평전투에서 아군은 1만 3000여명의 희생으로 적 1만 7000여명을 소멸했다.

사평을 사수한 진명인(陈明仁)은 장개석으로부터 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국민당 륙군총모장 진성(陈诚)의 간언을 들은 장개석은 그를 중용한것이 아니라 도리여 군권을 박탈하고 참의원이라는 빈 벼슬만 주었다. 참모장의 권리가 실권이 없다고 판단한 진성은 언녕부터 동북대권에 눈독을 들이고있었던것이다. 때마침 두률명도 병환이 위중하여 상해에 와서 치료받아야 했다. 진성의 거듭되는 간언과 요구에 배기지 못한 장개석은 1947년 8월초에 드디여 진성에게 동북행원 주임을 맡겼다.

동북의 당과 군, 행정대권을 한몸에 틀어쥔 진성은 50만 국민당군을 보강하였고 대량의 군정요직에 자기의 친신을 배치했으며 료서지역에서의 《기동방어》라는 무모한 전략을 세웠다.


세번째 사평전투는 적정에 대한 판단이 잘못된데다가 가장 좋은 공격시기를 놓치는 등 원인으로 하여 결국 실패하고말았다. 게다가 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동북민주련군은 50일간의 하기공세를 통해 국민당군 8만여명을 소멸하고 42개 도시의 천만에 가까운 인구를 해방함으로써 동만, 서만, 남만, 북만 근거지를 하나로 이어놓았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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