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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3]《문화대혁명으로 선수의 꿈은 접었지만 축구는 포기안했습니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9.15일 08:31
연변팀 전국 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13)

-길림성축구팀 김윤철원로



1965년 길림성축구팀에는 나어린 김윤철선수도 들어있었다. 비록 주력선수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신들메를 단단히 졸라매고 출전을 준비하며 예비팀의 시합에 참가했다.

올해 74세 고령인 김윤철옹은 당년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의 우승을 따내던 휘황한 시기를 회억하며 비록 정식 맴버로 출전은 못했지만 긍지감에 벅차했다.

《그 당시 길림성축구팀은 체력이 강하고 작풍이 완강하고 기술이 전면적이였습니다.》

김윤철옹에 따르면 당시 길림성팀은 7승 2무 2패의 성적으로 강팀의 용맹과 저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고 한다.

김윤철옹은 65년 전국 우승을 따낸 비결에 대해 련맹경기전에 우승하려고 미리 계획한것이 아니라 평소 갈고 닦은 훈련과 더우기는 조선족축구팀으로서 항상 민족적자부심을 가지고 필승의 신념으로 매 한껨의 경기를 대비한 결과라고 밝힌다.



1989년 연길시공상국축구팀 감독으로 재임시절 전국조선족운동대회 우승을 (앞줄 왼쪽 세번째 사람 김윤철)

김윤철옹과 길림성축구팀의 인연은 아주 우연한것이였다.

고향이 길림성 왕청현인 김윤철은 소학교부터 고중시절까지 연길시에서 학교를 다녔다. 연길시2고중에서 륙상선수와 배구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당시 전국배구경기에 출전하고 돌아온 이튿날 김윤철은 학교축구팀 교련원인 리정엽선생으로부터 축구팀 문지기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였다.

21살 젊음의 패기로 꿈도 많았던 시절 김윤철은 평소 배구훈련이 끝난후에도 운동장에서 애들과 함께 늘 축구를 찼는데 때때로 익힌 문지기 기술도 능수능란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지손가락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때마침 학교축구팀이 연변주축구경기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경기를 앞두고 의외로 문지기가 상해 안타까와하던중 리정엽선생은 문지기의 빈자리를 김윤철로 메우려 한것이다.



1965년 전국 우승을 한후 공장을 참관하고있는 길림성축구팀

당시 전 주 고중축구경기가 도문시에서 펼쳐졌다. 김윤철은 축구교련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날렵한 몸과 기술로 문대로 다 들어간 공을 여러차례나 아찔하게 쳐내며 연길시2고중 축구팀이 전 주 고중시합에서 우승하는데 대공을 세웠다.

그번 시합이 끝난후 김윤철의 이름은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해 고중 졸업을 앞두고 길림성청년팀으로부터 문지기 요청과 함께 길림성체육학원 입학통지서도 함께 받았다. 당시에는 길림성청년팀에 가입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길림성체육학원 졸업증도 딸수 있는 우월한 조건이 있었다.

60년대 중기 길림성청년팀은 길림성축구팀의 예비팀으로 선수래원을 보충하는 역할을 충분히 담당하고있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으로 길림성축구팀이 해산(두번째줄 오른쪽 첫사람 김윤철)

한달동안 길림성청년팀의 후보문지기로 훈련하던중 어느 날 , 한차례의 련습경기가 있었는데 한명의 공격수가 사유로 오지 못했다. 후보문지기로 경기에 출전할수 없었던 김윤철은 불시로 공격수로 뛰고싶은 욕망이 생겼다. 당시 청년팀 박상복감독한테 용기를 내서 공격수 출전을 요청하니 박감독은 의아한 눈길로 한동안 김윤철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간절하고 신심에 찬 눈길이 어딘가 례사롭지 않은지라 잠시 공격수로 기용해보았다.

후보문지기로 따분한 훈련에만 얽매우다가 오랜만에 공격수로 나선 김윤철은 초롱에 갇힌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듯이 축구장에서 펄펄 날았다. 그 시절 김윤철의 100메터 달리기 속도는 11초 1로서 청년팀에서 가장 빨랐다. 뿐만아니라 신체소질이 좋고 평소에 짬짬이 축구련습도 부지런히 한 보람으로 전업팀 선수 못지 않은 기량을 보여 그날 경기에서 꼴까지 넣는 행운을 지녔다.

그번 시합이 있은후 박지도는 규례를 타파하고 김윤철을 문지기로부터 공격수자리에 내세웠다.

1964년 양력설이 지나 김윤철은 다른 6명의 청년팀 대원과 함께 길림성팀의 동계훈련에 함께 참가하게 되였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윤철은 길림성팀의 후보선수로 뛰였다.



1964년 길림성중학생축구경기에 참가한 김윤철(세번째줄 오른쪽 세번째사람)

당시 길림성팀의 훈련량은 아주 강했는데 보통 한번에 2기간씩 하루 3차례나 훈련했다고 한다. 하루 훈련량은 보통 1만 3000메터이고 대운동량훈련에서는 1만 5000메터도 넘게 뛰다보니 선수 모두가 숙소에 돌아오면 자리에 쓰러지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1965년 조선국가팀이 이듬해인 1966년 영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 참가 준비를 위해 광주에 있는 축구훈련기지에서 길림성축구팀과 아래우 경기장을 사용하며 훈련했는데 길림성축구팀이 훈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선선수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조선팀도 작풍이 완강하고 훈련량이 강하기로 해내외에 소문났지만 길림성축구팀의 훈련강도는 월드컵을 준비하는 조선국가팀 못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국가체육총국에서 길림성축구팀 등 국내 여러개 축구팀을 불러 조선국가팀간의 련습경기를 배치했으나 조선국가팀은 유독 길림성팀과 맞설 용기가 없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길림성축구팀이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에서 우승한후 연변의 축구열기는 대단했다.우승컵을 안고 고향에 돌아온후 길림성축구팀은 고향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축구팀은 짬짬이 시간을 타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등 공장, 광산에 내려가 당지 로동자축구팀과 훈련경기를 하며 축구보급에 적극 나섰다.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 우승을 한후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을 방문

김윤철의 축구기량도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 중요한 경기에서 주력선수로 뛰는 기회가 빈번했다. 이듬해인 1966년 5월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가 대련에서 있었다. 김윤철이 한창 길림성축구팀 주력선수의 꿈을 꾸며 상승일로를 달리고있을 때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는 중단되고 김윤철은 김림성축구팀과 함께 연길로 돌아왔다. 그후 길림성축구팀의 정상적인 축구 훈련과 경기는 계파간 싸움으로 정규적으로 조직할수가 없었고 1969년 7월 길림성축구팀은 끝내 해산되는 비운을 맞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축구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김윤철의 두고두고 한으로 맺힌 말이다.

그후 김윤철은 연변농구공장에 내려가 주조직장 주임직을 맡고 사업하지만 종래로 축구의 꿈을 포기한적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농구공장축구팀을 조직해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고 여러차례나 주급경기에서 우승을 일궈냈으며 1980년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82년 사업의 수요로 연길시공상국에 전근한후에도 김윤철은 연길시공상국축구팀 총감독직을 맡고 1998년 퇴직하기전까지 연길시공상국축구팀을 이끌고 여러차례나 주, 성급, 전국적인 경기에서 우승을 일궈냈다.



연변주로간부국에서 당구를 치고있는 김윤철원로

73세의 고래희에 접어든 김윤철옹은 오늘도 분망하다. 현재 연변주로간부국에서 로년당구팀을 조직하고 올해에도 주로년당구경기에 참가했다고 한다.

김윤철옹은 현재 연변축구팀에 대해서도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 연변팀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원인은 한국적 박태하감독의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며 박태하감독이 평소 훈련과 선수들에 대한 관리를 잘 틀어쥐니 연변팀 경기성적도 올라갈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현재 연변팀이 후반 20분이 지나면 체력이 부족하고 장거리 패스 정확도가 떨어지는것이라며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면에서 반드시 개진해야 한다고 귀뜀한다. 그러면서 연변축구팀이 전국 우승 50돐을 맞는 해에 슈퍼리그로 진출해 연변인민을 위해 새로운 휘황을 창조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며 희망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강동춘특파기자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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