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사회 > 사회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우리 안의 군대문화] <5> 업무 외에도 상명하복

[기타] | 발행시간: 2013.08.17일 03:35

해병대 극기훈련 체험에 참가한 한 구청 공무원들이 16일 인천 무의도 체험장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쪼그려 뛰기를 하고 있다. 무의도=박서강 기자 pindropper@hk.co.kr

과장이 부장의 집사 노릇… "병장 수발하던 이등병 시절 느낌"

군 경험자가 상층부 형성 "군대식 관리가 효율" 인식

20대 대기업중 10곳서 병영캠프·극기훈련…

전사원 모아 종무식하고 폭탄주 강요 회식 여전

"제한시간 안에 이 정도도 못 뛰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동료들이 기다리는 거 안 보입니까. 벌칙으로 팔 벌려 뛰기 300회, 팔 굽혀 펴기 50회 시작합니다. 실시!"

지난 2011년 한 대기업 계열 문화컨텐츠 제작사에 입사한 이숙영(28ㆍ가명)씨는 신입사원 교육기간을 잊을 수 없다. 지방 소도시에서 합숙하며 매일 아침 단체체조, 1㎞ 구보를 해야 했고 병영캠프에 참여해 높이 11m에서 줄에 매달려 하강하는 레펠, 갯벌 뒹굴기, 보트로 강 건너기 등 군사 훈련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씨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건 "인사를 안 한다" "복장이 불량하다"며 수시로 후배들을 집합시키는 선배들. 그는 "교육기간 동안 '군기가 빠졌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며 "문화컨텐츠 제작사여서 직원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위계와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올해 초 국내 한 대형은행 과장으로 승진한 박철민(36ㆍ가명)씨가 승진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점장과 외부 인사들 간의 점심, 저녁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직무와 상관 없이 지점장의 개인 일정을 관리하는 가욋일이다. 박씨는 "군대에서 병장 수발을 했던 이등병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퇴근 후 시간까지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꺼림칙하지만 과장이 지점장의 '집사' 역할을 하는 것은 업계 관행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업무가 아니어도 상관의 명령은 무조건 따른다는 것을 증명하는 집사 역할은 승진의 필수코스"라고 설명했다.

노골적인 욕설과 얼차려만 없을 뿐 위계질서와 획일적 집단 행동을 강요하는 기업 분위기는 직장인에게 일상일 뿐이다. 현재 자산기준 상위 20대 대기업 중 신입사원 연수기간 병영캠프나 행군, 극기훈련 등을 실시하는 곳은 10곳에 달한다. 전 사원을 집합시켜 사장 말씀을 전하는 시무ㆍ종무식, 회장님 앞에서 선보일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밤새 연습을 시키는 사원 연수, 폭탄주를 강요하는 회식 풍경도 기업 속 군대문화의 단편이다. 개인의 기호와 개성은 묵살된다. 수년 전 한 대기업에 입사한 이원근(32ㆍ가명)씨는 컬러렌즈를 착용하고 출근했다가 '튀는 놈', '눈치 없는 놈'이라는 공개 비난을 받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를 떠났다. 대부분의 직장에선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는 직원보다 상사 말을 무조건 따르는 직원이 인정받는다.

기업들이 이런 군대문화에 젖어있는 밑바탕에는 시장 경쟁은 전투와 같고 군대식 조직 관리가 업무실적을 높일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홍두승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공사나 납품 기한을 맞춰야 하는 건설, 중공업, 제조업의 성장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목표지상주의가 기여한 측면이 있어 이러한 문화가 유지된다"고 분석했다.

또 조직의 상층부를 군생활을 경험한 남성들이 대부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친다. 홍 교수는 "군대에서 '까라면 까라'는 식의 가치를 내면화한 남성들이 기업 운영에 군대 사고방식을 적용해 상명하복 문화가 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일부 기업들이 장교 출신을 따로 채용하는 것도 이들이 조직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군대문화가 기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신화는 군사정권 시절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데 기여한 면이 있지만, 구성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거세하고 합리적 의사결정을 가로막아 결과적으로 경쟁력을 떨어뜨리거나 사고로 이어진다. 지난해 초 해태그룹이 경기 양주시에 추진 중이던 복합문화단지 조성 공사 현장에서 직원이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단적인 예다. 해태그룹은 문화에 관심이 높은 회장의 철학에 따라 직원들의 예술지수를 높이기 위한 사내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수 명목으로 공사에 동원된 직원은 3m 높이 철재 임시구조물에서 지붕 설치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변을 당했다. 오너나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연수에 빠질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 직원들이 대부분 거부하지 못하고 참석했다"고 말했다.

직장 여성들은 군대문화의 또 다른 폐해를 호소한다. 남성성을 능력과 동일시하는 인식, 남성적 문화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황연정(31ㆍ가명)씨는 "술을 강권하는 회식 분위기가 싫어 자리를 뜨면 결국 여성들은 중요한 업무에서 배제되기 일쑤"라며 "남성들이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만드는 과정에 군대문화가 상당히 활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기업 내 군대문화는 외환위기(IMF)를 거쳐 세계 경쟁이 가혹해지면서 더욱 공고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윤민재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IMF 이후 기업이 이윤 추구 논리와 효율성의 가치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군대식 조직 문화를 강화한 측면이 있고, 구조조정을 겪으며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게 된 구성원들도 이를 용인하고 내재화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산업 구조의 중심축이 일사불란한 조직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2차 제조업 중심 산업에서 개인의 창의성이 강조되는 3차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는 지금,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군대문화를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 교수는 "기업이 프로젝트마다 별도의 팀이나 부서를 구성하는 등 조직 구성에서 변화를 주고 있는 만큼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한국일보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0%
10대 0%
20대 0%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화제를 모았던 배우 '고현정'이 자신의 일상을 소개한 '브이로그'를 공개했다. 지난 14일 고현정의 유튜브 채널 '고현정'에서는 '고현정 브이로그 1' 영상이 새롭게 업로드됐다. 해당 영상에서 고현정은 한 브랜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
1/3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매니저에게 자수 부탁" 김호중, 소속사 개입? '녹취파일 경찰 입수'

"매니저에게 자수 부탁" 김호중, 소속사 개입? '녹취파일 경찰 입수'

트로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김호중'이 최근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그의 소속사 대표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니저에 김호중을 대신해 경찰에 출석하라고 지시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호중은 지난 9일

"유튜브 해킹 당해" 뉴진스님 윤성호, 결국 '오열' 한 이유

"유튜브 해킹 당해" 뉴진스님 윤성호, 결국 '오열' 한 이유

'뉴진스님' 캐릭터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맨 윤성호가 힘들었던 지난해를 되돌아보다 결국 오열했다. 지난 15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에서는 '선샤인' 특집으로 꾸며진 가운데, 개그맨 윤성호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날 유재석은 윤성호에게

'범죄도시 4' 1천만명 돌파…한국영화 시리즈 첫 '트리플 천만'

'범죄도시 4' 1천만명 돌파…한국영화 시리즈 첫 '트리플 천만'

배우 마동석 주연의 액션 영화 '범죄도시 4'가 15일 천만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4편까지 나온 '범죄도시' 시리즈는 한국 영화 시리즈 최초로 '트리플 천만'을 달성했다. 배급사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범죄도시 4'는 이날 오전 누적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