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로 사평을 포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동북민주련군은 다시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해 병력을 가다듬었다. 이 기회를 빌어 국민당군은 동북 대도시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료서지역에서의 작전준비에 몰두하고있었다. 국민당군은 새로 부임된 동북행정원 진성주임의 전략에 따라 서만의 동북민주련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국민당군의 새로운 행동에 대비해 동북민주련군도 병력을 보충하는 한편 분산적으로 출격하는 적을 포위, 소멸하고 국민당의 대병영인 심양주변으로 공격범위를 넓히는 추기공세를 펼쳤다.
동북민주련군 총사령부에서는 추기공세를 앞두고 하북과 료서, 내몽골지역에서 활동하던 부대로 7종대와 8종대, 9종대를 편성하여 서만으로 공격해오는 심양의 국민당주력을 분산, 소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춘, 길림에서 활동하던 각 부대를 조직해 10종대를 편성했다.
10종대의 사령원은 량흥초였고 정위는 주적평이였다. 10종대산하에 28사, 29사, 30사를 두었는데 28사 사장은 하경적이고 29사 사장은 류전련이였으며 30사의 사장은 엽건민이였다. 새로 편성된 10종대는 근 반수가 조선족장병들이였다. 일제가 항복한후 동북으로 진출해 흑룡강성에서 토비숙청을 진행하면서 확군한 팔로군 359려가 동북민주련군 독립 1사로 편성되였다가 이 시기 10종대 28사로 재편성되였다. 그리고 길림군구의 가장 유력한 기동부대였던 독립 3사가 10종대 29사로, 동만독립사가 10종대 30사로 편성되였다.
추기공세의 중점은 료서지역에서 진행되였지만 북만과 동만에서도 적극적인 반격을 가해 국민당군을 견제하고 싸웠다. 특히 6종대와 새로 편성된 10종대가 큰 활약을 보였다.
동북민주련군 기타 주력부대들이 료서방향으로 진군할 때 6종대와 새로 편성된 10종대는 장춘, 길림 부근의 적을 제거하는 작전을 진행했다. 6종대는 구참, 화피창의 적을 제거하고 10종대 28사는 구전을 공격했으며 29사는 우라가(乌拉街)로 향했고 10종대 30사는 기타 부대와 함께 덕혜(德惠)공격전을 발동했다.
길림부근의 아라디촌, 이곳은 벼농사를 지어 한때 소문이 높았던 곳이다. 길림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입쌀을 빼앗기 위해 수차 이곳을 공격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당시 지하당조직이였던 길림조선인지부에서는 이곳 수백명 조선족청년을 모아 조선족부대인 3영을 조직했으며 이 부대는 10종대 29사 86퇀에 편입되였다. 1947년 10월, 10종대 29사와 길동군분구 독립 6퇀이 우라가의 적을 공격했다.
길림시룡담구 아라디촌 조선족중학교.
우라가 백화점장대 전적지에 세워진 렬사기념비.
송화강기슭 무연한 평지에 위치한 우라가는 만족의 발상지의 하나로서 작지 않은 옛 진이였다. 특히 진뒤쪽으로 작은 언덕이 있었다. 송나라시기 북방의 녀진족이 건립한 금나라의 대장 금올출의 녀동생인 백화공주가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백화점장대(白花点将台)라고 부르고있다. 해방전 이곳에는 옛절이 있었고 국민당군은 이곳을 우라가를 수비하는 중점 전략요새로 만들어놓았다.
10종대 29사와 길동군분구 독립 6퇀의 조선족장병들은 신속히 우라가로 공격해나갔다. 아군의 공격에 밀리운 국민당군은 백화점장대에 수비진을 치고 완고하게 반항했다. 놈들은 백화점장대에 보루를 쌓고 절당을 전투보루로 구축해놓았을뿐만 아니라 주변에 깊은 해자까지 파놓았다.
아군은 수차 공격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군은 독립 6퇀의 3영을 주공으로 내세워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조선족전사들은 《점장대를 점령하고 항성신(项成信)을 사로잡자!》라는 구호를 부르며 공격에 나섰다. 장교덕 영장이 권총을 쳐들고 앞장서 돌진하자 전사들은 적탄을 무릅쓰고 돌진했다. 그들은 해자속에 뛰여들어 서로 전우의 어깨를 딛고 인체 사닥다리를 만들었다. 앞장선 몇몇 전사가 수류탄묶음으로 적의 화점을 제거했다.
3영 7련의 현의남 련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여러개 화점을 제거하고 적 지휘부를 점령하였다. 전사 문봉호가 앞장서 달려가며 수류탄을 높이 쳐들고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고 소리치자 놈들은 다투어 총을 버리고 두손을 쳐들었다. 이처럼 두려움 모르는 조선족부대는 우라가 공격전에서 적 900여명을 소멸하고 적 두목인 국민당 소장 항성신을 사로잡았다.
이와 같이 치렬한 접전을 거쳐 동북민주련군 6종대와 10종대 29사는 신속한 행동으로 길림시주변의 구참, 화피창, 구전, 우라가 등지의 적을 각개 소멸함으로써 길림시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한편 길동군분구의 독립 3퇀과 6퇀도 천강, 강밀봉쪽으로 밀고 들어와 적 수비군을 견제함으로써 기동부대의 작전을 유력하게 도왔다.
중국인민해방군 길림군구군사 수정고자료를 보면 길림군구 길동군분구의 독립 3퇀과 독립 6퇀은 모두 조선족부대였다. 독립 3퇀에 2개 련과 2개 패가 한족이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족이였으며 독립 6퇀도 1영이 한족이고 2영과 3영 그리고 퇀직속대가 전부 조선족이였다. 추기공세에 발맞춰 새로 편성된 독립 3퇀의 퇀장은 리평야이고 후임에 동숭빈이였으며 정위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전우였다. 그리고 부퇀장 지병학과 부정위 최채가 모두 조선족이였다. 독립 6퇀 퇀장은 동만토비숙청에서 명성을 떨친 박근식이였다. 이 부대의 정위와 부퇀장은 한족이고 정치주임은 조선족 리일홍이였다.
길림시에 고립된 국민당군은 아군주력이 자리를 옮긴 틈을 타서 쌀을 빼앗기 위해 나왔다. 국민당군 60군 182사의 두개 퇀이 강밀봉과 천강부근으로 나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길동군분구 독립 3퇀 3영 7련과 8련, 9련이 세면으로 길목에 버티고있는 402고지를 공격했다.
연길에 계시는 정관채로인은 강밀봉지역에서 싸우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47년도 그 다음엔 어디로 왔는가면 저 길림 들어가는데 강밀봉에 도착했소…강밀봉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47년도 그때가 나무잎이 금방 필 때요. 또 부대가 떠나는판이지. 원보산이란 곳이 있는데 많이 죽었소. 삼사십명이 죽었소.…전투가 쎘소. 그런데 그렇게 싸우다가 마감에 끝내 거기서 누가 죽었는가 하면 부패장이 거기서 죽고 키가 크고 나이가 젊은, 그다음 용식이 개타령 잘 부르는 용식이 거기서 죽구, 또 한사람은 바위에 올려놓았던 수류탄이 굴러내려 손목이 뚝 떨어져 나갔소. 여기 량식국에 있던 학림이라고 그 사람도 거기서 죽었소.》
주공임무를 맡은 9련 련장 김창룡과 지도원 최학송은 오형모(吴亨模)를 대장으로 하는 22명 당원돌격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가둑나무에 당기를 걸고 목숨으로 고지를 점령할것을 다졌다.
(정관채)《마감에 점령할 때 전 퇀의 당원을 모았는데 40명였소. 그들 당원들이 점령했소. 그때 당기를 처음 봤소. 당기를 가둑나무에 걸어놓고 거기에 당원들이 입을 맞추더구만. 그때 그런거구나 알았소. 공산당원이 뭔줄 몰랐고 모택동도 몰랐소. 전투하는 판이지. 당원들이 점령했소…당원들이 올라가는데 숱한 사람이 죽으며 점령했소.》
돌격대원들은 적진에 접근한후 수류탄을 던지며 돌격해 들어가면서 육박전을 벌였다. 힘장사 정동백은 총창으로 찌르고 총탁으로 때리며 세놈을 요정내고 중기관총 1정과 보총 두자루를 로획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7련과 8련도 고지량측으로 공격해와 전투는 승리적으로 끝났다.
눈덮힌 402고지 전적지를 가리키는 현지 로인.
402전적지의 무명렬사들의 묘소와 기념비.
402고지 전투에서 정동백은 대공 2차, 오형모는 대공 1차를 세웠다. 이로써 동만의 우수한 조선족장병들은 형제부대와 함께 로야령부근에서 계속 전투하면서 길림시의 적을 점점 조여나갔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