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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34)—장당의 백룡산전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27일 17:23
동북민주련군이 발동한 추기공세에서 동북의 국민당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전략적으로 조직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할수가 없었다. 섣불리 서만을 공격하던 국민당군은 동북민주련군의 8종대와 9종대의 유력한 타격을 받아 큰 실패를 보았다. 황급해진 동북 국민당군 총사령관 진성은 심양부근의 유일한 기동부대인 신6군을 철령으로부터 금주, 금서 지역으로 이동시켜 서만의 불리한 상황을 돌려세우려 했다. 하지만 이로 하여 심양부근의 많은 주요한 거점들이 동북민주련군앞에 로출되였다.

전투기회를 민감하게 포착한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공격의 예봉을 직접 심양부근에 돌려 동북중심부의 대중도시 주변의 적을 더 유력하게 타격하였다.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와 제4종대는 각자의 공격목표를 찾아 공격을 개시했다. 남만의 조선족청년들이 대거 참가한 제3종대는 심양의 국민당 53군 116사를 공격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공격을 앞두고 지도부에서 서로 반대되는 작전계획이 나왔다. 당시 국민당 116사는 서풍으로부터 위원보를 거쳐 심양부근의 개원에 이르기까지 긴 장사진을 펼치고있었다. 때문에 지도부에서는 먼저 서풍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과 직접 116사 사단부가 있는 위원보를 공격해야 한다는 서로 다른 주장이 나왔다.

두가지 작전계획을 받은 동북민주련군 총부에서는 멀리 우회하여 적의 중심부인 위원보를 직접 기습한다는 한선초 부사령원의 대담한 작전계획을 비준했다. 이 대담한 작전계획을 실현하려면 우선 천리길을 달려 비밀리에 위원보에 접근해야 했다.

작전명령을 받은 아군전사들은 두발이 부르트도록 있는 힘을 다해 뛰였다.

금주에서 만년을 보내는 3종대 출신의 리여길, 고영걸 등 조선족 로인들의 회억에 따르면 드높은 혁명정신과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천리강행군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웠을것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뛰여야 했다. 발에 피물집이 생겼다가 터치고 다시 장알이 박힐 때까지 그냥 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짐이거나 기관총은 다투어 자기가 짊어지겠다고 했다.

10월 1일 아침에 감쪽같이 위원보에 다달은 전사들은 위원보의 국민당군이 정상적으로 아침체조를 하는것을 보았다. 3종대 7사와 9사의 장병들은 공격을 발동해 먼저 위원보주변의 거점들을 제거한후 적 사단부로 공격했다. 놈들은 제대로 방어작전을 조직도 하지 못한채 실패하고말았다.

위원보기습작전에서 3종대의 장병들은 19시간만에 국민당 53군 116사를 전부 소멸하는 휘황한 전과를 올렸다. 그들은 적 1,800명을 격살하고 적 사장 류윤천을 비롯해 6,300여명을 생포했다.

위원보 기습작전을 이야기하는 제3종대 8사 22퇀 로전사 배석규(85세).

료녕성 무순교외의 장당대교.


한편 심양부근의 적 병력이 약화된 기회를 빌어 기타 부대도 심양부근으로 공격해왔다. 조선족 장병들이 많은 10종대 28사는 기타 주력부대와 함께 심양부근의 무순으로 진격했다. 당시 10종대 29사는 길림부근에서, 30사는 덕혜에서 싸우고있었다.

동부로부터 심양을 공격하려면 무순을 제거해야 하고 무순을 공격하려면 무순의 문호로 불리우는 장당(章党)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10종대 28사 장병들은 무순교외의 장당역에서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청년군 207사와 치렬한 공방전을 치르게 되였다.

무순교외에 위치한 장당은 작은 도시였지만 교통요새여서 심양으로 들어가는 철도선이 이곳을 지나고있었다.

18일 새벽, 28사 83퇀 3영이 먼저 장당을 공격했다. 적은 장당의 백룡산(白龙山)에 한개 보강련을 배치해 수비진을 쳤는데 이곳으로는 장당주민구와 장당 기차역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3영 7련과 9련의 공격이 좌절되자 8련이 백룡산서남부로 공격했다.


8련은 흑룡강성 오상의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강철의 부대였다. 8련 지도원이였던 김교진이 해방후에 8련에 관련한 자상한 자료를 남겼기에 우리는 8련의 영웅적 사적을 료해할수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후 흑룡강 오상의 조선족청년들은 자발적으로 무장을 들고 토비들과 싸웠다. 이들가운데 300여명 우수한 청년들이 북만으로 들어온 팔로군 359려단에 집단적으로 참군했는데 그중 150명이 8련으로 편입되였던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자 8련 부지도원 허창준(许昌俊)은 박격포와 기관총사격의 엄호하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개활지를 지나 백룡산밑에 당도했다. 9반 전투조장 리승호(李承镐)와 8반 부반장 강진모(姜真模)는 적의 화구를 우회하여 첫번째 철조망을 끊고 바위뒤에 몸을 숨기고 적의 화력을 끌어갔다.

기회를 기다리던 폭파조장 지달만(池达万)은 2분도 안되는 사이에 두번째, 세번째 철조망을 파괴하여 길을 열어놓았다. 전사들은 그 길을 따라 전진해 적 화구에 수류탄을 던졌다.


지달만이 적화구에 수류탄을 밀어넣었지만 놈들이 수류탄을 밀어내여 수류탄은 밖에서 터졌고 지달만도 그만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하지만 지달만은 상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수류탄 세개를 한데 묶어가지고 하나, 둘, 셋… 세면서 도화선이 거의 타들어갈 때 적 화구에 밀어넣고 아래로 내리 굴렀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적화구가 폭파되였다. 전사들은 잽싸게 산중턱을 넘어서서 산정의 보루로 돌진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국민당군은 심양의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적 비행기는 백룡산부근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놓았다. 크고작은 적 보루와 화구에서는 계속 기관총사격이 멈추지 않았다. 보루의 적은 필사적으로 반항하면서 반격해왔다.

전사들은 적의 화구를 제거하면서 반격해오는 적과 치렬한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적아간의 혼전에서 부련장 김성옥(金成玉)과 1패 패장 장일환(张日焕), 2패 부패장 김영걸(金英杰)이 부상했고 뒤이어 부지도원 허창준도 부상당했다. 련락병 리두섭(李斗燮)은 허창준의 명령에 따라 1패 부패장 원영기(元永基)에게 전투를 지휘하라고 전했다. 이때 적탄이 리두섭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원영기가 리두섭을 돌보려 하자 그는 안깐힘을 다해 땅에 《임무는 생명보다 중하다》는 글을 썼다. 글을 보면서 원영기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이때 탄약이 떨어진 지달만은 언덕으로 우회하다가 돌을 들어 적 기관총수의 머리를 치고 목을 졸라 죽인후 기관총을 빼앗아 적진을 향해 사격했다. 그리고 선참으로 적보루에 올라간 원영기는 수류탄으로 적을 항복시키려 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눈에 달이 오른 전사들은 일제히 수류탄을 던져 보루의 적을 소멸했다. 두려움 모르는 8련 전사들이 적 보루를 제거하자 다른 방향으로부터 1영 3련도 공격해왔다. 전사들은 일제히 돌진해 승리적으로 백룡산의 적을 전부 소멸하고 교통요새인 장당역을 점령했다.

전투후 상급에서는 3영 8련에 《임무는 생명보다 중하다》는 글발이 새겨진 금기를 수여했다. 이번 전투에서 8련은 집체대공 1차를 세우고 원영기, 지달만, 리영호, 강진모가 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들은 8련의 4용사로 불리우기도 했다.

앞장서 백룡산전투를 지휘했던 8련 부지도원 허창준.

장당대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백룡산.

백룡산기슭의 장당역.


1947년 9월부터 11월까지 50일간 진행된 추기공세에서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군 7만여명을 소멸하고 추풍에 락엽 쓸듯이 심양, 장춘, 길림 주변의 크고작은 적의 거점을 제거하고 15개 도시를 해방했다.

추기공세가 끝난후 각 부대는 한동안 휴식과 정돈, 훈련에 들어갔다. 이때 동북민주련군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할데 관한 라영환의 건의가 동북국의 동의를 거쳐 중앙의 비준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때로부터 동북민주련군은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게 되였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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